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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194화 (194/427)

건축의 신 194화

3학년 2학기(02)

“어. 형 오셨어요?”

내가 들어가자, 민수는 책을 덮고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응. 잘 다녀왔어?”

여름 내내 땡볕에서 일을 했던 모양이다.

살이 쪽 빠진 녀석은 눈썹 아래로만 까만 것이 어딘가의 난민처럼 보였다.

그런 녀석이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녀석을 꼭 껴안았다.

얼마 헤어지지도 않았건만, 그 얼굴이 얼마나 반가운지.

“고생 좀 한 모양이네.”

민수의 등을 토닥였다.

“고생은요. 공부하러 간 건데요. 뭘.”

이런저런 안부를 묻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민수를 현장으로 데려가지 않고, 제 할아버지에게 보낸 것은 목적이 있었으니까.

“최 옹께서는 어떻게 하신대냐?”

내가 민수에게 준 과제는 여름방학 동안 ‘할아버지 꼬시기’였다.

민수가 눈을 피하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결과가 안 좋았구나.’

민수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녀석이었다.

말로든, 표정으로든.

녀석에게 소파를 가리켰다.

“왜 안 된다고 하시든?”

“연말에 밀린 일이 많으셔서 안 된다고 딱 자르셨어요.”

일?

그만큼 좋은 핑계가 어디 있나?

꼭 해야 하는 것은 일을 미루더라도 하는 법이다.

“지금도 바쁘시냐?”

“잠시 댁에서 쉬고 계세요. 그래서 저도 올라온 거구요.”

“일단은 지금은 집에 계신다는 말이겠네?”

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단 말이지.”

민수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퓨전? 그것도 확실한 베이스가 깔려야 퓨전이 되는 거지. 어중간한 것들끼리 섞어 놓으면,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그냥 개밥이 된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한국 대사관의 주재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박람회다.

그들의 눈높이를 만족시키려면 어중간한 것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누구나가 알고 있는 것을 누가 새롭다고 하겠어?’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봤는데, 다르게 보인다면 그것은 새롭다고 할 수 있다.

차원이 다르다는 말은 ‘새롭다’의 다른 해석이다.

그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 전통기술자들이고, 그들은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지식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귄터가 말했었지. 전통은 말이나 숫자가 아니라, 손끝으로 전달되는 거라고.’

그들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 진정한 전통의 산물이고, 그들은 곧 살아있는 전통과 같았다.

민수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형. 제가 말을 잘 못해서.”

“미안하기는. 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겠지.”

진심은 전달되기 마련이지만, 녀석의 집안 내력으로 볼 때, 전달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리라.

“아냐. 난 네가 할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다시 가면 된다.

일의 끝은 실패가 아니라, 완성이다.

실패라고 칭하는 것들은, 완성되기 전에 손을 놓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

‘더군다나 민수에게! 바랄 걸 바래야지.’

“이번 여름에 ‘스타타워’만 없었으면, 너랑 같이 갔을 텐데, 아쉽네.”

민수가 능력을 발휘해야 할 곳은 다른 부분이다.

‘이럴 때는 한석이가 보고 싶네. 설레발을 쳐도 시키는 건 무조건 하는 놈이었는데.’

“그래도 할아버지가 안 계시면, 곤란하겠죠?”

“음. 너희 할아버지가 최선책이지.”

“안될 것 같으면 민석이 형이라도 불러올까요? 돈 준다고 하면, 잽싸게 뛰어올 텐데.”

확실히 그의 손재주는 쓸 만했다.

예전에 아르바이트라며 부석사 무량수전을 만든 것을 보았을 때,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으니까.

“단지 박람회만으로 끝낼 거였다면 그 녀석이라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이제 더 큰 목적이 생겼거든.”

총장에게 했던 학과 개설의 포부를 말했다.

“그걸 위해서라도 너희 할아버지가 필요하고, 나는 그분이 학과의 중추적 인물이 되어주셨으면 한다고.”

손재주는 민석이라는 사촌이 이어받았다고 해도, 녀석은 전통 장인들을 휘어잡을 카리스마가 없다. 그걸 위해서라도 최기형 옹은 꼭 필요했다.

민석이 열 명과 한 교수 열 명을 합쳐놔도, 전통 건축 분야에 대해서는 대목장 하나에 못 미친다.

‘이걸 해결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인데. 어떡하지?’

만약 안 되면?

그때는 다른 비슷한 레벨의 사람을 구해 봐야지. 우리나라에는 대목장이 자그마치 3명이나 있다.

그러나 차선책은 어디까지나 차선책.

“쉽지 않으실 거예요.”

“임마!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냐?”

“우리 할아버지 보통 분은 아니시거든요.”

“야!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아. 지성이면 감천이라! 그런 말 몰라?”

‘지금까지 민수한테 공들인 게 아까워서라도 그분을 잡아야겠다.’

지금까지 민수를 부려먹은 게, 공들인 거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해 주겠다.

‘내 나름대로 관심의 표현이었다고.’

‘양심이라는 게 있기는 하냐?’고 묻는다면, 민수 녀석이 스스로 좋아서 했던 거라고 말해 주지.

녀석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민수야. 그렇지?’

내 눈빛에 민수가 찔끔하며 말했다.

“아뇨. 형.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젠장!’

답도 없는 고민이 무슨 소용?

소파에서 일어났다.

“생각은 가면서 하고. 일단 일어나자.”

“어디 가시게요?”

하늘을 봐야 별을 따고, 연못에 가야 잉어를 잡는다.

부릉부릉.

내 카미가 울부짖는다.

카미, 내 카마로의 애칭이다.

압둘의 카미처럼, 목숨처럼 귀한 친구가 되어 달라는 의미에서 지었다.

‘주인. 내가 가야 하는 곳이 어디냐? 부릉부릉.’

내 뜻대로 움직이고, 내가 원하는 곳에 데려다 줄 녀석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애초에 다른 사람을 생각한 적도 없다고요.’

누가 뭐래도 반드시!

대목장 최기형 옹, 그분은 험난함이 예상되는, 내 건축 항로를 헤쳐 나갈 항해사가 되어 주어야 했다.

선장이라고 모든 것을 알까?

한 손이 열 손을 이길까?

최 옹의 대안은 분명히 존재했으나, 어떤 분은 금전 문제로 말년에 좋지 않은 소문이 있었고, 다른 한 분은 일찍 돌아가셨다.

그가 아직은 세상에 큰 명성을 날리지 못했다.

허나 먼 후일 최 옹의 숨은 업적이 드러나 인생이 재조명되었고, 전통을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칭송받았으니, 지금의 내게 그보다 더 적합한 항해사는 없었다.

‘좀 더 빨리 유명해지면 어때! 윈윈이라고!’

허나 내가 알기로, 그가 먼 훗날 조명을 받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민수 너네 할아버지, 엄청 깐깐하시다며?”

녀석이 운전대를 잡은 내게 히죽거렸다.

“어떻게 아세요? 아는 사람만 아는데.”

“흐흐. 내가 그 아는 사람 중에 하나다.”

민수는 자세한 설명 대신 한마디로 축약했다.

“만나 보면 아실 거예요.”

그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되랴?

“더 말해 봐. 어떤 분이신지?”

만나 보지 못하고, 매체로만 접했기에 설레기 이전에 긴장부터 된다.

‘오죽 깐깐했으면, 죽기 직전에야…….’

게다가 적을 알아야, 꼬시든 후리든 할 것이 아닌가?

잠시 생각 끝에 민수가 말했다.

“음. 우리 할아버지는 양반스러운 분이세요.”

우리는 ‘점잖고 예의바른 사람’을 양반이라고 호칭한다.

살짝 기대감이 생겼다.

“그리 무서운 분은 아닌가 보구나.”

“네. 무섭지는 않아요.”

이 나이에 무섭다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나쁜 사람, 혹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구나.’하는 말을 돌려 말했을 뿐이다.

친구의 존장에게 ‘네 할아버지, 꼰대시냐?’라고 물을 수는 없지 않을까?

***

마을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니, 고택이 보였다.

너른 공터에 카미를 세우고 그곳으로 향했다.

“여기냐? 할아버지 댁이?”

고택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민수가 물었다.

“들어가기 싫으시죠?”

사실은 그랬다.

이 집은 양동마을은 물론이고, 하회마을에 있는 여느 고택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딱히 위압감을 주는 것도 아니라고.’

지금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은 내 어깨 높이의 흙담이었다.

담벼락 위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기와들이 줄지어 서 있고 말이다.

“야아. 못해도 50년은 넘은 것 같은데?”

“저도 몰라요. 제가 어릴 때도 이랬으니까요.”

민수도 감상에 젖는 모양이었다.

“그때는 이 담벼락이 그렇게 높아보였는데.”

“그래서 그렇게 높아 보이나 보다.”

뜻 모를 소리를 들었다는 듯, 민수가 반문했다.

“뭐가요?”

“이 담벼락. 반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켰으니.”

요즘처럼 집을 허물고 짓는 게 일상인 시절에 이 정도면 주택계의 거목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국세로 관리하는 집도 아닐 텐데 말이야.”

“할아버지가 직접 관리하시니까요.”

“손때가 묻어난다는 건 이런 거겠지?”

“그런 게 보이세요?”

녀석은 피식 웃었지만, 나만큼의 감흥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담벼락을 따라가며 집 주변을 살폈다.

집의 외부를 둘러본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들어가기 망설여지는 이 집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에 대한 탐색의 의미도 겸했다.

‘허점이 보인다면, 공략할 구멍도 보이리라.’

스물 중반의 건강한 눈과 마흔 중반의 눈썰미로 약점을 스캔했다.

그러나 쥐가 파먹은 흔적조차도 없었다.

“어깨도 못 미치는 이 담이 공간을 나누네.”

담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심리적 경계였다.

사람 키보다 큰 담, 곳곳에 CCTV가 달린 최첨단 주택들보다도 더 엄하게 경계를 긋고 있었다.

기와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훌쩍 뛰어넘으려고 한다면 한순간이겠지만.”

“넘어가면 도둑이 되는 거죠.”

민수의 농담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는 흙담이 자신을 어필하고 있었다.

‘나처럼 멋있는 담벼락 봤어? 난 장식이 아니라, 이 집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고.’

안이 다 보이니, 사생활이 침해당하지 않느냐고?

‘직접 보지 않으니, 하는 말이겠지.’

담 안에 심어진 대나무들이 외부의 시선을 딱 필요한 만큼 차단하고 있었다.

무언가 움직이는 윤곽은 보이지만, 정확히 뭘 하는지 파악할 수는 없다.

‘보고도 알 수 없으니, 못 본 거랑 뭐가 다른가?’

또한 운치와 실용성, 그 둘을 한꺼번에 잡았으니 지혜롭지 아니한가?

폐쇄적이지 않으면서, 마냥 개방적이지도 않다.

그 광경이 내 입에서 감탄사를 자아낸다.

“허. 묘하네.”

이 느낌을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당함.’

어중간해 보이는 담벼락과 대나무의 콜라보레이션이었다.

지금 내가 아는, 우리 건축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런가요? 전 그걸 느끼는 형이 더 묘한데요?”

익숙함이란 무감각의 다른 표현.

하지만 내게는 새로움이었다.

“넌 무덤덤해졌을 테니까.”

항상 곁에 있으면 그렇다.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고, 언젠가는 돌아가실 부모의 귀중함을 모르듯이.

이런 것이 하나둘 사라져간다.

전통 살리기 운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소수 약자들의 피 끓는 목소리는 짤랑거리는 동전 소리에 묻혀버린다.

‘세상이 다 그렇지.’

돈 있는 자들의 관심은 돈에만 있다.

내가 할 일은 ‘전통? 그게 다 돈 덩어리다.’라는 것을 그들에게 확인시키는 것이다.

그 뒤는 욕심쟁이들이 알아서 전통의 가치를 캐내게 될 것이다.

“형은 이 집이 마음에 드시나 봐요?”

“음…… 표현하기 애매하다.”

이게 한국의 문화적 산물이라면, 다른 나라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것도 프라이버시에 대한 개념이 강한 서양인이라면.

‘이걸 퓨전으로 어떻게 요리할 수 있을까?’

내가 알던 전통 건축이란, 대학생일 때, 몇 번의 답사, 그리고 TV에서 본 지식이 전부였다.

생동감 없이 바라보던 그것들이 내 눈앞에 실재하니, 그 느낌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저 막연하게 아는 미래에 인생을 걸었던 건가?’

민수의 말이 내 귀를 스쳐지나간다.

“집주인을 보시면 애매함이 사라질 거예요.”

돌다 보니, 어느새 솟을대문 앞에 서 있었다.

대문 좌우로 작은 행랑채가 하나씩 있고, 행랑채부터 시작된 흙담은 반대편에서 끝이 났다.

문지방을 넘어서기도 전에 이 집 주인이 어떤 성격일지를 알 수 있었다.

50살이 넘은 흙담을, 손볼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꼼꼼하게 관리하는 사람이 이집의 주인이었다.

‘이 문턱을 넘어서면, 대목장 최 옹의 영역이다.’

허나 다 와서 문지방을 못 넘어서야, 어디 시도는 해 봤다고 말이라도 할 수 있으랴?

잉어를 낚으러 왔다가, 호랑이에게 물리게 생겼지만, 일단 들어가고 볼일이다.

민수에게 말했다.

“들어가자.”

내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들어갈 때는 빈손이지만, 나설 때도 그렇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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