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91화
스타타워 현장(17)
시장은 능글맞은 웃음으로 답했다.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거냐?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 이 양반이 지금 사이를 들먹이면서 나를 공으로 써먹으려고?’
이 정도면 속이 훤히 보이지 않는가?
‘너구리같은 영감탱이!’
차라리 대놓고 속을 드러내니 편하다. 뒤로 호박씨 까는 것보다야 훨씬 더 믿을 만하지 않은가?
“시장님이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일 정도로 한가한 분으로 보이지는 않아 보입니다만.”
“울산시장이 울산을 도는데, 이유는 무슨?”
치직.
-김 기사. 아직 볼일 안 끝났어? 얼른 와. 귀빈들한테 인사만 하고 온다면서?
뒤에서 투덜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오늘 공정 맞추려면 죽을 둥 살 둥 해도 시간이 부족한 판에, 귀빈인지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 와서는 우리 김 기사를 데리고 가고 그랴?
분명히 송신 버튼을 누른 채 투덜거리는 거였다.
-아따. 이 양반들이, 나가 성훈 씨만 부르라고 했제, 워째 그 딴 헛소리를 하고 자빠졌당가?
문 차장이 무전기를 빼앗는 모양이었다.
‘문 차장도 거기 와 있는 모양이네.’
-아따. 답답허네. 그럼 문 차장님이 무전 때려서 오라고 하셔!
-뭔 소리당가? 누구 욕을 먹일라고. 나는 싫당게.
소장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귀빈인지 뭔지 라니. 큭. 저것들이…….’
소장의 얼굴이 더 검어지기 전에 무전기를 꺼버렸다.
“저 바쁜 거 보이시죠? 말 돌리지 마시고 용건만 말씀하세요. 아니면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리시든가?”
“김 기사. 어허. 말조심.”
내 입을 막으며, 소장이 연거푸 죄송하다는 말을 해댔다.
시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제지했다.
“냅두쇼. 녀석 버릇없는 건, 내가 알고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는 귀빈일지언정, 내게 시장은 귀찮은 존재였다.
‘그것도 아주아주 귀찮지.’
비록 내 목적을 위해 시작한 거였지만, 힘들어 보여서 호의를 보였더니, 아주 두고두고 빨아먹으려고 하네.
시장이 나를 좋아하고 위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방향이 다르면 귀찮을 뿐이라고. 정치는 무슨 정치! 꿈도 꾸지 마. 이 양반아.’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평양 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안 한다고.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 갑니다.”
시장이 내 손을 잡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커흠.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으니, 직접 온 거잖나. 안 그래?”
내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제가 거기서 할 일은 끝났으니까 그렇죠. 한 교수도 있잖아요. 이제 한 교수하고 상의하세요.”
정치인들 특기가 적반하장이었던가?
되레 내게 으름장을 놓으며, 나를 달랬다.
“성훈이 너 이 녀석!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끝을 봐야지. 저렇게 내팽개치고 가도 되는 거냐?”
시장 수법 다 아는데, 그게 위협이라도 되랴?
“내팽개치다뇨. 초안까지 다 잡아주고 왔는데.”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초안만 딸랑 잡아주고는 얼굴도 한 번 안 비치더라. 전화도 안 받고 말이야. 너무한 거 아니냐?”
‘이 양반아. 그거 해준 것도 어딘데!’
여러 인재가 모여 자기들의 의견을 내놓으니, 그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을 필요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초안을 잡는 일을 했을 뿐이다.
오히려 급하게 초안을 마무리 지은 감도 없지 않았다.
‘어쩔 수 없잖아. 시장이 옆에서 눈에 불을 켜고 결과를 내놓으라 닦달하는데. 윽! 또 생각나네.’
난 정치인들 특기가 번갯불로 두부 만드는 건줄 그때 알았다.
콩도 안 삶았는데, 두부 내놓으라는 것은 어인 행패인가?
계획이라는 것도 숙성의 기간이 필요한 건데, 그걸 다짜고짜 내놓으라고 하면 누가 좋아할까?
여러모로 시장은 트러블 메이커였다.
그러니 모아놓은 건축가들이 시장만 다가가면 은근슬쩍 자리를 피할 정도였고, 시장을 전담 마크하는 일은 당연히 내 차지가 되었다.
한 교수도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성훈아. 제발 저 양반 좀, 연구실에 못 오게 해라. 심장 쫄린다.”
초안을 잡고 시청을 나오면서 시장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완전 전문가의 영역이니까, 아무 소리도 하지 마세요. 건네준 스케줄 그대로 진행할 거니까, 어떻게 잘 발표할지만 신경 쓰세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서 하나라도 더 보태면, 그 일정 다 어그러지니까, 책임지세요.”라고.
“문제가 있습니까?”
“내가 뭐가 문제인지 알겠나? 어쨌거나 연구원들이 성훈이, 너만 찾는다고. 뭐 그리 바쁜지 안 오냐고 해서 내가 데리러 왔지.”
저건 허풍이다.
능글맞은 웃음이 걸려 있으니 더더욱 확실하다.
문제가 있었으면 한 교수에게서 벌써 연락이 왔을 테고. 무엇보다도 모든 트러블의 시발점은 시장이었다.
이 말은 시장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는 말이었다.
‘하긴 시장의 설레발이 있었기에, 그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지만.’
수십 명의 젊은 건축가가 시장에게 휘둘릴 때, 나와 한 교수는 각자의 포지션을 확실히 챙겼다.
나는 막고, 한 교수는 케어하고.
그런 최상의 결과를 만들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시장이라는 일등공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교수님은 아무 말씀 안 하시던데요?”
“당연하지. 하기 싫다는데 억지로 데려오면 분탕질밖에 안 일으킬 거라고 하더구나.”
그걸 알면서 왔단 말이야?
“하지만 네가 그럴 리가 없잖나. 안 그래? 네가 그렇게 신경을 쓰던 일인데, 자기 손으로 망치지는 않을 거 아니냐?”
‘흥.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 일은 안 망쳐도, 그렇게 만든 사람을 골탕먹일 수는 있다고!’
능글맞게 웃는 얼굴로 내게 싱글거렸다.
처음에는 근엄한 척 하더니, 속내를 나눈 뒤로는 사람을 엄청나게 귀찮게 하는 위인이었다.
결국 문제는 없다는 말이군.
“유치원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요?”
한동안 ‘스타타워’에만 몰두하다 보니, 바깥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거기. 난리도 아니다.”
‘엥? 난리?’
“유치원이라고 지어놨는데, 건축가들이 몰려와서 견학을 하겠다고 해서 말이야. 내 동생이 좋아서 비명을 지르고 있지. 절로 홍보가 된다고 싱글벙글이야.”
하긴 건축 잡지에도 이름이 실리고, TV에도 몇 번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제 현장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시장에게 물었다.
“한 교수님이 다른 말씀은 없으셨고요?”
보좌관의 은근한 귀띔에 시장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한 교수가 항만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던데?”
“그건 한동신 씨에게 전적으로 일임하라고 하세요.”
“엥? 한동신은 왜?”
그 사람이 ‘AECOM’에 있을 때, 항만설계로 실력을 인정받았거든.
‘지금 당장이야, 상황이 달라서 그만큼의 수준은 안 된다고 해도.’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괜히 있을까?
원래 그럴 역량이 되었다는 말이고, 그걸 거기에서 터뜨렸다는 거지. 여기서 안 될 사람이었다면 거기서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차. 말을 해줄 거면 완전히 해줘야지.’
“아! 그리고 한동신 씨한테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을 모티브로 삼으라고 하세요.”
“뭐?”
“그냥 그렇게 말씀하시면 알아요.”
시장은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설명하려고 하면 한나절이다.
예전에 말했잖나.
건축가들은 일반인들과 쓰는 언어가 다르다고.
그라면 이 정도만 말해도 뭐가 필요한지 알아들을 것이다.
너무 자세한 설명은 창의력이 생겨날 여지를 막아버릴 뿐이니까.
시장에게 말했다.
“저 진짜 갑니다. 가도 되죠?”
시장이 사장에게 물었다.
“그래도 되지? 자네는 따로 할 말이라도 있나?”
시장이 동행을 보며, 눈을 끔뻑거린다.
그에겐 장난기 어린 행동이라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장난이랴?
‘말을 하라는 말이야, 말라는 말이야?’
동행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없습니다. 시장님. 저는 다음에 또 오죠.”
“그럼! 울산은 내가 있으니까 염려하지 말게. 성 사장, 자네는 어여 서울이나 올라가라고.”
너스레를 떨더니, 돌아서는 나를 다시 불렀다.
“아 참. 성훈아.”
“네. 시장님.”
“내기는 잊지 않았지?”
“네? 내기요?”
“요놈 봐라. 벌써 잊었단 말이야? 월드컵 8강!”
“아! 그게 왜요?”
“잊지 마라. 이긴 사람 부탁 들어주기로 한 거.”
시장의 말을 듣고 웃음이 나왔다.
“네. 네. 안 잊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 내기의 결과가 나왔을 때, 시장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가 궁금했다.
‘여차하면 내가 붉은 악마 응원단장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음주가무 능한 한국인이 응원이라고 딸리랴?
믿는다. 붉은 악마!
그들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며 무전기를 켰다.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쿵쾅쿵쾅.
내려가면서 시장의 동행을 떠올렸다.
‘얼굴을 본 기억이 있는데, 누구더라?’
치직.
-사람들 기다린다니까. 얼른 좀 오셔.
무전기 소음이 귀를 어지럽히면서, 만났던 장소가 얼핏 떠오를 듯 하다가 금방 다시 사라졌다.
‘시장과 같이 있었으니, 시청에서 봤던 사람인가 보지.’
상념을 지우며 무전기를 들었다.
“지금 거의 다 왔으니까, 재촉하지 마세요. 네?”
시장이 자꾸 친한 척을 한다.
‘목적이야 뻔하지. 같이 하자는 것.’
그에게서 몇 번이나 들은 말이다.
‘정치권으로 간다고 건축 일을 못 할까?’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뭐든지 가능하겠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데, 뭐 때문에 못한다고 하면, 그건 내 입장에서 봤을 때는 핑계에 불과하다.
‘죽은 사람도 과거로 돌아가는 판에 불가능이 무슨 말이야?’
하지만 나는 건축의 길로 가고 싶다.
***
성 사장이 물었다.
“시장님. 그냥 하라고 시키시면 되지. 뭐 그렇게 일을 어렵게 하십니까?”
“말도 마. 저거 완전 말이야. 그것도 성질이 드러운 말.”
성 사장이 연유를 물었다.
“내가 안 했겠어? 한 교수한테 지시를 내려놨더니, 쪼르르 쫓아와서는 자기 설계에 전시행정 따위는 없다면서, 되레 내게 엄포를 놓지 않겠나? 다 박살내 버릴 거라면서 말이야.”
“쫓아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시장이 헛웃음을 쳤다.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우리 도시계획 연구소, 다 저놈이 만든 거야.”
“그렇습니까?”
“그러고는 놈이 그러더군. ‘제가 원하는 건 결과물이고, 시장님이 원하는 건 그에 대한 성과입니다. 가만히 계시면 최고의 성과를 안겨 드릴 테니, 실무는 건드리지 말아주세요.’라고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나 지금 지지율 최곤데 몰랐어?”
시장이 웃으며 자랑을 했다.
“시장 선거는 당연한 거고. 전국에서도 이 정도 지지율이라면, 대통령 나가도 돼!”
다음 시장 선거의 승리를 확신하는 그를 보며, 사장도 할 말을 잃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고, 말한 것처럼 결과를 던져주는데, 건드려서 불똥 튀기는 건 바보가 하는 짓이니까.
“그럼 여기 오실 이유도 없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시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성훈과 했었던 정치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을 이유가 어디 있으랴.
보물은 혼자만 가지고 있어야 보물인 법!
“시장으로 만족한다면 그렇겠지.”
몇 번의 국회의원을 거쳐서 울산의 초대 민선 시장이 되었으니, 정치인으로써 도전할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대선!
시장이 성 사장의 등을 치며, 능글맞게 웃었다.
“성 사장. 자네만 알고 있으라고.”
“네. 시장님.”
시장이 말을 이었다.
“곧 녀석은 나와 함께 일하게 될 테니까. 엄한 데 눈독 들이지 말라는 말이지.”
‘안전모는 분명히 정치에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어거지로 될 것 같았으면, 내가 먼저 데리고 왔지.’
성 사장이 물었다.
“시장님께서는 저 녀석이 왜 시장님 밑으로 들어가리라고 확신하십니까?”
“허허허. 그건 말이야.”
눈으로 되묻는 성 사장에게 말했다.
“저 녀석이 터무니없는 내기를 걸더라고?
“뭡니까?”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8강 안에 들어간다고 말이야.”
“네? 그런 터무니없는.”
누가 봐도 그것은 터무니가 없었다.
우리나라 최고 기록은 16강.
8강의 벽은 너무 높았고, 불가능으로 보였다.
“녀석이 그런 내기를 걸었다고요?”
“내기는 내가 걸은 거지! 녀석은 받아들였고. 난 절대로 8강은 못 간다고 했거든. 내가 축구 도사 아닌가?”
승산 없는 싸움을 받아줄 녀석이 아니기에, 성 사장은 그 이유를 물었다.
“붉은 악마가 있기 때문이라나. 고작 응원단 몇 때문에 선수들의 실력이 늘 수는 없지 않는가? 물론 사기 진작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말이야. 안 그래? 허허허.”
“그렇군요. 저도 어이가 없습니다.”
성 사장이 딴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을 할 녀석은 아니고. 응원단에 지원이나 푸짐하게 해 줘야겠군.’
내가 못 가진다면 다른 사람도 못 가져야 속이 시원한 법이다.
“성 사장.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제가 뭘 어쨌다고요?”
“다 저놈 좋으라고 하는 말이야.”
그는 성훈이 사라진 곳을 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건축 외길로 가는 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야. 녀석 정도면 어떤 방식으로든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거라고 확신하네.”
“그렇겠지요. 싹수가 있는 놈이니까요.”
“하지만 한국에서 뭔가를 하려고 하면, 금숟가락 물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은 어려워. 알지?”
힐끗 쳐다보는 시장을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저야. 뭐…….”
“그렇게 태어나지 않은 바에야, 정치를 하는 것도 괜찮은 판단이지. 건축 혁명을 한다고 치세. 그걸 정치판에서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그는 성훈의 정치 인생을 확신하는 듯,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볼일 끝났으니, 성 사장도 가 봐야지?”
“네. 저도 이제 움직여야지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