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85화
스타타워 현장(11)
어젯밤.
울산의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곽 이사는 뜬금없는 항의전화를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 현장의 황 이사였다.
“웬일인가? 사우디 현장은 잘 돼…….”
인사를 끝맺기도 전에 황 이사의 짜증을 들었다.
-곽 이사. 자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나?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럴 수 있냐니? 뭐가?”
-우리 현장에서 일 잘하는 사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빼갈 수 있냐? 그 말이지. 너무 하는군. 이 현장도 바빠 죽겠는데.
“오밤중에 무슨 소리야? 진정하고, 차분하게 말을 해 봐.”
영문을 모르는 곽 이사는 가슴이 답답했다.
‘뭔 사우디에 일만 있으면, 나냐?’
황 이사가 낮에 벌어진 일에 대해 말했다.
-알리 왕자가 차 사장을 한국으로 돌려보냈다는데, 우리 회사에서 알리 왕자한테 다이렉트로 통할 사람이 자네밖에 더 있냐? 안 그래?
중동통으로 통하는 곽 이사이니, 충분히 오해를 살만했다.
그리고 그 일의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 곽 이사는 금세 알아챘다.
‘성훈이 불렀군.’
그가 아는 정보로는 성훈과 차 사장이 모종의 관계가 있었고, 차 사장을 알리 왕자와 연결시켜 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다만 일부의 사람만 아는 것일 뿐, 황 이사가 알리는 없었다.
‘결국 현장의 석공팀을 쫓아버린 모양이군. 하여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황 이사가 싹싹 빌며 부탁을 했다.
-여기 현장 차 사장 빠지면 될 일도 안 된다고. 대가리가 빠졌는데, 무슨 일이 되겠어? 안 그래? 잘 좀 설득해서 돌려보내 줘.
곽 이사가 말했다.
“최선을 다해 보겠네. 고생하게나.”
‘그렇다면 벌써 시작된 건가? 잘 하면 진 소장, 그놈을 쫓아낼 구실이 생기겠는 걸.’
전화를 끊자마자 문 차장에게 전화를 돌렸다.
“문 차장. 일미리스톤 사장, 그 현장에 들어갔다면서?”
촐싹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매. 이사님. 소식도 빠르시고만요. 어뜨께 아셨대요? 지도 방금 야그를 들었는디. 울 성훈이 알아줘야 한당께요. 나가 아무리 불러도 콧방귀도 안 뀌더니.
‘성훈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옆에는 없는 모양이군. 그게 편하지.’
성훈이 옆에 있을 때의 문 차장은 눈치를 보느라 할 말을 다 못하는 타입이었다.
“흐흐. 그것 때문에 사우디 현장에서 난리도 아니라네. 거기 상황은 어떤가?”
-소장이 성훈이 잡을라고 사람들을 내보냈는디, 떡하니 다른 사람으로 채워 놨응께, 소장이 그냥 넘어가겠슈? 인자 한판 붙는 일만 남았지라.
‘붙는다고? 성훈이랑? 미친놈. 상대를 제대로 봤어야지. 액면 그대로 봤다가는 큰코다치지.’
곽 이사 생각에는 승부는 이미 났다.
“하하. 그럼 내가 손 볼 일도 없겠구먼.”
문 차장의 목소리가 뚱했다.
-참말로 고로코롬 생각하신다요?
뭔가 맘에 안 든다는 말투.
이상한 위기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게 무슨 말인가? 좀 더 자세하게 말해보게.”
-성훈이 그 잡것이 보통 승질이 아닌 건 아시쥬?
“그야 당연히…….”
알리 저택에서 있었던 일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나간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에 대해 성훈이 알리 왕자에게 입만 뻥긋하면?
성훈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는 알리 왕자였다. 압둘은 또 어떻고.
‘휴!’
에어콘이 빵빵한 차 안임에도 가슴이 답답했다.
차창을 열고 바람을 맞았다.
문 차장은 누가 들을 새라, 입을 가리고 말하는 듯 했다.
-혹시 성훈이가 곤조 부리면 워떠케 되는지는 아시나 여쭤보는 거구만유.
“알지.”
‘그건 내가 자네보다 더 뼈저리게 알고 있다네.’
-그라믄 성훈이가 현장 뒤집어엎기 전에 총알맨키로 내려와서 현장 정리 하셔야쥬. 손 놓으실 것이 아니라.
“아차. 그렇군. 내가 생각이 짧았네. 고마우이.”
-지도 성훈이가 직접 날뛰면 감당이 안 되니께. 지가 드릴 말씀은 그것 뿐이구만유.
“알겠네. 내일 새벽같이 출발하도록 하지.”
-최대한 빨랑 내려오셔유. 현장 아작 난 다음에 나타나봐야 헛발질잉게.
***
문 차장의 충고대로 현장에 도착했고, 성훈이 발작하기 직전에 소장에게 날아차기를 시전할 수 있었다.
‘휴! 정말 간발의 차이였어!’
퍽. 퍽. 퍽.
그래도 이놈도 명색이 소장인데, 이 정도면 충분히 체면을 구겼겠지.
“어험.”
헛기침을 하며, 뒤로 돌아섰다.
문 차장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성훈의 뒤에서 힐끔힐끔 눈치를 준다.
‘성훈이 얼굴 보쇼잉? 풀렸는지?’
성훈은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지켜보는데 전혀 기분이 풀린 것 같지 않았다.
‘아직 안 풀렸을까?’
문 차장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하이구. 택도 없당께요! 이사님이 대신 맞을 거여유?’
‘어떡하면 되지?’
문 차장에게 눈으로 물었다.
‘뭘 물어본다요? 더 밟아 버려야제. 마음이 풀릴 때꺼정.’
문 차장은 입술로 성훈을 가리키며, 행동을 종용했다.
‘그래. 겨우 이 정도로 면피가 될 리가 없지.’
고민의 시간을 짧았다.
둘이 눈빛을 주고받은 시간은 겨우 일 초.
곽 이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시 돌아서서 진 소장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진 소장에게는 눈곱만큼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살아야 남도 보이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넌 지은 죄가 너무 커!’
다분히 감정이 실린 발길질이 계속되었다.
작업반장들도 얼어붙어서 말릴 엄두를 못 냈다.
공포의 분위기가 소장실을 장악했다.
누가 말릴 줄 알았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힘닿는 데까지 밟아보자.’
“휴!”
이마에 땀을 닦으며, 곽 이사가 돌아섰다.
꿀꺽. 꿀꺽.
소장 자리에 있던 냉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소장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 찰나의 순간, 문 차장과 곽 이사 간에 눈빛이 오가는 것을 봤다.
‘연기들을 잘 하시네.’
하지만 곽 이사의 발길질에는 진심 어린 짜증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 증거로 소장은 아직도 구석에 웅크린 채,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문 차장이 나서며 인사를 했다.
“아따! 이사님. 바쁘실 텐디, 어쩐 일로다가.”
문 차장은 곽 이사가 온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처럼, 능청을 떨고 있었다.
“흠흠. 어제 통화를 하고 보니, 내가 너무 이 현장에 신경을 안 썼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다른 사람 현장도 아니고, 성훈 군의 현장인데 말이지. 내가 너무 무심했네.”
문 차장이 나서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이렇게라도 관심을 가져 주시니께, 우리야 감사할 뿐입죠. 안 그랴? 성훈 씨.”
내게도 동의를 구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정도에서 이 건은 마무리 짓자는 것으로 보였다.
‘하긴 더 일을 키울 이유는 없지.’
저렇게 솔선수범하는데. 성의를 봐서라도.
문 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곽 이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성훈 군.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현재건설에서 알아서 할 일이 아닙니까?”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네. 어차피 자네 현장 아닌가?”
최대한 내 편의를 봐 주겠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나야 좋지.’
곽 이사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 맘에 안 들면, 어차피 또 뒤집을 거잖아. 안 그런가?”
그 말에는 차마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성훈 군. 그러니까 여기서 같이 정리해 보자고. 이리 와서 앉게. 문 차장, 김 과장도 얼른 오고.”
내가 회의탁자로 다가서자, 작업반장들이 슬금슬금 옆으로 비켜섰다.
그들에게 물었다.
“반장님들? 현장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녀. 아녀. 아까도 말했지만, 아무 문제없어.”
“분명히 문제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공정대로 일정 못 맞추는 일은 없겠죠?”
“그럼. 그럼.”
“무조건 맞춰 놓으시고. 나가서들 일 보세요.”
“응. 알았어. 나가세나. 얼른.”
반장들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
“성훈이, 저 친구는 뭐하는 사람이래?”
“모르지.”
“그런데 이사라는 분은 또 왜 저리 저자세여?”
“모르긴 몰라도, 평범한 사람은 아닌가 봐. 어제도 봤지. 든든한 빽이 없으면 저렇게 못 한다니까. 분명히 뭔가 있어?”
“아따. 실없는 친구. 그런 소리는 나도 하겠다. 믿을 만한 근거를 대야지.”
“쯧쯧. 빨리 일이나 하러 가세. 성훈이 저 친구 엄포 놓는 거 보니까. 대충 안 넘어갈 거 같구먼. 쫓겨나고 싶어?”
“그나저나 돌 반장은 어떡한대? 사흘 뒤에 들어온다고 큰소리치고 나갔는데, 영영 못 들어오게 생겼네. 다른 자리 찾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랴. 그 솜씨 가지고는 제대로 대우도 못 받을 텐데. 수정하랄 때, 조용히 하지.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가지고. 쯧쯧.”
***
소장도 곽 이사의 옆에 자리를 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한다고 했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문 차장이 말을 꺼냈다.
“함바 사장은 무조건 잘라야 되는 구만요.”
“뜬금없이 함바 사장은 왜?”
곽 이사가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문 차장의 말에 동의하듯 김 과장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호응에 힘을 얻은 문 차장이 말을 이었다.
“현장 기사들을 자기 쫄다구처럼 여긴당께요. 안 그라요? 성훈 씨?”
“그 사람이 좀 거만하긴 했죠.”
문 차장의 적극적인 권유로 소장의 형, 함바 사장은 일 순위 퇴출 대상이 되었다.
“끙.”
소장이 인상을 썼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자기 자리를 걱정해야 할 소장이라,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였다.
관련 당사자이니, 자리를 준 것일 뿐.
또한 처분이 결정되면, 외주업체 사장인 제 형제들에게 회의 결과를 전달해야 할 것이 아닌가?
성훈이 물었다.
“그럼 대체할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헤헤. 나가 아는 요리 잘하는 사람이 있는디?”
“누군데요.”
“쪼까 나가 아는 사람이라서 거시기헌디…….”
어차피 결국은 말을 할 거면서 저렇게 끈다니까.
“빨리 말씀 안하시면 다른 사람 추천받습니다.”
“성훈 씨도 얼굴 몇 번 봤을 것인디? 저그 전하동서 호프집 하던 그 양반.”
아마도 성훈과 처음 만났을 때, 그 호프집 여사장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인상도 좋았었고, 실제로 음식 솜씨도 꽤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랑 동향인디, 음식 솜씨가 좋구만이라. 마음씨도 곱고.”
“네. 누군지 저도 알아요.”
“역시 기억하는구만이라. 건물주가 보증금을 올려 달라 그래서, 쫓겨나서 놀고 있당께. 욕심 없는 사람잉께. 잘할 것이여.”
곽 이사를 슬쩍 바라보자, 알아서 하라는 눈치였다.
“알았어요. 그럼 그분으로 하세요. 처음에는 직영으로 하고, 맡겨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부터는 맡기든지 하세요. 대신 말 나오게 하시면 안 됩니다.”
수백 명 작업자의 밥을 책임지는 식당이다. 허투루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곽 이사가 물었다.
“다른 외주업체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작업반장들 선에서 해결 안 되니까. 외주 사장들 전부 호출하세요.”
“그래서?”
“잘할 것 같으면, 굳이 바꿀 필요 없고, 안 되면 전부 갈아야죠.”
“갈았을 때, 대책은?”
“제가 세워야 하는 겁니까? 그것도?”
“아니. 아니. 내가 알아서 하겠네. 신경 쓰지 말게.”
곽 이사에게 물었다.
“진 소장은 계속 여기 두실 겁니까?”
“아니. 그럴 수야 없지. 그런데 고민일세.”
“뭐가요?”
“한국에는 마땅한 현장도 없고, 그렇다고 오래 데리고 있던 놈인데…….”
나랑 싸운 게, 큰 죄는 아니지 않던가?
이런 일로 그의 평생직장이 박살나서는 내 꿈자리가 시끄럽다.
다른 소장이라고 해서, 이런 짓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현장 소장과 외주업체와의 커넥션은 한국에서 관례처럼 행해지는 일이었다.
진 소장 입장에선 단지 재수가 없었던 거지.
쥐를 잡아도 도망갈 구멍은 주고 몰아세우라고 하지 않던가?
“한국에 자리 없으면 거기로 보내세요.”
곽 이사가 반색하며 물었다.
“어디?”
“최 이사님 가 계신 곳이요.”
“아! 거기?”
곽 이사가 말했다.
“성훈 군. 소장하고 잠시 얘기를 했으면 하는데, 자리 좀 비켜주면 안 될까?”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집어 놓으려다가 참은 겁니다. 아시죠?”
“알지. 그럼! 참아줘서 고맙네.”
“저 현장 나가 있을 테니까, 사장들 오면 부르세요.”
닫힌 문틈으로 소장의 곡소리가 들려왔다.
콰당탕.
“이 등신 같은 놈아. 내가 분명히 말했지!”
큭.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제발 소장 자리에 엉덩이만 붙이고 있으라고.”
크헉.
“왜 망할 놈의 자식이 말을 안 들어? 엉?”
“이사님. 한번만 용서를…….”
“용서 같은 소리가 그 주둥이에서 나오냐?”
크헉.
“너 최 이사한테 가 있어라.”
“최 이사님은……. 엉? 알래스카 말씀이십니까? 이사님. 제발 거기만은.”
“한 몇 년 자숙하고 있으면 부를 테니까, 거기서 반성하고 있어.”
“왜 싫어? 그럼 사표 쓰던가?”
그날 바로 외주업체 사장들이 몽땅 소환되었고, 내가 원하는 대로 교체되는 데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