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73화
기둥은 꼭 있어야 하는가? (20)
한동신의 설명이 끝났다.
일어서는 기자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고작 그 한 건으로는 완벽하게 특종이라고 하기 애매하겠죠?”
“이 정도면 중박은 되지. 아까 그 인간 정치권으로 가려고 계속 기웃거렸다고.”
그 윗선과 윗선을 건드리는 건덕지가 된다는 말이렷다.
“하지만 완전히 매장시키기는 쉽지 않겠죠?”
이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그들에게 파일을 내밀었다.
“이거 뭔데? 사건 파일 같은데?”
“여기 계신 분들 중에 한건협 회장과 관련 있는 분들 파일이에요.”
“엉? 정말?”
다른 건축가들의 눈도 내게로 쏠렸다.
그중에 눈을 빛내는 몇 사람이 파일의 주인공일 터.
기자들이 내게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저런 나약한 자들을 왜 도와주냐고?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싸워야 하지 않느냐고?’
나는 저들을 비난할 수 없다.
방금 전의 나는 그들을 비난했었다.
이 정도도 헤쳐 나오지 못한다면 나와 일할 자격이 없다고.
‘하지만 지난 삶의 나였다면 저들을 비겁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상되는 대답은 ‘NO’였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지난 삶에서 나보다 몇 배나, 아니, 비교도 안 되게 잘나갔었다.
한동신?
지금 저렇게 맥없이 보인다고 무시할 수 없다.
10년 뒤, 그는 수백만 불의 연봉을 받기로 하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가 ‘AECOM’에 안겨준 수익은 그가 받은 연봉의 100배가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사람이 한건협 회장의 압력을 못 이겨서 미국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그는 사용자가 누구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명검이었지만, 적어도 한국은 주인이 아니었다.
그런 그도 지금은 약자였다.
‘그런 사람을 내가 품으면 어때?’
그리고 회장에게 당한 사람들도 모두 약자였다.
갑에게 저항할 수 없는 처절한 약자들.
‘기회를 주는 게 뭐 어때서.’
기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건협 회장. 그거 개새끼네. 개새끼.”
“어지간히도 많이 등쳐먹었네. 빌어먹을 놈.”
저들의 욕지거리가 커질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그만큼 더 크게 대서특필해 줄 테니까!’
기자들에게 소리쳤다.
“내일 아침 조간 보겠습니다. 제대로 안 하시면 알죠?”
기자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말라고. 우리 신문이 가장 크게 찍을 테니까. 다음에는 나부터 부르라고.”
“하하, 이 기자. 난 일면에 그놈 얼굴만 반을 올릴 거야.”
“자, 이제 한 사람씩 불러서 인터뷰해 보자고. 한동신 씨는 했으니까, 박주강 씨?”
미래의 제다타워 설계자, 박주강이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이 기자가 말했다.
“뭐든지 억울한 일이 있었다면 말씀만 하세요. 토시 하나도 안 틀리고 일면에 실어드리지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박주강이 나를 본다.
“하세요. 이런 기회가 또 올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 기자가 말했다.
“박주강 씨 다음은…….”
기자들에게 바통을 넘기고 촬영장으로 돌아왔다.
“PD님, 아까 그거 찍었어요?”
“그럼 누구 명인데, 안 찍겠어.”
“잘 편집해서 내보내세요. 실력 믿습니다.”
“날 믿으라고. 다시는 그 인간이 세상에 얼굴 내밀지 못할 정도로 멋있게 살려주지.”
한건협 회장도 최대한 수를 쓰겠지.
신문사 쪽 일을 보더라도 꽤나 연줄이 있는 것 같으니까. S대가 어디 보통 대학이던가?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
‘시간 싸움이라면 내가 이깁니다. 회장님.’
이미 방송이 나간 뒤에는 되돌릴 수 없다.
그가 지을 인상을 떠올리니 미소가 지어졌다.
‘평생 그렇게 구정물 속에서 살아라. 수면 위로 나올 생각하지 말고.’
“무슨 웃음을 그렇게 무섭게 짓나? 성훈 군?”
전현준이었다. 아까 한동신의 선배라던.
“방송 시작했는데, 방청하시지 않으시고요?”
“해야지.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뭡니까?”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네.”
그는 한참이나 어린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옆에는 한동신도 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둘이 내 손을 붙잡았다.
“고마워, 성훈 군. 한건협 회장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많았다네. 하지만…….”
“나서기가 쉽지 않으셨겠죠.”
“부끄럽지만 그렇다네. 고맙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네.”
노교수도 함부로 나서기를 저어했는데, 그보다 어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잘못 건드렸다가는 자신의 이름은 물론이요, 모교에도 똥칠을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동신의 얼굴에도 고마움이 떠올라 있었다.
“성훈 군, 정말 고마워. 10년 묵힌 체증이 풀린 기분이야.”
“헤헤, 10년은 아니죠. 7년인데요.”
“하하하. 그러네.”
가슴의 화병이 사라진 듯, 아까보다 훨씬 더 밝은 표정이었다.
한동신을 보며 생각했다.
‘옆에서 잘 케어만 해주면,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될 사람이라고.’
지난 삶에서 그의 기사를 보고 한국의 그런 현실을 얼마나 비판했던가? 한편으로는 부러워도 했었고.
지금 내 눈앞에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해 미국인이 된 인재가 있었다.
‘여기서 마무리만 잘하면, 나는 이런 인재를 몇 명이나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너무 생색을 내는 것도 좋지 않으리라.
‘뭐든지 적당한 것이 좋지.’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가려는 나를 한동신이 붙잡았다.
아쉬워서인가? 그가 물었다.
“뭐가 그리 바쁜가? 내가 돕겠네.”
‘어차피 공모 설명하는 건데, 그래도 되겠지?’
그의 간절한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야 고맙죠. 공모 설명하려고 하는데, 어차피 건축가분들 대상이라.”
“해야 할 일이 뭔가?”
“관심 있는 건축가들 좀 모아주세요. 설명서가 영 허접해서요.”
한동신과 전현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
모니터에는 프랭크와 시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모니터 뒤편에서는 나와 건축가들의 질의응답이 이뤄지고 있었다.
“5개년 계획이라고 들었네. 하지만 하다가 흐지부지된다면 별로 의미가 없다네.”
응당 나올 만한 질문이었다.
“시장의 다음 선거를 위한 전시행정이 아니냐. 걱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계획은 5년 동안 진행될 것이며, 분기별로 진행 상황을 시장이 직접 시민들에게 브리핑할 계획입니다.”
“그럼 전시행정은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내 앞에 있는 젊은 건축가들이 계란으로 보였다.
‘잘 구슬려서 바구니에 넣기만 하면 되는데.’
이들 중 한 사람도 10년 동안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한 사람은 없다.
죽자고 10년을 파도 그 분야에서 이름을 알리기 어려운데, 이들은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성훈 군이 무슨 일을 하든, 함께 해보겠네.”
기자회견을 마치고 돌아온 박주강이었다.
그 뒤로 몇 명의 사람이 더 들어왔다.
그중 몇 사람은 눈이 벌게져 있었다. 울었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지. 마음고생이 심했을 테니.’
저들 모두 몇 년 후에는 외국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한건협회장 때문에.
‘그러고 보면 그 인간도 선구안은 참 좋아.’
좋은 일에 썼다면, 두고두고 칭찬을 받았을 텐데.
그들의 의견에 한동신과 전현준도 동참했다.
‘분위기가 만들어져 간다. 흐흐흐.’
공모전의 세부사항은 이들에게, 그리고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뭐 맘에 안 드는 사항이 있으면 시장에게 바꿔 달라고 하지.’
***
3부가 시작되었다.
건축가들이 프랭크에게 연이어 질문을 던졌다.
편안하게 주고받는 토론 분위기였다.
‘과연 저 사람들 중에서 얼마나 내 영역에 묶어둘 수 있을까?’
내가 아는 한 교수라면 충분히 그들을 소화할 것이다. 시기가 약간 빨라졌을 뿐.
‘내가 삐끼라면, 한 교수는 점장인 건가?’
피식 하며 웃음이 나왔다.
난 그들을 끌어들일 능력은 있지만, 끝까지 유지할 실력은 되지 않는다.
‘겨우 기초 단계면서, 그런 걸 바라면 무리겠지.’
아깝지 않냐고?
‘무슨 말씀을!’
한 교수가 저 그룹을 더 견고하게 하고, 나는 그걸 온전히 물려받을 역량을 키우면 되는 거지.
그럴 역량을 키우지 못하면?
역량되는 사람이 물려받으면 된다.
‘그때는 나도 배 두드리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있을 텐데 뭘.’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가 내 어깨를 짚었다.
시장이었다.
그는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한 명도 빠짐없이 공모에 참가신청서를 냈더군.”
“뭐, 시장님의 제안이 구미가 당겼던 모양이죠.”
“흐흐흐. 과연 그럴까?”
“참, 나중에 공모 조항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건 알아서 하게나. 대신 자네가 주도해야 돼.”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죠. 제 프로젝트인데.’
이 젊은 건축가들의 진짜 실력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까 한건협 회장을 잘 주무르던데?”
“아하, 그거요? 그분이 저질러놓은 일이 너무 많으셔서 오히려 쉽던데요.”
“더러운 수로 괴롭힐 텐데, 후환이 두렵지 않나?”
나를 시험하는 눈빛이다.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별로요. 저도 아는 사람 많아요. 오히려 뒤에서 시비를 걸어오면 고맙죠.”
내 말의 뜻을 시장이 알 것인가?
정히 기분이 나쁘면, 회장에게 그리스행 티켓을 선물해 버릴 테다.
“꽤나 배포가 크군그래.”
“제 인생이 좀 험난했습니다.”
“고맙군. 이런 기회를 줘서.”
“별말씀을요. 이제는 시장님 하시기 나름이죠. 실력자들은 제가 모을 테니, 마무리를 잘해주세요.”
“이렇게 일만 벌여놓고 빠지려고?”
“아뇨. 당연히 같이해야죠. 하지만 굳이 제가 메인이 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나는 경험을 쌓고, 실제적인 일은 한 교수와 건축가들이 하면 된다.
울산이라는 거대한 판을 깔아줬고,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건축가들을 데려왔다.
시장이 엉뚱하게 깽판만 놓지 않으면, 알아서 굴러갈 것이다.
‘오히려 시장을 잘 감시해야겠군. 이 노인도 만만치 않은 너구리니까.’
시장이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랑 같이 일해볼 생각 없나?”
“지금 하고 있잖습니까?”
“5개년 계획?”
“네.”
“그거 말고, 정치 말일세. 아까 보니 잘하더구만. 한건협 회장.”
“그거야. 그럴 만한 인간이니까요.”
“정치에서는 그걸 더 간단하게 할 수 있다네.”
시장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아직은 생각이 없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볼게요.”
나중을 말하는 내게 시장이 미소를 지었다.
“아쉽구만. 자네를 한번 키워보고 싶었는데.”
“왜요? 저 말고도 정치하겠다는 사람 많을 텐데요.”
“생각하는 스케일도 크고, 행동력도 있지. 그런데 무엇보다도 사심이 없어.”
“그야.”
지금 관심은 건축뿐이니까 당연한 거 아닐까?
나와 함께 프랭크를 보며, 시장이 말했다.
낮은 소리였다.
“늙은이가 조언 하나 해도 되나?”
“네, 감사한 마음으로 경청하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눈은 프랭크에게 가 있었다.
“성훈 군, 나는 실패한 정치인일세.”
‘응?’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그래도 반절은 성공했으니 말일세.”
시장이 쑥스러운 듯, 머쓱하게 웃었다.
“대부분 정치인의 목표는 제 생각대로 정치를 하는 것일세. 우리들 중에 최고통치자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걸세.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실패했다는 거지.”
노회한 정치인의 인생회고인가?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정치인의 생명은 인맥이지. 그리고……. 이번 일을 계획한 자네의 의도에도 인맥이 있다고 보이네.”
뜨끔했다.
‘언제 그걸 알아챈 거지?’
“훗, 정치판에서만 40년을 굴렀네. 그 정도는 눈 감고도 알 수 있지. 저들 보이나?”
그의 눈은 프랭크에게 가 있었다.
“나도 인맥을 쌓으며, 정치인생을 걸었네. 하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인위적으로 만든 인맥은 남아 있지를 않아. 마지막에 남은 것은 나를 좋아해서 따랐던 사람들이지.”
그렇겠지. 결국은 사람을 따라가는 거니까.
“하지만 저 프랭크라는 양반은 굳이 인맥을 만들려고 하지 않아도 만들어진다네.”
“그만한 실력과 인품이 있죠.”
“그렇지. 인맥은 그렇게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렇죠.”
시장이 말을 이었다.
“인맥(人脈) 중에서 인을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맥을 중시할 것인가? 잘 선택해야 할 걸세.”
길게 말하지 않았지만 의미는 알 수 있었다.
인(人)은 빛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리라.
자신의 매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
맥(脈)이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줄기를 말하는 것이리라.
하고 싶은 말이 끝난 듯, 시장이 돌아섰다.
“그리고 월드컵 약속. 꼭 지키게.”
“훗, 알았어요. 걱정 마세요. 시장님.”
그의 임기가 끝나는 날, 월드컵도 끝난다.
축구광인 시장은 ‘못해도 8강은 가지 않을까요?’라는 내 말에 ‘우리나라는 절대로 8강을 못 올라간다’고 못 박았다.
그리고 내게 내기를 걸었다.
내가 맞으면 자기가 부탁 하나 들어주고, 시장이 맞으면 내가 부탁 하나 들어주기로.
‘붉은 악마가 잘해줘야 할 텐데.’
내가 아는 미래가 계속 변하고 있지만, 대한민국 월드컵 4강. 이건 제발 바뀌지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