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72화
기둥은 꼭 있어야 하는가? (19)
그것으로 방송은 끝났다.
회장이 진 교수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마터면, 같은 편으로 취급당할 뻔 했잖아. 멍청한 놈. 앞으로 동문회는 생각도 하지 마라.”
진 교수는 힘 빠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회장을 누가 불러 세웠다.
“회장님.”
“뭔가? 바쁜데?”
“회장님. S대 후배, 전현준입니다.”
“오호. 후배라니. 반갑구만그래. 뭔가?”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서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이상한 이야기? 누가 무슨 말을 했기에?”
현준이 자기 뒤에 있던 사람을 앞으로 내밀었다.
“제 후배. 한동신입니다.”
뜻하지 않은 사람의 등장에 회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동신. 미국으로 갔다고 하지 않았던가?”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회장이 험악한 인상으로 말했다.
“갔으면 거기서 살 일이지, 한국에는 뭐 뜯어먹을 게 있다고 기어들어 오나?”
현준은 동신에게 얼른 말을 하라고 부추겼다.
“네 말이 사실이면, 여기서 당당하게 말해라.”
머뭇거리는 동신을 앞질러 회장이 말했다.
“흥. 논문을 훔쳤네 마네, 하는 그것 말인가?”
동신 대신 현준이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아직도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하나?”
예전에 호되게 당했던지, 동신은 주눅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현준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들어도 헛소리 같지는 않아서 말이죠.”
“어허. 헛소문이래도…….”
어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내가 아는 한동신은 저런 인물이 아니었다.
‘저게 뭐야. 한동신, 저 사람은 적극적인 성격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라면 충분히 회장을 상대로 그의 비리를 알려줄 것으로 기대했었다.
내가 오늘 처음 본 한동신을 어떻게 아냐고?
2010년인가로 기억하는데, 세계적인 건축사사무소 ‘AECOM’의 대표이사가 그를 스카우트해가면서 이렇게 말했었거든.
‘한동신은 적극적이며 창의력이 뛰어나다. 흥미가 있으면 끝까지 파고드는 집요함도 있으므로, 누구보다 ‘AECOM’에 꼭 필요한 인재다.’라고.
내가 알던 그의 미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쯧쯧. 저런 성격이니, 자신의 수고를 빼앗기고도 할 말을 하지 못한 거였군.’
지금 이 자리에는 회장을 저격할 것이라 생각했던 몇 명의 인물들이 더 있었지만, 그들 또한 굉장히 소극적이었다.
‘휴. 이대로 두면 죽도 밥도 안 되겠네.’
현준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그만두세요. 선생님. 말하기 싫다는 사람, 자꾸 그렇게 앞세우실 필요 없습니다.”
“자네는 누군가?”
“아까 화면으로 보셨잖아요. U대 김성훈입니다.”
“아하. 반갑네. 그리고 아까 진 교수의 말에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네. S대의 사람들이 그처럼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라네.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깔끔한 인상만큼이나 사과도 깔끔했다.
“알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역시. 괜찮은 사람이네.’
내 말에 회장이 진 교수를 비웃었다.
“당연한 소리 아닌가? 그런 멍청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으니, 새파란 학생에게 수모나 당하지.”
‘처음에는 S대니 뭐니 하면서 진 교수를 그렇게 챙기더니, 쓸모가 없어지니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간신배 같으니라고.’
나도 모르게 진 교수를 동정했다.
“현준 군.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건가?”
“아뇨.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거죠.”
“뭔. 시시비비?”
‘또 나서야 하나? 갈수록 적을 만드는 느낌인데.’
하지만 적을 만들 때는 만들어야지, 어쩌겠는가?
한건협 회장.
그에게 희생당한 사람은, 내가 초대한 사람 말고도 더 많겠지.
무리 가운데 또 한 사람 얼굴을 아는 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도 소극적인 성격인 듯, 몇 발자국 뒤에서 차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후일 미국으로 건너가, 2020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시에서 완공예정인 세계 최고층 건물 ‘제다타워’의 설계에 참여한다. 그 역시 미국인의 신분이었다.
오죽했으면 국적을 버렸겠는가?
한건협 회장이라는 저 쓰레기 같은 인간 하나 때문에 유능한 인력들이 줄줄이 외국으로 빠져나간다.
도움은커녕, 없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터.
‘그런 적이라면 만들어도 이득이지.’
적의 적은 동지라고 했다.
오늘의 방청객 중에는 회장의 측근이 될 사람보다 적이 될 사람이 더 많았다.
무엇보다도 지금 상황을 방관하면, 인재 유출은 물론이요, 지속적인 피해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내가 제일 꼴 보기 싫어하는 게. 건축을 자기 영달의 목적으로 이용하는 거라고.’
지고지순한 사랑이 다른 놈에게 그 정도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면, 응당 분노가 생기지 않겠나?
‘화가 날 때는 질러야지, 쌓아두면 병 된다구.’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실은 제가 여러분을 초대했습니다.”
뜻밖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초대장에 제 이름 적혀 있지 않던가요?”
“아! 김성훈이 누군가 했더니, 자네였구만. 초대해 줘서 고맙네.”
“그리고 초대자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조사를 좀 했습니다. 3부에서는 프랭크와 질의응답을 하게 될 텐데, 그와 수준이 맞는 건축가들을 불러야 할 것 아닙니까?”
군중이 수군거렸다.
“일리 있는 말이야. 다만 난 좀 더 나이가 있는 사람인 줄 알았지. 이렇게 젊을 줄이야.”
이미 인맥 쌓기는 글렀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회장은 은근슬쩍 자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난날의 추한 과거를 들추고 싶지는 않겠지.’
하지만 내 계획의 하이라이트는 당신이라고.
걸어가는 회장을 불렀다.
“회장님. 가시는 건 상관없습니다만, 이 이야기가 어떻게 기사로 나가게 될지는 모릅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그가 홱 뒤돌아섰다.
“뭐야?”
그를 바라보며, 뻔뻔스럽게 말했다.
“그냥 그렇다고요. 저기 기자님들 오시네.”
처음 부를 때는 오지 않겠다던 기자들이, 프랭크와 인터뷰는 꿈도 꾸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더니, 선착순으로 줄을 섰었다.
물론 울산신문은 뺐다.
‘울산신문, 엿 먹어라!’
고작 이런 일로 신문사가 타격이야 받겠냐마는, 앞으로 있을 프랭크의 일정에도 그 신문사는 끝까지 제외할 것이다.
절대로 기삿거리를 안 줘야지. 시장도 한몫 거들 텐데, 누가 이길지 보자고.
‘신문사는 타격이 없어도, 편집장이라는 그 인간은 좀 타격을 입을걸.’
왜 그리 옹졸하냐고?
나 옹졸하다.
25살에게 뭘 그리 많은 걸 바라나?
회장이 분노한 얼굴로 일갈했다.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모르지만,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걸세.”
“전 언제나 책임질 말만 합니다. 회장님.”
건방진 내 말에 그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얼마나 잘 책임질지 두고 보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회장님께서는 1978년도에 S 대학을 졸업하시고, 건축사 개업을 하십니다. 그리고 15년 후 동 대학 대학원에 들어가시죠.”
“그래서?”
“1978년 졸업논문을 읽어 봤습니다.”
“그런데?”
“형편없더군요.”
“뭐야?”
“읽어 보시겠습니까?”
민수가 재빠르게 복사한 논문을 나눠줬다.
몇 페이지 안 되는 논문을 읽으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잠시 후 누가 내게 물었다.
“성훈 군. 난 같은 내용이 두 부네. 왜 이렇게 줬나?”
그에게 대답했다.
“뒤의 것은 그 당시 일본 건축잡지를 번역한 겁니다. 맨 뒤에 원본 있으니까, 일본어 아시는 분들은 확인하셔도 되고요.”
또다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완전 똑같은 내용인데?”
회장에게 말했다.
“일본어는 잘하셨나 봅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논문 내용은 기억나십니까?”
“기억날 리가 없지 않은가?”
“제목도 기억이 안 나시나 봅니다.”
“그건?”
그의 말에 코웃음이 나왔다.
“훗. 전혀 기억에 없으신가 보네요. 다른 분께도 물어보죠.”
뒤를 향해 물었다.
“선생님들. 대학 졸업하실 때 논문 내용 기억나십니까?”
“당연히 기억나지. 4년간의 학교생활을 총정리하는 건데, 난 아직도 어디서 데이터를 찾았는지까지 기억난다네.”
다시 회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렇게 말씀하시는데요? 4년간 등록금 때려 부어서, 그 졸업논문 하나 뽑아내는 데 말입니다. 기억 못 하면 아깝지 않습니까?”
나도 모르게 빈정거리고 있었다.
“흥. 벌써 20년이 지난 이야기야.”
당연히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 후. 1993년 동 대학원에서 논문을 내실 때는 상황이 정반대였죠. 그 당시로써는 꽤나 신선한 주제로 논문을 내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는 나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사용도 하지 않았던 ‘한계상태 설계법’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상당히 호평을 받았지요?”
“그런데?”
“내용이 기억나십니까? 이건 불과 7년밖에 안 되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회장님은 이걸로 석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회장이 으르렁거렸다.
“그걸 내게 묻는 이유가 뭔가?”
눈썹을 으쓱하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훗. 처음에는 공저자가 있었는데, 나중에는 회장님 이름만 달랑 올라있었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회장은 얼굴이 벌게진 상태로 고함을 질렀다.
“자네. 지금 하는 말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거 아나?”
“법적 소송을 걸어오시면, 충분히 대응해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고소한다는데, 뭐 이리 당당하냐고?
한국에서 돈으로 안 되는 게 얼마나 될까?
나 부자다.
나 개인을 위해서 사용할 생각은 없지만, 이런 경우라면 언제든지, 봉인을 풀 의향이 있거든.
옆에 주눅이 들어 서 있던 한동신이 내게 물었다.
“자네가 이렇게 내 편을 들어주는 이유가 뭔가?”
그는 그럴 만했다.
아까 말한 논문의 사라진 공저자가 그였으니까.
그에게는 정의의 사도로 보였으려나?
하지만 난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그냥 한건협 회장이 꼴도 보기 싫을 뿐이다.
“아깝잖아요.”
“뭐가?”
“선생님 재능이요.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저 사람 농간에 놀아난 것뿐인데, 오해를 받고 제대로 일도 못하시는 게 너무 아쉬워서요.”
말하는 사이에 민수는 부지런히 논문을 나눠주었다.
회장에게 웃음을 날리며 물었다.
“회장님. 그때 논문 여기 있습니다. 설명 좀 해 주십시오. 회장님. 전 학생이라서 그런 어려운 설계법을 잘 모릅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더라고요.”
“어허. 이 사람이 지금! 장난하는 건가?”
구조는 쉬운 학문이 아니다.
통달할 정도로 공부하지 않으면 실전에서는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
논문을 쓸 정도라면?
그건 통달했다는 거다. 적어도 그 주제에 관해서는.
‘자기가 쓰지도 않은 걸 설명할 수 있을까?’
“회장님. 저도 장난칠 기분 아닙니다.”
회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제가 기자들 불러놓고 장난칠 정도로 한가해 보이십니까?”
그리고 기자들에게 슬쩍 눈치를 줬다.
‘특종을 잡으려면, 제대로 바람 잡으세요.’
내 눈빛에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며, 마이크를 내밀었다.
“회장님. 설명 부탁드립니다.”
달려드는 기자들에 당황한 회장은 벽으로 밀려났다.
회장이 악에 받친 고함을 질렀다.
“다 고소할 거야. 그렇게들 알고 있어!”
하지만 그에게 쏟아지는 것은 경멸의 눈빛뿐이었다.
기자들을 밀치며, 그는 도망치듯 유치원을 벗어났다.
몇몇 기자가 회장을 따라갔지만, 대부분의 기자는 남아 있었다.
“기자님들. 판단은 직접 하십시오.”
동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한동신 선생님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동신이 논문을 들었다.
빼앗긴 논문을 돌려받은 기분일 거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붉어진 눈으로 논문을 쳐다본다.
그리고 눈물 맺힌 눈으로 웃었다.
“당연하죠. 이건 내 논문이니까요.”
동신의 설명이 이어진다.
일사천리라고 할까?
기자들에게 말했다.
“오늘 기사, 기대하겠습니다.”
기자들이 말했다.
“맡겨만 두라고.”
“7년 전 자료들 다 찾아서 끼워 넣으시는 거 아시죠? 잘못된 기사들은 정정 보도하시고.”
“그런 거라면 걱정 말아요. 성훈 씨. 신문사에 널린 게 자료들이니까.”
기자들의 얼굴에 웃음이 만연했다.
그들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고마워. 특종을 잡게 해 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