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71화
기둥은 꼭 있어야 하는가? (18)
촬영 준비를 위해 스텝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성훈이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프랭크, 이렇게까지 말하면 대부분 알아먹지 않아요? 이건 말이 안 통해요. 차라리 어린애하고 말하는 게 더 쉽겠어요. 그럼 가르칠 수나 있죠.”
성훈의 말을 인정하려고는 들지 않고, 계속 트집거리만 끄집어내는 진 교수에게 질린 모양이었다.
한숨 쉬는 성훈의 어깨를 프랭크가 쓰다듬었다.
“성훈, 이해 여부를 떠나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지.”
“그럴 정도로 진 교수가 멍청하다고요?”
프랭크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똑똑한 사람들이 더 그렇단다. 남들보다 자신이 낫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인정하는 기준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 자신만의 울타리에 스스로를 가둔 거야.”
‘뭐지? 이 현기 있어 보이는 말은?’
프랭크가 혀를 찼다.
“쯧쯧.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 나도 저 나이 때는 저랬지만 말이다.”
“엉? 프랭크가요?”
한없이 현명한, 현자처럼 보이는 프랭크에게도 그런 치기가 있었다니.
내 생각에 호응이나 하듯, 한 교수의 눈도 동그래져 있었다.
프랭크가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난들 그런 경우가 없었겠니? 어떤 사람에게나 부끄러운 과거는 있는 거야.”
“보통 그런 경우에는 말하려 들지 않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건 가리려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을 더 부끄럽게 만들거든. 그냥 인정하는 게 나아. 사람은 다 그런 거라고. 그때의 나는 미성숙한 인간이었다고. 인정을 해버리면 차라리 마음이 편해진단다.”
세상에 실수 없는 인간이 있을까? 인간이 완벽할 수 있을까?
“완벽하고자 하는 욕망은 흠이 될 부분을 가리려 하고, 가리다 보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프랭크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투명한 개인의 역사에 지나간 흔적이 새겨진다. 과거는 지울 수가 없으니, 과거다.
되돌아갈 수도 없다.
그는 왜 숨기는 것이 아니라, 가린다고 했을까?
투명한 흐름에 흰색을 칠한다고 투명해지던가?
그렇게 잡때가 묻어가는 것 아닐까?
“내가 그것을 깨닫는데, 수십 년이 걸렸다네. 잘못된 과거를 가리는 것이 중요한지,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한지.”
“인정이 그렇게 힘든가요? 프랭크? 상대를 인정하는 게 나를 낮추는 건 아니잖아요?”
인정은 인정일 뿐! 인정받은 자는 고마워하지, 자신을 인정하는 자를 눈 아래로 보지 않는다.
“그게 힘든 사람도 있는 법이야.”
그 말에 씁쓸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프랭크가 한 말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기에.
지난 삶에서의 나는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남을 인정한 적은 없었던 지극히 옹졸한 사람이었다.
“패배를 모르는 자들은 인정을 할 줄 모르는 경우가 많거든. 인정받는 것만 알았지. 인정하는 것은 영 서투르단 말이야.”
제삼자를 말하듯 말을 둘러댔지만, 프랭크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것이리라.
프랭크가 진단을 내렸다.
“진 교수는 감정적 난독증이야.”
“그 말은?”
“저건 진 교수의 잘못이 아니라, 병이라는 거지.”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건가요?”
프랭크가 허허 웃었다.
“그 뭐. 비슷해.”
PD의 방송 재개 소리가 들려왔다.
사회자가 옷매무새를 다듬고 말했다.
“그럼. 현장에 나가 계신 노교수님. 연결해 보겠습니다.”
노교수는 며칠 전 나와 함께 돌아보았던 옥상에서 논문과 비교하며, 구조를 간결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회자가 물었다.
“혹시 구조적 문제가 있습니까?”
“구조 계산에 문제가 없었고, 헌재 시공 상황도 문제가 없습니다.”
건너편의 진 교수와 회장이 소곤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워낙 작은 소리였기에 들리지는 않았다.
화를 내는 듯한 회장의 표정과 불쾌함과 배신감을 오가는 진 교수의 얼굴빛으로 보아, 결코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리라.
아마도 내가 조사한 회장의 성격상, 지금 이 방송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진 교수를 표적으로 하는 곳에 발을 잘못 내디딘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나는 명사초대석을 총 3부로 계획했다.
1부는 내가 가질 테니, 2, 3부는 알아서 하라고.
프랭크도 당연히 동의했고 말이다.
진 교수의 깨갱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지. 그에게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이용 대상일 뿐이니까.’
사회자가 진행을 이어나갔다.
“노교수님, 수고하셨습니다. 프랭크 교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 보고 싶군요.”
“워낙 노교수께서 설명을 잘해 주셔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들었습니다. 허허.”
물을 한 잔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아직 논문에는 흠잡을 곳이 많습니다. 이건 명백한 사실입니다’로 시작된 그의 말은, 논문에 대한 칭찬 30과 비판 70의 비율로 진행되었다.
해박한 지식에서 나오는 깊이 있는 비판에는 즉답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한 교수는 어떻게 생각할까?’
문득 생각이 들어 옆을 바라보니, 그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받아 적기 바쁜 모습이었다.
“하지만 형식이 아니라, 내용만을 놓고 불 때는 한 교수 팀은 멋지게 잘해냈습니다.”
프랭크의 논문평이 끝나자, 사회자가 물었다.
“진 교수님,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진 교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무언의 대답을 들은 사회자가 다시 물었다.
“한 교수님은 프랭크 교수님의 제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너무 박한 점수를 주신 것은 아닌지요?”
“아끼는 제자에게는 칭찬을 아끼라 했습니다. 사실, 한승원 교수가 처음 한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 전도유망한 제자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의 결정은 올바른 결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든 학문은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건축 또한 별다를 바가 없지요. 아직 서툰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새로운 주제를 지겹지 않도록 흥미롭게 다룬 부분은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뭔가 더 할 말이 남아 있는 듯한 눈치였지만, 그는 그것으로 말을 맺었다.
사회자가 말했다.
“이제 논문에 대한 논란은 여기서 종지부를 찍어도 될 것 같습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 분, 계십니까?”
성훈이 손을 들었다.
“네, 말씀하시지요.”
“진 교수님께서는 사설 마지막에 쓰신 말씀 기억나십니까?”
“뭐지? 뭔데 그러나?”
이제 논문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기 싫은지, 진 교수는 진절머리가 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겠지.
‘하지만 끝맺음을 어설프게 해서 일을 이렇게 키웠다고.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한 교수에게 묻고 싶다. 진정 당신에게 교육자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말이다’라고요.”
진 교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본다.
‘왜 갑자기 그걸 들춰. 논문 문제는 다 끝난 거 아니냐?’는 표정이었다.
‘그러게. 누가 함부로 말을 뱉으랬어?’
말이란 세상이라는 거울에 쏘는 화살과 같아서, 정확히 명중하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되돌아온다.
허공에 흩어지는 말이 그러할진대, 글은 오죽하랴!
진 교수의 눈이 꿈틀거렸다.
‘이미 사과까지 한 마당에……. 자리까지 내놓으라는 것인가?’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모면해야 했다.
“내가 그랬나?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군.”
성훈이 옆에 놓은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읽어드리겠습니다.”
‘저건 또 언제 준비했어?’
기가 차는 진 교수였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정확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큭, 그랬었군. 내 사과하지.”
그리 말하는 진 교수의 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미안함이 아니라, 짜증과 증오였다.
‘나를 얼마나 더 수치스럽게 할 셈인가? 이제 그만하지?’ 하는 느낌.
그의 사과를 들은 성훈이 담담하게 말했다.
“진 교수님께 여쭤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더 뭘 묻겠다는 건가?”
“교수님은 진정 스승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흥. 김성훈 학생! 지금 이 자리에서 교수의 자격을 논하자는 건가?”
성훈이 ‘안 될 거 뭐 있냐?’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린다.
“교수 채용 여부는 학교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자네가 관여할 일이 아닐세!”
꿈쩍도 하지 않고, 그의 대답만을 요구하는 성훈이 괘씸해 보였다.
진 교수가 호통 쳤다.
“자고로 옛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디서 감히 제자가 스승의 자격을 운운하는가? 제자가 스승을 평가하겠다는 건가?”
평가 좀 하면 어때서!
일방적으로 지식을 공급하던 시대를 지나, 학생과 교수가 지식을 공유하며 연구하는 시대가 온다. 그것을 조금 더 앞당길 뿐이다.
진정한 가르침이란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닐까?
책은 남지만 말은 사라지고, 순간의 깨달음은 찰나를 스쳐 지나간다.
책으로 배울 수 있고, 인강으로 배울 수 있는데, 굳이 교수가 왜 필요한가?
글로 전하고 말로 전할 수 있는 거였다면, 귄터가 그토록 슬퍼했을까?
성훈은 ‘당신이 진정으로 학생, 아니 제자들에게 깨우침을 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질문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껍데기만 가지고 화를 내고 있었다.
“진 교수님께서는 ‘S대 말고는 우리나라를 선도할 수 있는 곳이 없다’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생사람 잡지 말게나.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네!”
옆에서 회장이 넌지시 물었다.
“진짜로 말한 적 없나?”
진 교수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선배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생각이야 그렇게 하더라도, 실제로 그렇게 말할 리가 없잖습니까? 제가 돌았습니까?”
그 말에 회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있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다가는 사회적으로 매장 당한다.
성훈이 재차 물었다.
“일부러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어허,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니까. 지금 자네는 일부러 나를 곤경으로 몰아붙이는 것인가?”
그와 함께 회장도 성훈에게 경고했다.
“없는 사실로 진 교수를 핍박하면, 이 내가 참지 못해.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다고.”
그는 협박과 함께 말을 이었다.
“생각을 해보게. 그게 과연 기본적인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말인지를?”
진 교수가 저렇게 펄쩍 뛰는 것으로 봐서는 정말 기억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회장님, 그런 말은 하는 사람은 교양이 없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심히 불쾌하군. 이미 방송을 탔으니, 그에 대한 법적 처벌을 걱정해야 할 걸세.”
이미 그는 나를 처벌하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의도적으로 한 말이 아니란 말이야?’
그게 더 무섭다.
그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서, 뼛속까지 그 생각이 박혀 있다는 말이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내가 교수야. 교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나?”
성훈이 진 교수를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왜?”
짜증을 내는 진 교수에게 성훈은 대답 대신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몇 주 전, 진 교수와 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허, 그 말씀 똑같이 H대에 가서도 하실 수 있습니까?
-허 참, 거기서 H대가 왜 나와? 감히 쨉이나 돼?
순간 노교수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회장도 상당히 당황한 듯했다.
생각은 백만 번을 할지언정, 절대로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말이 아니던가?
그러거나 말거나 녹음기는 돌아간다.
진 교수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래 봐야 대한민국의 중요한 자리는 S대가 꽉 쥐고 있다네. 명심해.
-그럼 S대가 머리라는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S대 말고 다른 곳은 손발입니까?
-그렇지.
녹음기를 멈추고 진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더 들을까요?”
진 교수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하지.”
성훈은 회장에게도 물었다.
“고소하실 겁니까? 무고죄로, 명예훼손으로?”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녹음기를 놓고 진 교수에게 물었다.
“다시 한 번 여쭤 보고 싶습니다.”
진 교수가 맥없는 말했다.
“또 물어볼 것이 뭔가?”
“교수님께서 진정 제자들을 가르칠 가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명예훼손으로 고발을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우리 대학에서 발붙이기는 어려울 거다.
다른 대학?
이런 인물을 쓰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믿기 힘들지만, 만약 진 교수에게 배우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의 미래에 명복을 빌 뿐이다.
그들의 미래는 이미 죽고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