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69화
기둥은 꼭 있어야 하는가? (16)
주차장 옆에 크게 프린트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기획 특집 - 명사 초대석. 총 3부 제작.>
출연 : 프랭크 베리.(프리츠커 수상자)
1부 ? 명사와 명사의 만남.
2부 ? 울산의 미래를 말하다.
3부 ? 한국 건축가들과의 대화
-전국적 생방송 예정-
주차장에는 방송사에서 나온 차들과 사람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햐, 진 교수. 사람이 많이들 왔구만.”
“공중파에서 특집으로 기획을 했다고 했으니, 사람들이 몰릴 만합니다.”
“그랬지. 자네 때문에 내가 덕을 많이 보는구만.”
방송 현장에 도착한 진 교수와 그의 선배, 한건협 회장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건 뭐지? 벽도 하나 없고, 강당만 덜렁 있네.”
“그러게 말입니다.”
강당 저쪽 끝에는 무대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카메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야, 조명! 제대로 안 들어?”
“음향? 자꾸 흔들린다.”
PD의 호통치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진 교수도 이곳은 처음인지라 두리번거리다가 초대자들을 위한 좌석을 발견했다.
“선배님, 이쪽입니다.”
뒤를 돌아보니, 한건협회장 이시후도 건물을 둘러보고 있었다.
“오, 꽤나 넓은데?”
“그렇군요. 방송국에서 특별히 섭외한 곳이라고 하던데. 깨끗하고 넓습니다. 헤헤.”
“기둥도 하나 안 보이는데, 잘 만들었네.”
“트러스를 이용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이런 장 스팬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트러스겠지. 천정 마감에 가린 모양이구만. 우리나라도 많이 발전했어.”
성훈이 건물을 바쁘게 뛰어다는 모습이 보였다.
‘멍청한 놈, 그렇게 뻗대더니, 겨우 한다는 게 방송국 시다바리냐? 큭큭.’
자신의 얼굴을 보고 그냥 지나치려고 하길래, 진 교수가 성훈을 불러 세웠다.
“어이, 성훈 군. 교수를 보고 인사도 안 하나?”
부르는데 차마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던지, 인사를 한다.
“진 교수님, 오셨어요?”
‘이것 봐라. 대충 고개만 까딱이고 가려고 하네? 버르장머리 없는 놈!’
불러 세운 목적이 있는데, 그냥 보낼 수 있나?
“여기 이분은 한건협의 회장님이시라네, 내 S대 동문 선배님이시지.”
“한건협이라뇨?”
“쯧쯧! 한건협을 모르다니. 한국 건축인 협회인데, 건축인이 되어가지고 그것도 모르나?”
성훈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글쎄요. 건축가 협회나 건축사 협회는 들어봤습니다만, 건축인은 아직. 저는 급해서 이만.”
대충 대답을 하더니, 성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야, 야!”
진 교수의 눈 밑이 꿈틀거렸다.
‘건방진 놈! 감히 나를 선배 앞에서 무안을 줘?’
아차! 내 기분이 이럴진대, 눈앞에서 무시를 당한 선배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던 것 같다.
뒤돌아보니 회장의 눈에는 황당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재빨리 회장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지방이 돼놔서 무식한 놈이 많습니다.”
“흥. 촌놈들이 뭘 알겠어. 저런 멍청이들을 가르치느라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만.”
“내, 저놈을 반드시.”
회장이 진 교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참게나.”
저번에 말한 S대의 교수 자리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의 위로에 진 교수는 터져 나오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지. 이 정도면.’
잠시 후, 성훈이 다시 나타났다.
“저기, 진 교수님.”
“왜!”
“혹시 아까 그분이 한건협 회장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런데 왜?”
아까의 분노가 있으니, 좋은 말이 나갈 리가 없었다.
‘이제 와서 높은 사람 같으니, 비벼보려는 거냐? 감히 너 따위가 어디서?’
“혹시 방송에 출연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요.”
아쉬운 게 있으니, 이렇게 고개를 숙인 거겠지!
‘내 이번에는 버르장머리를 고쳐주지.’
“뭐? 일 없어.”
성훈이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교수님. 아직도 그 일로 꽁해 계시는 겁니까?”
“내가 고작 그런 걸로 이럴 것 같아?”
방방 뛰는 진 교수를 보며 성훈이 피식 웃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며칠 전, 진 교수가 초대권 티켓을 구하려고 성훈에게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흥분을 하느냐고?
당연히 너 줄 건 없다고 했지!
좋게 부탁을 하면 될 걸, 머리 뻣뻣하게 들고는 맡겨 놓은 물건 달라는 투로 말을 하더라고!
‘그래서?’
당신 인맥 좋으니, 알아서 구해보라고 했지.
한국 사회에서는 인맥이 전부 아니냐?는 비웃음을 날리면서.
무슨 수를 데리고 온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진 교수는 그것 때문에 성훈에게 꽁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원래 성격이 옹졸하던지.
성훈이 말했다.
“그럼 됐어요. PD님이 그러는데, 한국 건축사 협회 회장이 갑자기 약속이 생겨서 못 올 것 같대요. 그래서 대타를 구해 보라고 해서 왔던 건데. 안 하신다는 거죠? 어쩔 수 없네. 뭐.”
대수롭지 않게 뒤돌아서는 성훈의 반응에 진 교수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한 번 튕긴 걸 가지고. 이렇게 쉽게 포기를 해?’
괘씸했지만 선배에게 잘 보일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선배가 방송을 타면 절대로 내 공을 잊지 않겠지. S대 교수가 대수랴? 이건 기회라고 기회!’
진 교수는 잽싸게 성훈의 소매를 잡았다.
“어허, 그건 내 의견이고. 선배님께도 여쭤 봐야 하지 않겠나?”
“에이, 귀찮게……. 그럼 찾아보시고 5분 내로 저한테 말씀하세요. 그 때까지 안 오시면 안 하시는 걸로 알게요.”
진 교수는 회장을 찾으러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보며 성훈이 미소 지었다.
‘이제 배우들도 다 준비가 되었군.’
***
사회자는 자연스럽게 한 교수의 논문과 사설로 주제를 돌렸다.
“U대에는 모두 초대권을 돌렸다고 하시던데, 혹시 와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아. 저기 계시군요. 모셔 보겠습니다.”
좌중을 둘러보며 진 교수를 호출했다.
한 교수는 프랭크의 통역 겸 토론자로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회장이 진 교수를 맞이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 동문 후배입니다. 하하하.”
“아하? 그럼 두 분 다 S대 이시군요.”
진행 메모지를 보던 사회자가 말했다.
“그럼 한국 대표 S대와 미국 대표 예일대가 모두 참석하신 거네요. 기분이 묘하군요.”
토론자로 참가한 노교수가 그 발언을 정정시켰다.
“사회자 양반, 그렇게 편 가르는 발언은 좋지 않소. 논지는 그게 아닌 것으로 알고 있소만.”
사회자는 노련하게 말을 바꾸며 사과했다.
“아! 분위기가 딱딱한 것 같아 농담을 해봤습니다만, 실수를 한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그 순간, 회장과 진 교수의 눈이 마주쳤다.
‘이건 기회입니다. S대가 예일대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줄…….’
‘실수하면 가만히 안 있을 줄 알아!’
둘이 마주보며 눈을 반짝였다.
화장실을 다녀왔다.
“오, 성훈 군. 어딜 다녀오는 겐가?”
시장이었다.
“아, 다음 차례에 시장님이 출연하시죠?”
“그래,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네? 왜요?”
“저것 보게나.”
시장이 토론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뭐지? 왜 저렇게 된 거지?”
화장실 갈 때만 해도 내 시나리오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프랭크의 통역 겸 제자로 한 교수가 출연했고, 자연스럽게 논문으로 주제를 옮겼었다.
논문에 대한 주도권을 한 교수가 잡고 있음을 보고, 안심하며 화장실을 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오는 것은 온통 프랭크의 과거 이야기뿐이잖아.’
그것도 과거 프랭크가 휘말린 건축자금에 대한 문제 말이다.
시장이 혀를 찼다.
“말렸구만. 말렸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청문회 안 봤나?”
그는 청문회 때, 공무원을 어떻게 추궁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다.
정작 물어야 할 것은 묻지도 않고, 그의 도덕적 잘못으로만 사람을 물어뜯는 것 말이다.
프랭크는 과거 미국에서 건축 일을 하면서 건축비 횡령비리에 얽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은 그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이미 판명이 났었는데요? 그리고 그게 지금의 논문과 무슨 상관이 있죠?”
“저 한건협회장이라는 인간이 상황이 불리해질 것 같으니까, 그 문제를 거론했네. 미국에서는 이미 밝혀졌을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아니질 않나.”
이러면 프랭크를 불러온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의 명성에 피해만 끼치게 될 것이다.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그거지? 더럽고 치사하게?’
시장이 씁쓸해하며 말했다.
“얼른 상황을 정리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어질 거야. 학계는 정치판과 다를 줄 알았더니. 쯧쯧.”
건축에 관련된 사람들은 그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알지만, 일반 시청자들은 그 이야기를 전혀 모를 것이다.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프랭크를 비리 건축가로 기억하게 될 것이고 쓰레기 가십난에 프랭크의 이름이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시장에게도 이 일은 타격이겠지.
매스컴을 타려고 유명인과의 만남을 추진했다. 울산시의 이름까지 넣어가면서 말이다.
그는 상황이 아주 안 좋은 경우에는 아프다는 핑계로 참석을 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시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없다는 것은 동일한 사실이었다.
“한건협 회장이 정치질을 한다더니, 저런 것만 배운 모양이네요.”
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당하고 있으라고?
‘절대 그럴 수 없지.’
“시장님, 아는 기자들 있으시죠?”
“그럼 있지.”
“그럼 프랭크에 관한 미국 기사들 좀 모아달라고 하세요. 저는 저대로 알아볼게요.”
그리고 만만한 알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프랭크가 곤경에 처했다고?
내가 전한 내용에 알리는 분노했다.
알리는 프랭크에게 수백만 달러를 투자한 투자자였다.
내가 부탁했던 500만 달러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 프랭크를 건드리는 것은 알리에게는 도전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누구야? 어떤 놈이야?
“흥분하지 말고, 내가 찾아달라는 내용이나 바로 정리해서 보내주세요. 5분밖에 시간이 없어요.”
-알았어. 하지만 어떤 놈인지는 꼭 말해줘야 해. 알았지? 성훈?
“네, 알았어요.”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알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메일로 보내놨으니까, 확인해 봐.
“대단히 빠른데요?”
알리가 말했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메일을 다운받아 PD에게 달려갔다.
“PD님, 잠시 휴식 시간 가지시죠.”
“그래, 그게 좋겠어. 상황이 안 좋아.”
“PD님, 이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프랭크에 대한 지난 기사들이에요.”
내가 내민 문서를 받아 든 PD가 탄성을 내질렀다.
“이거 자네가 쓴 건가? 당장 기자해도 되겠는데?”
그럴 수밖에. 내가 봐도 깔끔하게 정리가 잘되어 있었으니까.
이런 사람을 손가락 하나로 부릴 수 있는 알리가 진심으로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지금 감탄이나 할 시간 없어요. 광고 끝나자마자, 이것부터 내보내세요. 알았죠?”
“응. 알았어. 진행자한테도 말해두지.”
그리고 스텝들에게 명령했다.
“잠시 쉬자고, 광고 영상 넣어. 얼른!”
그리고 나를 붙들며 말했다.
“어딜 가? 이거 어떻게 내보낼지 의논해야지.”
***
“역시 선배님이십니다.”
진 교수는 회장에게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 교수가 사설에 대한 허점을 찌르고 들어올 때는 얼마나 오금이 저렸던가?
그걸 자신의 선배는 한 방으로 역전을 시켰다.
대화의 주제 자체를 논문에서 프랭크로 바꾸면서 말이다.
그때, 한 교수가 당황하는 꼴이란.
“선배님, 물 한 잔 떠오겠습니다.”
“허허허. 그러게나. 오늘은 내가 확실히 청취자들에게 눈도장을 찍는 날이 되겠어.”
물을 가지러 내려오는데, 성훈이 보였다.
“흐흐, 얄미운 놈.”
진 교수가 성훈에게 다가갔다.
“성훈 군, 잘 봤나?”
“뭘요?”
“우리 S대 선배님께서 토론을 어떻게 진행하는지 봤냐는 말이지.”
그는 기고만장한 눈으로 성훈을 노려봤다.
“언제 토론을 하셨는데요? 제 눈에는 근거 없는 비방밖에 안 보이던데요?”
건축 이야기를 하는데, 그 외적인 비방으로 사람을 추잡하게 만들다니. 더럽고 치사하다.
“하지만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 흐흐.”
진 교수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 교수 쫓겨나는 건 시간문제니까, 자네도 다른 세미나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뭐 하면 내 밑으로 오는 것도 좋고.”
그의 말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실력은 쥐꼬리만큼도 없는 주제에.”
“뭐야?”
“들으셨어요? 그냥 혼자 한 말이었는데, 그죠. PD님?”
저 말은 명백한 놀림이었다.
‘혼잣말인데, 남한테 왜 물어?’
그렇다고 실력이 없다는 말을 가지고 따질 수도 없지 않은가?
‘흥. 너도 한 교수와 같이 엮어서 청소를 해주지.’
진 교수가 물었다.
“성훈이. 너도 그 논문 같이 썼지?”
“네, 그런데요?”
비릿하게 웃으며 진 교수가 돌아섰다.
“그럼 벗어날 수 없지. 저 자리에 부를 테니, 각오나 하고 있어. 자신 없으면 도망가도 뭐라고 하지는 않겠네. 하하하!”
PD가 물었다.
“저 사람 뭐냐? 성훈아.”
“우리 학교 교수요?”
“아! 네가 말한 씹어 먹겠다는 인간이 저 사람이냐?”
“네!”
저 인간을 잡으려고 방송국과 딜을 걸었다.
프랭크를 독점하는 대신, 내 말대로 진행해 달라고.
지금 눈앞의 PD는 내 하수인이었다.
그가 어이없다며 웃었다.
“나도 성훈이 너한테 빌빌 기고 있구만. 뭐가 저리 당당해? 내가 봐도 실력은 쥐꼬리 더만.”
“불러준다는데, 감사하죠. PD님, 제가 드린 파일 확실히 자막으로 올리세요. 다시는 프랭크 지난 일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게요.”
PD가 알았다며 등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