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63화
기둥은 꼭 있어야 하는가? (10)
진 교수 방을 나와 걸어오는 내내 생각했다.
‘어떻게 저걸 족쳐야 속이 시원할까?’
물론 감정적인 대응이 없잖아 있었다. 어른스럽지 못한 대화였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뭐 어때. 내가 성인군자라도 되나? 빡치게 만들잖아!’
우리 사무실로 들어가니 한 교수가 물었다.
“뭐라고 하디?”
“쩝, 말이 안 통해요.”
“그렇지. 그렇게 말이 통할 정도면 그런 짓도 안 했겠지.”
한 교수가 말을 이었다.
“다음 주 정도에 스승님 오신단다. 별다른 일 없으면 사흘 정도 머무실 예정이고.”
“우리 논문 이야기 했어요?”
“아니. 안 그래도 바쁘신 분이야. 굳이 내 일로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는 않구나. 그냥 이번에는 쉬시다 가시게 하자.”
씁쓸해하는 그를 위로했다.
“우리도 언론 플레이 한번 해보자고요. 그쪽에서 그렇게 나오는데, 못할 건 또 뭐 있어요?”
“이럴 때는 내가 미국인이라는 게 많이 불편하네. 한국에는 내 인맥이 별로 없어.”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도산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장님, 울산에 아는 분들 많죠?”
-당연하지. 말만 해. 뭐가 필요한데? 누구 부를까? 울산은 내가 꽉 쥐고 있어. 알지?
소장은 기분이 좋은지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아직 신문은 못 본 모양이네.
봤다면 사설에 나오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았을 것이고, 목소리가 밝지 않았을 텐데.
소장의 쾌활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 지금. 시장 만나고 오는 길이야. 허허허. 이번 연말 공사는 걱정을 하지 말라시던데?
“신문사 아는 곳 좀 있으면 알아봐 주세요.”
“왜?”
“그리고 오늘자 울산신문 사설도 한번 읽어 보시고요.”
“왜?”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일단 읽어보라고 하고는 통화를 마쳤다.
잠시 후, 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으음, 심각한데.
“왜요?”
-신문사에 알아봤는데, 이 양반들 강성이야.
“강성이라뇨?”
-음, 신문사들끼리 뒤 봐주기라고 해야 되나? 일종의 담합이지.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요?”
-응. 좀 어려워. 무리를 하면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 역시도 쉽지는 않을 거야.
“어쩐다. 서울 신문사에 알아 봐야 하나?”
-일단 나도 알아볼 테니, 성훈이 너도 한번 알아봐라.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내가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 교수가 완전히 틀렸을까? 내 감정적인 대응이 과도한 것은 아닌가?’
전화벨 소리가 내 상념을 끊었다.
띠리링.
H대 노교수였다.
-성훈 군. 날세.
“잘 지내셨어요?”
-그럼 덕분에. 그런데 한 교수 있나?
“아뇨. 수업 들어가셨는데요? 오시면 전화드리라고 할까요?”
-아니, 뭐. 자네한테 물어봐도 되겠구만.
“뭔데요? 말씀하세요.”
-자네들 논문을 봤네.
반은 내 말이 들어갔으니, 그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어떠셨어요?”
-재미있더군.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기도 했고.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요.”
-제목에 사기를 쳤던데?
“네? 사기라뇨?”
-제목만 보고, 기둥이 없는 건축이 있을 수가 있나? 하고 봤더니 말이야. 허허허.
“사람들의 이목을 좀 모으려고요.”
-잘했어! 제목에 임팩트가 없으면, 누가 그걸 보나? 맨날 논문 제목이 ‘00에 대한 연구’라고 나와서야, 궁금하지가 않은 법이거든.
그러더니 목소리를 깔고는 물었다.
-그런데 논문에 나와 있는 자료들, 실제 데이터인거지?”
“네, 그렇습니다만.”
논문에 실린 예제나 자료들은 유치원 설계를 하면서 생생한 검증을 거친 것들이었다.
수화기 멀리서 노교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거봐, 이놈들아.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
“네?”
-아냐? 내 제자 놈들이랑 같이 있거든.
“아.”
-하여간 내 그럴 줄 알았어. 어디에 있는 건데?
“울산입니다. 아직 완공되지는 않았어요. 어제 골조 올리는 거 보고 왔습니다.”
-그래? 한번 가봐도 되겠지?
“그럼요. 교수님이시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죠.”
-알겠네. 일주일 내로 한번 내려가도록 하지.
나는 학계에서의 이런 반응을 기대했었다.
‘진 교수가 이상한 거야? 아님 노 교수님이 이상하신 거야?’
사실 울산에만 있으니, 다른 곳의 반응을 알 수 없었다. 프랭크는 좋다고 했지만 그조차도 일부분의 반응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물었다.
“서울 쪽의 반응은 어때요?”
-응? 무슨 반응?
아직 울산에서의 여파가 서울까지는 미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진 교수의 인맥이 서울까지 미치지 않았든지.
‘애초에 그렇게 크게 이슈화시킬 문제는 아니지.’
-흐음, 글쎄. 나는 재밌게 봤는데, 반응까지는 모르겠네. 왜 그러나? 문제라도 있나?
“우리 쪽에서는 난리가 났거든요.”
-무슨 난리.
‘난리라고까지 부르기는 오버인가?’
하여간 우리에게 있었던 에피소드를 말해주었다.
-진 교수가 그렇게 나왔다고? 거참 밉상 같은 놈일세. 우째, 찌꺼기 같은 놈들이…….
나지막한 노교수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진 교수 인맥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건 또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막상 부딪혀 보니까, 쉽지 않더라고요. 신문사에 해명하는 글을 다는 것도요. 그 편집장이 강성이라서 울산 쪽을 꽉 쥐고 있더라고요.”
울산 신문과 있었던 일을 말하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진짜로 난놈들은 그렇게 안 해. 실력으로 들이받지.
“제 말이요.”
생각할 때마다 울컥하니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정당하지 못하게 엉뚱한 인맥으로 들이밀 수는 없지 않던가?’
한 대 맞았다고, 엄마 불러오는 거랑 뭐가 다른가? 상대가 꼼수를 쓴다고 나도 똑같이 상대해서는 동격(同格)이라고 증명하는 꼴밖에 안 된다.
-그런 짓을 할 놈들이라면 그놈들밖에 없는데.
“알고 계세요? 무슨 조직인가요?”
-그깟 놈들이, 조직은 무슨 조직? 찌꺼기 같은 놈들 모아놓은 곳인데, S대에서도 골칫거리인 녀석들이야.
“교수님이 좀 도와주시죠?”
-뭔데 말만해. 건축으로 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도와주지.
“진 교수 때려눕히는 거요.”
-에잉, 그건 싫다. 이놈아. 내가 이 나이에 그놈들하고 똥물 튀겨가며 싸우리?
“농담이었어요. 제가 설마.”
-답답한 마음 모르는 거 아니지만, 세상에 이런 말도 있지 않나?
“뭔데요?”
솔깃해서 귀를 바짝 세웠다.
노교수가 근엄하게 말했다.
-정의는 이긴다네.
‘크, 젠장!’
안타깝게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무조건 이기라는 말이 아니던가? 내가 정의라고 주장하려면 말이다.
사실 노교수가 말은 저렇게 해도, 건축계에서 영향력이 꽤나 있는 인물이었다.
슬쩍 지나가다가 들었던 거지만 방학 때 스타타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런 말을 들었었다.
‘H대의 노교수님이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서 괜찮은 물건이 나왔다고 잡으라고 했다더군.’
그게 바로 우리 설계안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노교수님은 현재 사장에게까지 말발이 먹힐 수 있는 자리에 있는 분이었다.
‘그런 사람이 진 교수 패거리들과 연관되기 싫다는 건 그들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귀찮게 한다는 말이겠지.’
간단히 말하면 건드리기 싫다는 말이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진흙탕 싸움이 될 테니까.
-진 교수, 그놈 하나라면 박살을 내놓겠지만, 그놈들 모이면……. 네 녀석이 알아서 처리해.
“도움도 안 주실 거면서. 쳇.”
-쳇은. 이 정도 말해주는 것도 어딘데. 어설프게 건드리면 지분거리는 놈들이니까, 확실하게 싹을 자르란 말이야. 알았어?
“네, 그럼 정면승부밖에 없겠네요.”
-그렇지. 그럼 수고해라.
어쩌냐?
건축으로 안 밟으면, 계속 이런 식으로 건축 외적인 압박을 받는다는 말인데.
‘물론 그때도 대응할 방법은 있겠지. 귀찮다고, 한 방에 끝내고 싶다고!’
밝은 무대로 진 교수를 끌어내야 한다는 말인데, 그래야 정면승부를 할 것 아닌가?
‘뭔가 이벤트가 있어야, 무대를 만들 거고, 그 무대에 선수를 세울 것 아냐?’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이벤트. 이벤트. 이벤트. 끄아아!’
“형, 뭐 하세요?”
민수가 수업에서 돌아왔다.
“보면 모르냐? 생각한다. 또 어디 가냐?”
“바로 수업이에요. 참, 프랭크 스승님이 언제 오신다고 했죠?”
“일주일인가 있다가 온다고 했지.”
“그럼 뭔가 환영 이벤트라도 준비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나름 유명하신 분인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 이벤트! 준비해야지. 하하하하.”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민수가 미친 놈 보듯 나를 피하더니, 수업 간다며 사라졌다.
“프랭크.”
-성훈, 웬일이야?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생각해 보니 그가 먼저 전화를 한 적은 있었어도, 내가 먼저 전화를 한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랴. 답답한 사람이 전화를 해야지.
프랭크를 내 목적에 이용한다는 것은 찜찜했지만, 지금은 찬물 더운물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프랭크는 이해해 줄 거야.’
나중에 진지하게 사과하면 되는 거지.
일단은 프랭크에게 잘 보여야 했다.
안부를 물었다.
“하하, 일본에는 잘 도착하셨나 해서요?”
-그럼. 여기는 사쿠라 꽃이 만발했네. 그려.
“헤, 한국도 만만치 않게 화려하게 피었어요. 제가 가이드해 드릴게요. 어서 오세요.”
-흠…….
프랭크가 잠시 말을 멈췄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안 되는데!
-성훈, 미안하게 되었어.
“왜요? 못 오시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됐어. 투자자에게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이 일정이 끝나는 대로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한국 관광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지. 약속을 했는데, 미안하군.
그렇게 속 편하게 미룰 일이 아니라고요.
‘투자자? 돈 대는 사람?’
다급하게 물었다.
“꼭 그 사람이 투자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액수가 커서 지금 잘 붙잡지 않으면 안 돼. 중요한 고객이야.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대단한 고객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당장 그가 필요했다.
“얼마를 투자하는 고객인데요?”
-왜? 대주려고? 허허허.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게나.
제가 프랭크를 왜 신경 씁니까?
내가 똥줄이 타서 그러는 거지.
진짜로 속이 바짝 바짝 타는 느낌이었다.
프랭크가 말했다.
-그럼 승원에게 안부 좀 전해주고, 다음에 또.
“잠깐만요, 프랭크!”
-응. 왜? 나 지금 차 타러 가야 하는데.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프랭크의 기다리라는 소리도 들렸다.
-바쁘니까, 빨리 말해봐.
“그 돈 제가 방법을 찾아볼게요.”
-무슨 농담을. 얼만지나 알고?
“얼만데요?”
-500만 달러야. 500만.
“그거 있으면, 당장 미국 안 가도 되는 거죠?”
아, 이거 너무 다급하게 보이는 거 아니야?
그럼 어때. 지금 당장 불러들이는 게 급한데.
다급하게 내 사정만 얘기를 하다 보니, 프랭크가 듣기에는 장난치는 걸로 보였던 모양이다.
-자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농담할거면 끊겠네.
자린고비라면 자린고비인 내가 내 돈을 쓸 리가 없잖아요. 이 영감님아!
“제가 댄다고 했습니까? 방법을 찾는다고 했지.”
-그럼 방법을 찾으면 연락하게.
프랭크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불쾌함이 느껴졌다.
“프랭크.”
-왜?
“알리 어때요?”
-엥? 알리 왕자? 그 사람이 왜?
“네, 그 사람이 투자하면 어떠냐고요.”
내 말이 터무니없게 들렸던지, 내게 호통을 쳤다.
-에이, 이 친구야. 그게 어떻게 가능해? 한두 푼이야?
“가능하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허허, 이 친구 보게나?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닐세.
“되면 제 부탁 들어주는 겁니다.”
-알겠네.
“금방 다시 전화할게요.”
다시 전화를 걸었다.
“프랭크.”
금방 전화가 와서인지 실망한 목소리였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던가? 5분에 500만 불이라니!
-거 봐. 이 사람아. 아무리 자네가 알리 왕자랑 친하다고 해도 안 되는…….
“계좌 확인하세요.”
잠시 후, 프랭크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억!
난 저 비명의 이유를 알지!
3분 전, 알리가 소리쳤었거든.
‘뭐야? 성훈! 고작 500만 불 땜에 전화한 거야? 그 노인네 계좌번호 불러. 당장 쏠 테니까!’
프랭크가 말했다.
-어떻게……. 5분도 안 돼서…….
‘그럼 그렇지. 알리가 돈 가지고 약속을 어길 리가 없지.’
“부탁 들어주시는 거죠?”
-이 친구야! 노인네 심장마비 걸리게 할 일이 있는가! 뭐든지 말하게. 500만 불을 받아놓고, 부탁을 거절하면 사내가 아니지.
프랭크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한국에서의 일정을 좀 길게 늘려주세요.”
-왜? 관광할 곳이 그렇게 많아? 그 작은 나라에? 허허허.
‘큭. 문제가 해결되니, 바로 농담을 하는데?’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말해주었다.
-거참. 희한한 나라일세. 그 조그마한 동네에서 뭘 그리 치고받고 싸우나 그래?
“프랭크 스케줄은 제가 짤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아셨죠?”
-그러게나. 나야, 물주가 하라면 해야지. 허허.
“휴.”
이제 프랭크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어졌다.
왜냐고?
이건 정당한 거래니까.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유치원 원장님, 전화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
-뭐 하게?
“판 짜게요.”
-뭐? 판? 무슨 판?
“그냥 불러요.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프랭크가 오기 전에 이벤트 준비를 끝내야 했다.
‘한국에 인맥이 없으니, 가만히 닥치고 있으라고? 흥. 지금부터 만들면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