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61화
기둥은 꼭 있어야 하는가? (08)
소장이 우리 설계안의 브리핑을 끝냈다.
우리는 이 설계의 클라이언트인 원장의 눈치를 슬며시 살폈다.
어차피 그녀가 만족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었으니까.
그녀는 티내지 않았지만 뭔가 뚱한 얼굴이었다.
불만족이라는 느낌을 내뿜고 있었다.
소장이 말을 걸었다.
“원장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고생이 많으셨네요.”
형식적인 말로 우리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소장이 내게 눈짓했다.
왜 그런지 알아보라는 눈빛이었다.
원장 모르게 인상을 쓰는 것으로 보아, 소장도 대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짜증이 났다든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물었다.
“원장님, 마음에 안 드시는 게 있으면 말씀을 해주세요.”
어차피 그녀 혼자서 생각을 해봐야 해결될 것도 아니었다.
생각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다.
조곤조곤히 그녀를 설득했다.
“원장님, 우리는 원장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돈을 내고 원하는 것을 얻는데, 전혀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아는 원장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경우에 밝지 않아 제 의견이 억지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이지, 갑질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당신들이 고생한 건 저도 알아요. 제가 말씀드렸던 벽 문제는 확실히 해결이 되었어요.”
“그런데요?”
“딱히 맘에 안 드는 건 없어요. 그림도 이해하기 좋게 잘 그리셨고, 어차피 도면은 제가 봐도 모르니까요.”
묵묵히 그녀에게 계속 말하라고 했다.
‘지금 시원하게 풀지 못하면 어차피 마음에 계속 남을 거고. 나중에라도 불거져 나오겠지.’
이 경우에는 속 시원하게 말하는 게 답이었다.
무조건 풀고 가야 했다.
“딱히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없는데, 그렇다고 딱히 마음에 드는 것도 없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런데, 뭔가 말로 하기는 애매하다는 말씀이시죠?”
그녀가 생각하는 유치원과는 좀 이미지가 멀다는 말이겠지.
그녀가 딱히 원하는 이미지가 있었다면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녀가 애초에 원했던 것은 벽을 움직일 수 있게 해달라는 것뿐이었다.
건축가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다.
원하는 바는 있는데, 자신이 정확히 뭘 원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정확히 알았다면 도면을 그려서 왔겠지.
그리고 지금처럼 추상적인 이미지와 관련된 경우에는 더 심했다.
원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성훈 씨 말이 딱이네.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원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휴,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굉장히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머리에 아무리 좋은 생각이 있어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면, 그건 공염불과 다를 바가 없다.
한숨 쉬는 그녀에게 말했다.
“말씀만 하세요. 그림은 제가 그릴게요.”
그녀가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그게 가능해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생각 차이다.
나처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각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
망설이는 그녀를 소장이 부추겼다.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십시오. 원장님, 성훈이 이 친구가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지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이미 그는 나와 공모전을 하면서, 내 그림 실력에 놀란 적이 있었다.
성훈의 그림은 거의 동시통역과 같은 수준이라는 것을 아니까.
말하는 순간 이미 그림으로 나타나 있을 것이다.
“제가 설명을 잘 못해도 비웃지는 마세요.”
그녀는 수줍게 우리에게 다짐을 받았다.
문득 뇌리를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의 불확실한 이미지를 끄집어내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그녀의 맘에 들 만한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빠를까?’
말을 하려 하는 그녀를 앞질러 질문을 던졌다.
“원장님, 제가 먼저 여쭤 봐도 될까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그녀를 만족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던가?
그녀의 상상력이 지금 유행하는 것보다 더 뛰어나지는 않을 것이며, 또한 지금 유행하는 것을 디자인하는 것은 위험부담도 적다.
“뭔데요?”
“원장님,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유아용 프로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뽀로로 같은 것을 제안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나온 시기를 나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정확한 시기도 모르는 것을 함부로 말하기는 위험했다.
“음, 요즘은 텔레토비가 유행이에요.”
그쪽 계통의 사람답게 알고 있었다.
나도 문득 머리에 텔레토비가 떠올랐다.
지난 삶이 있었기에 아는 것이었다. 지금의 나였다면 제대로 TV를 볼 틈도 없이 바쁘게 살고 있었으니, 텔레토비 같은 유아용 프로그램은 절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휴, 미래의 흐름을 알면 뭐하나. 정확하지도 않고, 지금 그 흐름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도 정확하게 모르니까, 쓸모가 없잖아. 사회의 흐름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어.’
내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음, 그렇군요.”
소장이 무슨 소리냐며 나를 쿡쿡 찔렀다.
한동안 한국을 강타한 프로그램이었다.
개그 프로에서도 그 인형 탈을 쓰고 패러디한 것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소장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작게 말했다.
“애기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소장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속삭였다.
“난 뉴스하고 경제란밖에 안 보거든.”
우리 둘 모두 모른다고 생각했던지, 원장이 실망하는 모습이었다.
“원장님, 제가 알아요. 계속 말씀하세요.”
이미 내 손은 종이 위에 텔레토비를 그리고 있었다. 그걸 보여줬다.
“이거 말씀하시는 것 맞죠?”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에게 물었다.
“유치원에 텔레토비를 넣으면 어떨까요?”
“그럴 수 있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이미 그녀의 생각은 텔레토비에 꽂힌 것인가?
‘그렇다면 다른 생각을 못하게 만들어야지.’
그녀에게 내 그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버섯 머리를 텔레토비들이 노는 동산으로 만들어 버리면 되죠. 언덕 몇 개 더 그리고…….”
“어머나, 그러면 되겠군요.”
설명을 하면서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시선은 계속 내 손끝에 머물렀다.
텔레토비라.
내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동산에서 뛰노는 머리 큰 캐릭터들이었다.
‘물론 태양도 있지.’
그녀의 생각을 바로 그림으로 구현했다.
물론 색깔도 덧칠하면서 말이다.
“어머! 어머!”
그녀에게는 자신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림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한 일인 듯했다.
그녀가 입을 가리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어떻게 금방 그렇게 그림을 그려요?”
그녀에게 대답 대신 씨익 웃어줬다.
‘몰라서 그랬던 거지, 알면 일도 아닙니다.’
몇 개의 언덕을 그리면서, 그 위에 텔레토비들이 뛰노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원장님, 이 언덕에서 선생님들이 텔레토비 탈을 쓰고 수업을 하는 건 어때요?”
원장이 박수까지 치면서 환하게 웃었다.
“어머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가 있죠?”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TV에 있는 친구들과 노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 해본 말이에요.”
누가 될지 모르지만 여름에 근무하는 선생님은 죽었다고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TV에 나오는 친구들과 같이 놀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릴까?
적어도 아이들에게는.
마치 슈퍼모델이 브라운관에서 걸어 나와 내 손을 잡아주는 그런 느낌이 아닐까? 물론 아이들의 경우에는 좀 더 순수한 스킨십이겠지만.
버섯 형상으로 하나만 올라왔던 언덕이 사라지고, 세 개의 언덕이 생겼다.
‘쓸모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옥상이 가장 쓸모가 있게 되었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림을 그녀가 보기 좋게 앞으로 내밀었다.
“텔레토비들이 이런 곳에서 놀죠? 아마?”
내가 알고는 있다고 해도, 정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던 분야였으니, 그녀의 확인이 필요했다.
“네, 맞아요.”
그림을 그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아들이 원하는 건 슈퍼맨 같은 능력자가 아니라 친구들일 거야.’
아이들의 시선에 맞춘다고 하면서도 정작 나는 그들의 시선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시절에 이상한 나라 폴이라니!’
한심하게도, 나는 아이들의 유행을 전혀 몰랐다.
‘왜 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침 시간에 TV를 조금만 봤어도 알 수 있는 거였는데.’
아쉬웠다.
유아들을 고객으로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내 생각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원장에게 말을 이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가시죠?”
“어떻게요?”
“아예 유치원 자체를 놀이동산으로 만들어 버리죠?”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버섯 머리에 하얀 원이 칠해져 있죠?”
그림에는 아직도 버섯돌이 머리의 하얀 원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게요. 그 원들은 왜 안 지우신 거예요?
“여기에 구멍을 뚫어서 아이들에게 거대한 정글짐을 만들어주는 건 어떨까요? 여기서부터 이렇게…….”
버섯머리 원에 입체감을 입혔다.
무늬로만 존재하던 흰 원이 구멍이 되었다.
“미끄럼틀 입구를 만드는 겁니다. 이 미끄럼틀은 그대로 1층 바닥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엥? 미끄럼틀이요?”
난 미끄럼틀의 스케일을 좀 더 키웠다.
“원장님, 미끄럼틀을 타면서 너무 짧아서 아쉬워한 적 없으세요?”
“당연히 있지. 왜 없겠어요?”
놀이공원의 슬라이드들이 왜 날이 갈수록 길어지겠는가?
아쉬움을 느끼지 않기 위함이 아닐까? 조금 더 스릴을 즐길 시간을 늘리려고 말이다.
지금 내가 설계한 미끄럼틀은 총 길이가 10미터가 넘는다. 아이들에게는 충분한 길지 않을까?
그리고 그 숫자도 몇 개나 된다.
그만큼 즐거운 시간도 길어질 것이다.
‘이런데, 애들이 유치원 가기 싫다는 말을 할까?’
하루하루가 즐겁지 않을까?
“성훈 씨, 혹시 위험하지는 않을까요?”
그녀는 좋은 생각임을 인정하면서도 우려를 표했다.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안전장치를 해주면 되지.’
“이렇게 둥근 뚜껑을 씌우면 됩니다. 그냥 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투명한 뚜껑을 씌우면 되겠죠.”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와도 걱정 없이 미끄럼틀을 탈 수 있겠네요?”
“그렇죠. 그리고 지붕 외곽의 테두리에는 난간을 쳐주면 안전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겁니다.”
“네, 맞아요.”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이들이 놀고 싶어 하고, 매일 가기를 원하는 놀이동산 같은 유치원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가장 즐겁게 놀 수 있도록 설계해 주는 것.
원장이 빙긋이 웃었다.
“이름을 텔레토비 유치원이라고 지어야 하겠네요.”
소장이 내게 작은 소리로 슬쩍 물었다.
“성훈아, 그렇게 해도 괜찮겠냐? 애들이 몽땅 올라가서 논다고 하면, 아무래도…….”
하중이 과해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외벽을 내력벽을 해버리죠. 그러면 그런 염려가 좀 더 줄어들겠죠.”
“그래, 그럼 문제될 게 없겠구나. 난 네가 가운데 기둥에만 하중을 다 모은다고 생각했지.”
곱상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원장이 물었다.
“그럼, 성훈 씨. 좀 더 말해도 돼요?”
눈썹을 으쓱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지금처럼 말씀만 하세요.”
원장과 소장, 그리고 나는 몇 시간에 걸쳐서 디자인에 대한 협의를 끝냈다.
그렇게 나온 디자인은 둥근 성 같은 모습이었다.
그림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마법의 성 말이다.
외벽을 알록달록한 파스텔톤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지붕은 푸른 동산을 만들었다.
외벽에는 투명 미끄럼틀이 넝쿨처럼 얽히며 내려와 있었다.
“원장님, 이런 모습인데, 어떠세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충분히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진작 올 걸 그랬네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러면서 원장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성훈 씨!”
“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약간 움찔했다.
환한 미소를 띤 채, 그녀가 말했다.
“이거야. 이거! 이게 딱 내가 원했던 유치원이야. 아. 정말 예뻐!”
“원장님 도움이 컸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로 겸양하면서 그 자리를 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