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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157화 (157/427)

건축의 신 157화

기둥은 꼭 있어야 하는가? (04)

나는 진 교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저 구조대전의 책임을 지고 교수직을 사임한 박 교수와 긴밀한 연관이 있었다는 정도였다.

구조대전이 있고 난 후, 바로 현재건설에서 연락이 오는 바람에 진 교수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못했었다.

‘그때 손을 확실히 봤어야 하는데.’

물론 진 교수가 재빨리 박 교수를 잘라 내버린 탓에 딱히 흠잡을 것을 찾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마무리를 짓지 못하니, 이런 일을 겪는 거지.’

지금은 딱히 처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입맛이 씁쓸했다.

저렇게 월급쟁이 교수를 하려고,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오는 것인가?

매년마다 수혈되는 젊은 피들이 고작 저런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지난 삶이었다면 이런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나도 진 교수와 별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난 삶에서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반면교사라는 말을 되뇌게 된다.

“형, 뭘 그렇게 쓸쓸한 표정을 짓고 계세요?”

민수였다.

경호와 함께 학생회 실을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공부들 잘하고 있어?”

총무와 회계의 학업 상태를 묻는 말이었다.

“크, 선배님. 그 선배들, 울려고 하던데요?”

“쌤통이지. 자식들. 맨날 공부 안 하고 술이나 마시고 다니더니.”

민수의 투덜거림도 뒤따랐다.

“공부야, 제 녀석들이 알아서 하는 거고, 여기 좀 앉아 봐라. 물어볼 게 있다.”

민수와 경호가 소파에 앉았다.

진 교수에 대해서 물었다.

“선배님. 그분, 사대주의자로 유명해요.”

“헐, 조선시대냐? 웬 사대주의냐?”

“그 교수님 말끝마다 ‘S대가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고, 곧 세계 최고 대학의 반열에 들 거다’라고 말하거든요.”

“정말? 그렇게 말한단 말이야?”

“아뇨. 딱 찍어서 말하지는 않는데, 뉘앙스가 그래요.”

민수가 말을 보탰다.

“거의 그런 분위기예요. 저도 저번에 수업 듣는데, ‘현대도 계급사회다. S대를 나온 똑똑한 사람만이 상위 1%가 될 수 있다.’ 뭐, 그런 뉘앙스로 말을 하더라고요.”

S대생이 아닌 사람들은 누가 들어도 기분이 나쁘리라.

대한민국에 S대 졸업생이 얼마나 되겠는가?

“쩝.”

다른 할 말이 없었다.

더 말을 들을 것도 없었고, 한 교수에게 참고하라며 준 논문들이 모두 S대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S대에 알아서 기어라는 말이네. 허 참.”

경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이 그렇게 되나요?”

사대주의(事大主義)를 풀이하면, ‘큰 나라에게 알아서 기자’였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보다 나은 해석이 불가능했다.

S대에서 그 말을 했다면 자기 대학의 자긍심을 높이는 것이니, 공로패라도 받았을지 모르지만.

‘여우인 줄 알았더니, 멍청이네. 상위 1%를 옹호하기 위해 나머지 99%에게 미움을 사다니.’

민수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일부러 그러겠어요? 그런 사고방식이 박혀 있으니, 자연스레 그게 몸에 밴 거겠죠.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예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까 진 교수가 다녀간 이야기를 했다.

“선배님, 학회에 논문을 제출하는 것도 S대 눈치를 봐야 하는 건가요?”

“그야 S대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봐야지.”

우리나라의 지도층을 다 그런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지 않던가.

‘우리나라에서는 공부 잘하는 게 벼슬이지.’

선배가 후배를 당겨주는 것은 좋은 전통이다.

다만 제 후배에게 좋은 자리를 주기 위해 다른 학교의 사람들을 걸러내는 것을 우리는 ‘학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후배는 선배를 위해 다시 자리를 만든다. 그래야 자신도 선배 대우를 받을 테니 말이다.

그것이 발전하여, 전관예우, 혹은 커넥션이라는 이름의 범죄가 된다. 즉 범죄가 전통이 된다.

‘좁디좁은 나라에 한 다리 걸치면 다 아는 사람들일 텐데, 꼭 그렇게 해야 하나?’

내 앞의 어린 녀석들에게 이 말을 해야 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사회의 중견이 되었으면, 그에 걸맞은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자신의 파벌이 아닌 것을 밀쳐놓고는, 내가 잘나서 그런 것입네. 하고 자랑하는 꼴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런 몰염치한 것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건축계가 썩어가고 나라를 좀먹는다.

나잇값도 못하고, 이름값도 못하고.

말을 해놓고 녀석들의 얼굴을 보니, 풀이 죽은 듯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짝.

손뼉을 치면서 녀석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야, 우리가 높은 자리 차지하고, 그런 폐단을 다 내 몰아버리면 될 거 아냐! 그런 얼굴 하지 마.”

쉽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경호가 물었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야, 대학 가면, 그 똑똑하던 놈들도 다 멍청해져. 어느 대학이나 마찬가지야.”

“하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대학 가면 그놈들도 공부 안 하기는 매한가지라고.”

IMF를 기점으로 조금 바뀌기는 했지만, 아직은 대학 졸업장이 곧 좋은 직장을 보장하던 때였다.

내가 이번 삶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계속 상위권 대학을 위한 사교육비는 하늘을 찔렀으니, 그때도 그런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으리라.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교육의 끝은 대학 입시였다.

경호에게 물었다.

“이미 대기업 입사가 결정되어 있는데, 과연 치열하게 공부를 할까?”

“안 하겠죠?”

“당연한 거야. 토끼와 거북이 몰라? S대? 걔들이 노는 동안 우리는 공부하면 되는 거야.”

한동안 이야기를 하며 결론은 내렸다.

“그런 의미에서 한 교수님의 논문이 잘되었으면 한다는 거지.”

“결국 형은 공부 열심히 하자는 말이잖아요.”

“응.”

“크, 하여간.”

“그런데 선배님. 미팅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저 눈빛 초롱거리는 거 봐라.

“중간고사 끝나면 바로 대동제잖아. 그거 끝나고 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들 있어.”

“선별 인원은요?”

“걱정 마. 성적순으로 할 거니까. 아니면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있다거나.”

“선배님, 너무 독재하시는 거 아닙니까?”

“싫으면 공부 하지 마. 죽을 때 공부 못한 거 후회하지 말고.”

“에이, 꼭 죽어보신 것처럼.”

“응. 이런 말도 있잖냐? 죽어봐야 정신을 차린다고.”

“경호야. 형이 하는 말은 군대 가서 죽을 고생을 했다는 말이야. 안 그럼 사람이 이렇게 변했겠어? 이 형. 별명이 뭐였는지 아냐?”

경호가 오해할까 봐 친절하게 설명하는 민수였다.

‘말을 해도 믿지를 않네. 얘는 또 왜 이렇게 엉뚱한 데서 친절한데?’

진지하게 내 말에 토를 다는 민수에게 말했다.

“거기까지만 하지. 민수야.”

나나 너나 딱히 내세울 만한 과거는 아니지 않니?

물론 이전 삶에서는 군대를 갔다 와서도 개날라리였다. 제 버릇 개 못 주더라. 죽기 전까지는.

‘니들도 후회하지 않으려면, 살아 있을 때 죽자고 열심히 공부해.’

따르르릉.

“축제 계획 마무리해. 전화 받고 올 테니.”

수화기를 들었다.

“프랭크, 오랜만이네요.”

-한은? 왜 요즘은 논문을 안 보내나 해서.

“논문 주제를 바꾸기로 했어요.”

우리의 속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그랬나 보군.

“뭐가요?”

-사실 구조 쪽이야 내 전문 분야니까, 조언에 문제가 없었지만, 한국의 전통 건축은 문외한이 아니던가? 그래서 한국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으라고 했더니. 쯧쯧, 그런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군.

프랭크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 정도로 형편없던가? 내가 보기엔 참신했는데.

“네, 외국에서는 일부 어필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안 돼요.”

-으음, 그렇겠군. 자네가 그렇게 단언할 정도면.

그에게 내 말이 먹히는 건, 한 교수가 프랭크에게 내 자랑을 엄청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세계로 진출을 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확실히 기반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에서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한국의 기반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본진 비워두고 멀티 하는 꼴이지.’

-그래. 그게 맞아. 한도 거기서 잡으려고 노력 중이지.

기둥 없는 건축에 대한 말을 해주고, 자료가 있으면 좀 건네 달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경호가 나를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민수야. 얘, 왜 이러니?”

민수는 멀뚱멀뚱한 눈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프랭크랑 통화하는 것은 민수에게 일상이었다. 민수도 영어라면 나 못지않았고 말이다.

경호가 말했다.

“선배님, 영어를 진짜 잘하십니다.”

“그래?”

경호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부해.”

기, 승, 전, 공부.

학생의 사명은 공부.

안중근 의사께서 말씀하셨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

한 교수가 돌아왔다.

“성과는 좀 있었습니까?”

“끄응. 구조 관련 서적은 미국에 비하면, 완전 쥐꼬리만큼이야. 찾는 게 일이야.”

쿵.

들고 온 책들을 책상 위에 놓는 소리였다.

“아이고, 허리야. 스승님께 전화를 해봐야겠어.”

“아까 전화 왔길래, 자료 좀 찾아서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한 교수가 반개하며 물었다.

“그래? 주제 바꿨다니까 뭐래시든?”

“어설프게 승부를 하느니, 확실하게 전공분야만 가지고 하기로 한 건 잘했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그쪽이 조언을 해주기도 좋을 거라면서요.”

한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도 일리가 있지.”

“어쨌거나. 도산 소장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해본 것 같아요.”

천정에 롤러 다는 것을 비롯해서 생각했었던 몇 가지를 말해주었다.

“흠, 그럼 딱히 좋은 방법이 없는 거잖아. 어떡한담?”

오히려 상식이 풍부하기 때문에, 그 상식이 창조적인 것을 가로막는다.

기둥이 있는 것을 기반으로 건축을 해왔기 때문에, 기둥이 없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치원 원장의 발상 자체는 뛰어나지만 우리 같은 건축 관련 종사자에게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더 신선한 거죠. 저나 한 교수님이 그런 생각을 할 수나 있었을까요?”

한 교수가 머쓱하게 웃었다.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게 상식인데.”

한참을 골머리를 싸맸지만 나오는 것은 없었다.

“롤러 같은 것은 부수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은 우리가 아니라, 기능공에게 맡겨도 방법이 나올 거예요. 그건 그분들이 전문가들이니까.”

나도 현장 생활을 오래 했지만, 자질구레한 디테일에서는 현장의 기능공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렇지. 정말 그렇더라. 기숙사 현장 하면서 많이 느꼈어.”

특히나 한국의 기능공들의 머리는 참으로 기발하다고 할 수 있다.

고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디테일이 아니었다.

“교수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것에서 어떻게 인식을 전환하는가 하는 것이죠.”

형식 파괴가 이루어질 때,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문제는 알면서도 쉽지 않다는 거지.’

일을 잘못 받아온 것인가?

일이 되지 않으면 원장에게 사과하면 끝이지만, 한 교수에게는 논문이 달린 문제였다.

‘생각해라. 김성훈. 제발.’

나무젓가락을 잘라서 네 귀퉁이에 세웠다.

그리고 그 위에 책을 하나 올렸다.

“뭐 하냐? 성훈아?”

“기둥을 어떻게 제거할까 고민 중입니다.”

한 귀퉁이의 젓가락을 뺐다. 동시에 대각선 쪽의 책 귀퉁이를 눌러주었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대각선 쪽의 나무젓가락을 빼면서, 남은 두 젓가락 쪽의 책 귀퉁이를 눌렀다.

“여기서 균형만 잘 맞으면 안 무너지는데.”

한 교수는 내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훈아, 뭔가 위태위태한걸.”

“뭔가 떠오를 것 같은데, 안 떠오르네요.”

머릿속엔 떠오르는데, 눈에는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훈아. 유레카? 좋은 생각이라도 났어?”

한 교수가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원두커피를 엑기스처럼 뽑고 있었다.

‘저 양반. 오늘 안 잘 모양이네.’

한약처럼 시커멓게 달여진 커피가 그의 잔을 채우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에 잠을 제대로 못 자는데, 저걸 마셨다가는 꼼짝없이 뜬 눈으로 지새워야 할 것이다.

도망쳐야겠다. 잡히면 밤샘이다.

한 잔을 더 따르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안 되겠어요. 집에 가서 잘래요.”

좀 더 맑은 정신이면, 머릿속의 흐릿함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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