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56화.
기둥은 꼭 있어야 하는가? (03)
소장과 설계로 의논을 했다.
실무자들은 어떤 문제를 제기할 것인가를 미리 알아가야 한 교수를 설득하기에 좋을 것 같았다.
“소장님, 천정에다가 롤러를 설치해서 벽을 매다는 건 어때요?”
“생각해 봤지. 하지만 조금만 옮기면 기둥에 다 걸리더군.”
반대로 기둥에 맞춰서 벽을 제작하면 기둥이 없는 부분에서 구멍이 생기겠지.
기둥을 밖으로 빼면 되지 않느냐고?
가장 외측부에서는 기둥에 걸리지 않겠지만, 다시 안쪽으로 들어오면 기둥에 걸리기는 매한가지였다.
빵빵.
밖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아줌마, 차 빼라는 소리 안 들려?”
소장이 말했다.
“우리 김 여사님. 이제 가나 보네. 휴.”
어디를 가도 티가 나는 사람이 있다.
소장에게 물었다.
“그리 강압적인 사람 같지는 않은데, 왜 그리 저자세세요? 소장님.”
“휴, 말도 마라. 내가 아까 말했지. 시장 동생이라고. 이번 연말에 시에서 하는 공사가 있는데, 그거라도 따먹으려면 잘 보여야 안 되겠냐?”
‘역시 그것 때문이었군.’
소장도 자신의 사정이 답답한지, 식은 지 한참 된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런데 정말 방법이 있겠냐?”
“일단 해보는 거죠. 한 교수님하고 의논해 볼게요.”
“그래, 교수님께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리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 알죠?”
만약을 위해서 방어막을 쳤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꼭 해야만 해. 이번 연말의 공사가 달려 있다고. 쩝, 성훈아. 너만 믿는다.”
“알았어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한 교수를 설득할 시간이었다.
소장은 내게 일을 떠넘겼다고 생각해서인지, 속이 시원한 듯 보였다.
‘과연 그럴까? 이제부터 시작인데.’
물론 난 이 안건에 대해 한 교수와 말을 해볼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냐? 절대 아니지.
‘한 교수와 고민한 것을 가지고 어떻게든 실시설계를 들어가라고 쫄 테니까, 그때 가서 죽는 소리나 하지 마시라고.’
내 속도 모르고 소장은 창가에서 웃음을 띤 채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배웅하고 있었다.
***
“교수님, 저 왔어요.”
“어, 성훈이 왔냐? 새로운 거 고민 좀 해봤어?”
한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건물에 기둥은 꼭 있어야 하는 건가요?”
“당연하지! 기둥이 없이 어떻게 지붕이 있을 수 있겠어. 하다못해 내력벽이라도 있어야지.”
상식의 범위에서 당연한 대답이었다.
“교수님, 기둥이 완전히 없지는 않더라도 최소화시킬 수는 있지 않을까요?”
“글쎄다. 그건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걸.”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 고민을 해본 적이 없겠지.
“교수님, 기둥이 없다면 제가 원하는 대로 공간을 넓히고 좁힐 수 있잖아요.”
한 교수는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둥은 지붕을 얹기 위해 불가결한 구성 요소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공간이 제한되는 것 또한 사실이지.”
물론 기둥 그 자체로도 미적 요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세우고 나면 보기 싫다고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중의 균형이 깨어짐으로 인해, 건물 자체의 붕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법에서는 ‘건축물’이란 지붕과 기둥 또는 벽이 있는 공작물이라고 정의한다.
물론 기둥이나 벽 없이 지붕이 존재할 수는 없다. 중력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말이다.
지붕만 둥둥 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집이란 결국 비와 바람 등의 외부 위험 요소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피난처이자 안식처이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집을 짓기 시작했고, 현시대에는 집이 없는 삶이란 생각하기 어려운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사람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집이,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지금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거기에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만약 기둥이 없다면 내가 가진 공간을 훨씬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최소한, 한 개 이상의 기둥은 필요하겠지.
하지만 정육면체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4개 혹은 그 이상의 기둥이 필요할까?
사람의 고정관념이 아닐까?
인간은 어느샌가 6m, 8m, 10m의 모듈에 길들여져 버렸다.
스스로의 한계를 지어버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수천 년을 살아왔다.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는 그렇게 살아가겠지.’
“한 교수님, 전 이걸 논문 주제로 삼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거든요?”
“음, 새로워. 발상 자체는 아주 좋아. 하지만 과연 받아들여질까?”
‘응? 왜 이렇게 소극적이지? 좋다고 반길 줄 알았는데?’
연구 결과라는 것이 꼭 결론을 내어야 하는 것인가?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연구가 아닐까?
“말을 해봐야, 통할지 안 통할지를 아는 거죠.”
“한국이라는 사회가 그렇게 만만치 않더구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프랑스에 다녀온 사이에.
“너도 알겠지만 내가 여기서 입지가 좁아.”
“당연하죠.”
한 교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미국에서 인맥, 학맥을 이야기해도 실감을 못했는데, 실제로 당해보니까, 이거 만만치 않다.”
“그러니까 더 튀게 행동해야죠.”
어차피 내려갈 곳이 없는 한 교수다.
사고를 쳐도 잃을 것이 없다.
“그렇기는 한데 말이다.”
“뭐가 걱정입니까?”
“진 교수가 안정적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자기 아는 인맥이 많으니까 도와주겠다고.”
“그래서 논문이 그렇게 평범해진 겁니까?”
한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물었다.
“지금이라도 내용을 좀 수정하면 되지 않을까?”
“안 됩니다.”
내 단호한 말에 한 교수는 의아한 모양이었다.
“왜?”
“글을 쓰는 사람은 한 번 썼던 글을 리메이크하면 더 좋은 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글쓰기의 프로이니 말이다.
잘못된 점을 고치면 더 좋아진다는 것은 상식이 아니던가!
조용히 한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자신만의 착각입니다.”
어느 한 부분이 고쳐졌다고, 글 자체가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관이 함몰되어 스스로 붕괴된다.
“그러냐?”
한 교수가 글을 써봤을까?
공대생이 글을 쓰는 경우란 논문이나 리포트 외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리포트를 쓰는 것은 학점을 받기 위해 내가 가진 지식을 교수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설득이 필요 없다.
하지만 논문은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이 들어가고, 그것을 상대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그것이 성공할 경우, 잘된 논문으로 인정받는다.
매일 글을 쓰는 글쟁이도 자신의 글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데, 하물며 지금의 한 교수가 자신의 논문을 뿌리째 바꾼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교수님, 정 하고 싶으시면 1년 뒤에 다시 꺼내서 하세요. 지금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리메이크가 잘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것도 글에 통달한 사람의 경우에 한한다.
“그럴까?”
지금, 한 교수는 의기소침해 있었다.
상대에 대해서 모르면서 상대에 대해 조언을 하는 것은 잘되면 약이지만, 잘못되면 극독이다.
“진 교수가 교수님에게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을 거예요.”
진 교수는 저번 구조대전 때에 자신의 후배인 박 교수의 횡령 건 때문에 입지가 좁아진 상태였다.
오죽 급했으면 자신의 오른팔인 박 교수를 잘라내었을까?
‘박 교수 대신 한 교수를 자기 오른 팔로 삼으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겠지.’
어쨌거나 진심으로 한 교수를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한 교수도 사정을 아니까, 내 말에 수긍했다.
“하지만 전 그 조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가야 해요.”
한 교수가 한국으로 온 지, 이제 일 년이 조금 넘었다. 내 배경으로 삼겠다고 하면서도 난 방학 때마다 해외로 나돌면서 한 교수를 케어하지 못했다.
나도 없는 상황에서 한 교수는 한국의 학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 발버둥을 쳤던 모양이다.
지난 삶의 나이까지 합하면 나는 한 교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나보다 잘난 사람이니, 어련히 알아서 할 거라는 생각만 했고, 그가 10년 뒤에 거목이 된다는 사실만을 생각했을 뿐, 이런 고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가장 챙겨야 할 사람을 내팽개치고 밖으로만 나돌았다.
‘아이고, 김성훈. 이 바보야.’
이제 내가 대학에 남아 있을 시간은 채 일 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
4학년 때는 실습 나가야지. 학교에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안 그래?
그 기간 동안 한 교수라는 싹수가 있는 인재를 완전히 거목으로 세워둬야 한다.
그런데 나는 단지 시간만 앞당기면 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이러니 바보가 아니고 뭔가?
“교수님!”
“왜?”
“지금 교수님께 필요한 것은 패기예요.”
“엉?”
“예일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건축과에 재입학했던 그 의외성! 건축과를 졸업할 때, 학계에 논란을 일으킬 걸 알면서도. 파격적인 논문을 썼던 그 패기! 또한 미국에서의 출세를 버리고 한국으로 날아온 그 무모함!”
“흥, 그렇지. 무모함이었지.”
“지금의 교수님께는 그게 필요해요.”
한 교수는 생각을 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의기소침한데, 생각하게 하면 안 되지! 몰아붙여야지.’
“총장이 한국에 적응하라고 여기로 모셔온 거라고 생각하세요? 전 아니라고 봐요.”
“그렇지. 뭔가 새 바람이 필요했겠지.”
“네,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다가 문제가 생기면 총장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거예요. 아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리죠.”
“크, 어떻게?”
저 여우같은 총장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한 교수가 좋아서 꼬셨을까?
‘아니지. 절대 아니지.’
총장은 한 교수를 어딘가에 써먹기 위해 데리고 왔고, 그 대가로 한 교수의 미래를 바꿔 버렸다.
데리고 와줬으니, 그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건 지극히 사대주의에 입각한 동양적인 사고방식이다.
데리고 왔으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지.
“총장이 데려왔으니, 그 사람에게 책임지라고 하죠. 뭐, 그게 미국적 사고방식 아니에요?”
흥분을 했던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교수님, 사람이 항상 잘할 수만 있겠어요? 그럼 잘할 때는 내 자식이고, 못하면 남의 새끼란 말입니까?”
한 교수가 빙긋이 웃었다.
“성훈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말했다.
“사고 한번 치자. 말이 안 되는 소리면 어때? 처음부터 말이 되는 소리가 어디 있었겠어?”
아치 구조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이 말이 되는 소리라고 했을까? 갈릴레이가 ‘지구는 돈다’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뭐라고 했던가?
말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해보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한다.
“계란을 세울 때는 계란을 깰 용기가 필요한 법이죠.”
한 교수가 또 다른 걱정을 말했다.
“하지만 실제 데이터가 없는 논문은 탁상공론에 불과해.”
기둥을 없애고 집을 짓는다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그 데이터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건 당연한 말씀이죠.”
건축사 사무소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논문에 필요할 정도로 충분한 데이터를 뽑아낼 수 있을까? 난 시간이 얼마 없어.”
“그건 제게 맡겨주세요.”
“어떻게?”
한 교수에게 씨익 웃어줬다.
‘도산 소장 목을 졸라서라도, 데이터를 뽑아올 테니까요.’
하긴 소장 성격에 목이 졸릴 때까지 답을 내놓지 않을까?
일 놔두고 농땡이를 칠 사람은 절대 아니지.
‘어쨌든 이제 시작이군.’
***
“성훈 군, 한 교수 어디 갔나?”
진 교수가 아는 척을 했지만 성훈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네, 논문 자료 찾으신다면서 도서관에 가셨습니다.”
“엥? 무슨 논문 자료? 필요한 건 내가 다 줬는데?”
“논문 주제를 바꾸시기로 했습니다.”
“어떤 걸로?”
“기둥은 꼭 있어야 하는가? 하는 주제로요.”
“어허이, 이 사람 또 무슨 헛바람이 들어서.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니까!”
그에게는 우리 주제가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왜 교수님은 그게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논문은 말이야, 통과 의례일 뿐이라고. 교수가 무슨 선구자인 줄 아나? 주제 넘는 짓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대학이 무슨 학문의 요람이냐?
연구는 왜 하냐? 연구소에서나 하라고 하지!
벙찐 표정을 짓자 진 교수가 말했다.
“교수는 가르치는 사람이야. 이미 나와 있는 것을 학생들에게 잘 전달하는 것만 해도 충분히 바쁘다고. 알기나 해?”
진 교수가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내 오른팔로 삼아주려 했더니,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손길을 거절해? 이런 후진 곳에 있는 교수 따위가 말이야. 지가 무슨 개척자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이런 삼류 대에서 무슨 연구를 한단 말이야?’
생각할수록 한 교수가 괘씸해지는 진 교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