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55화.
기둥은 꼭 있어야 하는가? (02)
“과장님, 도대체 어떤 의뢰기에 그렇게 어렵다는 거예요?”
전화로도 될 것을 굳이 온 것은 이유를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도산 소장의 말재간으로도 설득을 못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유치원 의뢰가 들어왔어.”
“설계해 주면 그만이지. 문제될 게 있나요?”
“그런데 의뢰자가 보통 사람이 아니야. 귓구멍이 처막혔는지, 말이 안 통해.”
말이 안 통한다고 포기할 소장이던가?
도산 소장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입담을 가졌다.
최 과장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마요? 소장님. 꼼수가 또 죽여주잖아요.”
수주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객을 설득하는 소장이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통해. 안 통해. 이번엔 어림도 없어.”
진절머리가 나는 모양이었다.
“뭔데요. 말씀해 주세요.”
“생각도 하기 싫어. 좀 있으면 소장님 오시니까 직접 듣는 게 나을 거야.”
곧 소장이 돌아왔다.
“일 년에 몇 번 하지도 않을 학예회를 위해서 대강당을 짓는 게 비효율적이라는 거지.”
당연하다.
원생을 한 명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서는 교실 하나 더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일 것이다.
대강당까지 생각할 정도면 꽤나 시설 투자를 하려는 줄 알았는데, 말을 들어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요?”
“벽을 항시 자기 마음대로 옮길 수 있게 만들어 달래! 집이 장난인 줄 아나?”
“파티션을 만들어 주면요?”
“그건 또 싫다네. 싼 티가 난대나 어쩐대나 하면서 말이야.”
말을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
소장이 날 보더니 어이없다며 따라 웃는다.
“지금 이런 상황인데 웃음이 나와?”
“아직은 제 일 아니잖아요. 어떤 남자인지 궁금하네.”
“아줌마야. 아주 말 안 통하는 여자.”
소장은 시계를 보더니 짜증을 버럭 냈다.
“1시까지 오기로 했는데, 20분이 지났는데 왜 아직 안 와?”
밖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고가 난 건가?’
여러 대가 빵빵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고성이 들려왔다.
“아줌마, 차 빼라는 소리 안 들려요?”
창에서 보이지 않는 곳이라서 확인을 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교통에 불편을 주는 모양이었다.
고성을 지르는 상대는 급한 모양이었고, 상대는 여자 목소리였는데, 작아서 잘 들리지는 않았다.
소장이 혀를 찼다.
“또 김 여사님 등장했나 보구만! 쯧.”
미숙한 운전 실력과 불쾌한 운전 매너로 도로 상황을 어지럽히는 사람을 ‘김 여사’라고 부른다. 여성비하라는 말도 있지만…….
“종종 이런 일이 있나 보네요?”
“뭐. 아무래도 차는 많이 다니는데, 도로는 좁다 보니 어쩔 수 없잖아.”
시계를 보던 소장이 투덜거렸다.
“이 여자는 1시까지 온다고 해놓고는 20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라도 한 통 하던가! 사람이 매너가 없어. 매너가.”
1시까지 온다던 그녀는 2시가 되어서야 도착을 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곱상하게 생긴 여자였다.
첫인상은 참 곱게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뭔가 기분 상하는 것이 있는지, 미간에 주름이 가 있었다.
소장이 인사를 하면서 맞이했다.
“하하. 늦으셨네요. 바쁘셨나 봅니다.”
소장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어쩜 저런 사람들이 다 있죠?”
자신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는 것에 소장은 기분이 상한 것 같았지만, 그걸 얼굴로 드러낼 정도의 초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웃으며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이 골목에 거의 다 들어왔는데, 뒤늦게 들어와서는 차를 빼라고 하잖아요.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정말?”
소장이 인상을 살짝 굳히며 물었다.
“김 여사님, 어느 길로 들어오셨어요?”
“음, 사무실 뒤쪽으로 들어왔죠? 왜요?”
“거기 일방통행입니다.”
“어머, 그런 표시 없던데요?”
‘음. 아까의 김 여사가 이분이었군.’
없을 리가 없었다.
나도 아까 그 길을 지나 왔었거든.
‘긴장해서 못 봤겠지.’
보고도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지. 어떻게 면허는 땄는지 몰라.
그녀는 흥분을 했지만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말이에요. 여자가 운전을 하면 좀 양보해 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쵸?”
소장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수도 있죠.”
“곱게 말로 해도 될 걸 가지고.”
그녀는 입술을 씰룩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아저씨가 어찌나 사납던지, 후진하는 데 발이 덜덜 떨리더라니 까요.”
아까의 상황이 생각나는 모양인지, 소장이 내민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휴.”
그걸로 30분 이상을 실랑이했다는 말 아닌가?
남의 시간 한 시간을 허비하게 하면서!
‘휴.’
나도 한숨이 나왔다.
그녀의 말처럼 배려가 있으면 좋았으리라.
하나 갈 길이 바쁜 사람 붙잡고 30분 동안 길을 막으면, 그걸 과연 배려해 줄 사람이 있을까?
소장이 흥분한 그녀를 진정시켰다.
지금 소장은 똑같은 말을 세 번째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죠. 김 여사님.”
“원장이라고 불러주세요. 소장님.”
“네, 원장님. 말씀하시는 그게, 말씀하시기는 쉽지만 실제로 만들기는 어렵다니까요.”
“어떡하죠. 실력이 좋으시다는 말씀을 듣고 왔는데, 남편 친구분이 절 놀리신 건가요?”
소장의 얼굴이 누렇게 변했다.
말투는 분명히 조곤조곤 예의 바른데, 말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대놓고 실력 없다고 말하는데, 기분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가끔씩 저런 사람이 있다. 악의는 없는데, 자존심에 비수를 찌르는 말을 하는 사람 말이다.
저건 병이다.
자신이 뭘 잘못하는지를 모르니, 고칠 생각도 없다. 그렇다고 ‘당신이 잘못하고 있다’라고 조언을 해주기도 어렵다.
남한테 상처는 잘도 주면서, 자신이 상처받으면 ‘나한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면서 흥분하는 부류였다.
‘저런 유형은 조언해 봤자, 욕만 먹지.’
답답한 소장이 가슴을 쳤다.
“원장님, 제 말은 그게 아니잖습니까?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어머, 무슨 말씀을 그렇게 심하게 하세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뇨?”
소장의 이마에 주름이 늘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을 실수했습니다. 하지만 원장님 요구대로 하자면 기둥이 없어야 되는데, 기둥 없는 건물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습니까? 예?”
그녀가 당당하게 말했다.
“전 기둥, 건축, 그런 어려운 건 몰라요. 그런 거 처리하려고 건축사 사무소가 있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확인하듯 옆에 앉아 있는 나에게도 물어보는데, 그녀 뒤에서 소장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내가 소장이었어도 한 대 때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풋.”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제 말이 틀렸어요? 학생?”
“아뇨. 다른 것 때문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세 가지 복합적인 의미의 웃음이었다.
첫째, 소장의 행동이 우스워서.
둘째, 그녀의 요구가 너무 당당해서.
그렇다. 물건을 주문할 때, 고객은 생산자의 수고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당하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
셋째, 한 교수 논문의 주제가 떠올라서.
새로움.
그것은 이전에 없던 것을 의미한다.
그녀의 요구 사항을 들으니 자연히 떠올랐다.
그녀의 말은 요약하면 지극히 간단했다.
‘기둥 그런 거 모르니까, 벽만 움직이게 해 줘!’
이거였다.
소장이 입이 딱 벌어지는 것도 이것 때문이었고.
문제는 한 교수가 승낙을 할까 하는 것이었는데.
‘흐흐, 한 교수 성격은 내가 알지.’
소재 빈곤으로 난항을 겪는 한 교수가 이런 소재를 그냥 넘길 리가 없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라고 하며 달려들지 않을까?
생각을 하는 사이, 소장이 다시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잠깐만요. 전화 좀 받아도 돼죠?”
소장은 자존심이 많이 상한 듯했다.
원장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지만.
‘크, 전형적인 마이 페이스네.’
그녀가 전화를 받는 사이 소장에게 물었다.
“소장님, 왜 이 일을 굳이 하려고 하세요?”
우리에게 협업을 하자고 하는 것을 보면 각오가 대단한 것 같아 보였다.
“시장 동생이야.”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연말에 시에서 하는 큰 공사가 있다고 했었지? 아마.’
그녀가 돌아왔다.
소장이 말했다.
“원장님, 조금만 양보를 하세요.”
그녀는 입술을 말고 잠시 고민했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말씀이시죠?”
“이건 어느 사무실을 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흠, 그럼 역시. 어쩔 수가 없네.”
지금까지 본 그녀의 성향상 소장에게 설득되지는 않을 테고, 그럼 다른 사무실을 찾아갈 것이다.
‘이런 좋은 샘플을 놓칠 수는 없어!’
원래 소장은 청산유수에, 말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달변가였다.
하지만 아무리 논리적으로 말해도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주장을 하니, 답답해서 버벅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고객의 말을 들어주다가는 끝나지 않는 일이 된다.
고객의 요청에 따라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다가 결국에는 흐지부지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무조건 불가능하다고 하면 이야기 자체가 진행이 안 되죠. 소장님.’
언제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말하라면서요.
하지만 지금 흥분한 소장에게는 그런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오죽하면 주먹을 치켜들었을까!
“소장님,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될까요?”
“응응.”
어차피 잡지 못할 고객이라면 나라도 설득해 보라는 의미일 테지.
그녀의 말에 웃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원장님, 방법이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정말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집중한다. 소장도 ‘그래?’ 하면서 내게 집중했다.
‘아무리 봐도 나쁜 여자는 아닌데 말이야.’
“일단 원장님이 원하시는 건, 벽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다는 거죠?”
그녀가 소장을 흘겨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말이 통하시는 분을 만났네요.”
‘안 된다’는 말만 듣다가 가능하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 것이지, 내가 말을 잘해서는 아니었다.
“방법이 생각날 것 같기는 한데, 비용은 약간 늘어날지도 모릅니다.”
“비용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소장을 힐끗 쳐다보자 소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땅이 좁아서 문제인 거지.”
돈이 상관없을 정도라면 땅을 구입하지 못해서 대강당 겸용으로 쓰겠다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원장이 물었다.
“그럼 일단 방법은 있다는 말이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설계안을 완성된 다음에,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눠 보시는 건 어때요?”
자신의 말을 들어주려고 하는 내가 마음에 들었던 것인가? 그녀는 흔쾌히 승낙을 했다.
“좋아요. 그럼 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사흘이면 되나요?”
‘큭, 설계가 인스턴트인 줄 아시나?’
옆에서 말을 듣던 소장이 입을 떡 벌렸다.
“원장님, 무슨 번갯불에…….”
소장을 막으며 침착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원장님, 한 번 짓고 나면 적어도 수십 년은 갈 건물입니다.”
내 말에 그녀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원장님의 원하시는 바는 이제껏 들어보지도 못한 아주 새로운 요구입니다. 그런 만큼 저희도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셔야겠죠. 안 그래요?”
“알았어요. 그럼 기다릴 테니, 만족할 만한 결과만 만들어 주세요.”
소장을 놀리듯이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속이 시원하네. 이렇게 말이 잘 통하니 얼마나 좋아요. 아참! 그런데 학생 아니에요?”
학생이라는 신분에 그녀의 신뢰감이 사라지려고 하자, 소장이 나에 대해 읊으며 추켜세웠다.
구조대전에서 대상을 탔고, 현재건설에서 그 설계도를 사갔다는 것까지.
그녀가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어머나, 정말 대단한 학생이었네. 기특해라.”
그녀는 신뢰를 되찾은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원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일어서며 인사를 했다.
“2주 안으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죠.”
그녀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학생, 난 학생만 믿어요.”
“최선을 다해 만족스러운 답을 찾아내겠습니다.”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을 책임을 져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지.
소장을 보며 코웃음 치며 뒤돌아섰다.
“흥!”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뒤, 소장이 말했다.
“야, 성훈아. 거기서 시간 약속을 해버리면 어떡하냐? 원하는 대로 안 되면 어떡하려고.”
‘그러니까 일부러 그런 거죠. 소장님이 대충 하다가 나가떨어질까 봐서요.’
소장은 봐서 알겠지만, 공모전처럼 기한이 걸린 일에는 목숨을 걸고 달려든다.
내가 그 모습을 한두 번 보았던가!
‘보통 공모전 준비 기간은 2주면 충분하죠.’
오히려 시간이 루즈하면 진이 빠진다.
내 웃음에 소장이 얹힌 듯 가슴을 탕탕 쳤다.
“네가 책임질 거냐?”
“뭘요?”
“그 시간에 못하면 네가 책임질 거냐는 거지.”
소장의 얼굴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제가 왜요? 대표도 아닌데.”
“큭, 그런데 왜 맘대로 약속을 잡은 거냐?”
“아까 소장님이 말하라고 하셨잖아요?”
“야, 그건 적당히 알아서 설득하라는 거였지.”
난 뻔뻔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거참, 말을 하다 보니 거기까지 가 버렸네요. 죄송해요.”
한 교수 논문이 한 달 뒤다. 2주 후에는 적어도 논문의 골격을 갖추어야 한다.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한 교수 논문의 실제적인 고증이 가능할 것이다.
소장이 머리를 싸매 쥐었다.
“저 아줌마 성격에 맘에 안 들면 또 처음으로 돌아갈 텐데. 어떡하지?”
“그걸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죠.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