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53화
학생회장(05)
상대 후보의 기권으로 선거에서 승리를 거뒀다.
학생회실로 들어서니 총무와 회계가 벌떡 일어섰다.
“선배님, 학생회장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성훈이 차가운 눈으로 물었다.
“너희들 몇 학년이냐?”
“삼학년입니다.”
“응? 수업 시간에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그야, 수업을 잘 안 들어가니까…….”
“왜?”
“학생운동을 하느라.”
낮에는 학생운동 한답시고 돌아다니고, 밤에는 술로 현실을 비관하겠구나. 쯧쯧.
‘이런 놈들이라도 구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암적인 존재밖에 안 되겠지.’
“학생운동은 왜 하냐?”
“이쪽 계통이 정치권으로 가기 좋다고 했습니다.”
“누가?”
“전 학생회장이요.”
공부가 싫으니 그렇게라도 직장을 찾으려는 녀석들이었는데, 이제는 실 끊어진 연이나 다름없었다.
‘쯧쯧. 불쌍한 놈들.’
이런 놈들이 세상으로 나가면 이용당하기 딱 좋은 놈들이었다. 그랬으니 전 학생회장에게 그렇게 휘둘렸겠지만 말이다.
“너네, 학점 얼마나 나오냐?”
“네? 2.0인가? 아마 그럴 겁니다.”
공부를 안 하는데, 학점을 줄 교수는 없다.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나 보네.”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학생운동 하느라…….”
눈을 부라리는 성훈을 보며 말을 끊었다.
“학생운동은 왜 하는데?”
정말 녀석들의 말대로 민족과 민주사회 구현을 위해서 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전 학생회장이 정치 쪽으로 연줄이 있어서, 경력을 쌓아야 한다고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녀석이 없지?”
“네, 그렇습니다.”
“계속 학생운동을 할 거냐? 거기에 너희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거다.”
“그건 잘.”
아무 생각이 없는 녀석들이다.
누가 잡아주지 않으면 정말 암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불쌍한 녀석들.
성훈이 말했다.
“학생운동 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한다. 니 인생 니가 사는 거니까. 하지만 내 밑에 있으려면 해야 할 게 있다.
“선배님 밑이라는 말씀은? 그럼 저희를 안 자르실 생각이십니까?”
“다른 애들 공부하느라 바쁘다. 언제 학생회 일을 보고 있겠냐? 구관이 명관이지. 하지만 돌대가리들 있는 건 용납을 못한다.”
둘이 멍하니 성훈을 바라보았다.
‘뭘 어쩌라는 거지?’
“돌대가리가 아니란 걸 증명해라.”
“어떻게요?”
“이번 학기 평점 3.8 이상 받아와라.”
“네? 그런 말도 안 되는?”
“아직 중간고사 시작도 안 했다.”
“그래도 불가능입니다. 출석일수가 모자라서.”
성훈이 둘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불가능? 지랄하네.”
차마 대들지는 못하고 불쌍한 척을 했다.
척도 통할 사람에게 해야 통하는 법이다.
“교수 바짓가랑이를 붙들어서라도 학점 받아와.”
둘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하면, 더 큰 고통을 당할 것을 이미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럼 선배님. 점수를 좀…….”
‘이것들이 어디서 딜을 걸어? 죽을라고.’
회계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히 그런 경우는 없겠지만, 만약 채우지 못하면 내 눈에 뜨일 생각은 하지도 마라.”
둘이 성훈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걸리면 바로 아작 내버릴 테니까 말이야. 알지?”
***
후배들이 원하는 미팅을 허락했다.
경호의 입가에 웃음이 번져 나갔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경호야. 만약에 미팅을 하면 어떻게 할 거냐?”
“그건 아직?”
“저 애들 다 데리고 나갈 건 아니지? 전쟁하는 것도 아니고.”
내 말에 경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몇 명만 데리고 간다고 하면 쟤들이 만족하겠냐?”
“그건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경호의 계획에는 이화여대라는 목표만 있을 뿐, 그에 대한 구체적인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사고를 크게 쳤구나.”
경호가 생각해 보니 성훈의 말이 맞았다.
미팅 안 나가고 싶은 애가 있을까?
제 말마따나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라면?
“어떡하죠? 선배님!”
경호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성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팅 건은 내가 알아서 할 거라고 말해둬.”
***
학생회장의 취임연설이 있었다.
취임연설은 간단하게 끝났다.
“김성훈입니다. 우리 건축과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서 전력 질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관심사는 학과의 미래와 발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학생들 중 하나가 물었다.
“이화여대와의 미팅을 허락하셨다고 2학년 과대에게 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공식적인 일정이 아니었다.
미팅 건이 공식적인 일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좀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지 해서요.”
학생들의 눈이 모두 나를 향했다.
“이화여대의 현주 양과 통화를 해본 결과, 미팅은 한 번만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괜찮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와아아아!”
갑자기 귀가 떨어질 듯한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울이나 경기 지방, 혹은 대학이 많은 곳에서 학교생활을 했던 사람은 이 느낌 절대로 모른다.
울산에는 대학이 하나뿐이었다.
성훈도 예전에 경주 동국대 여학생과 미팅하려고 2시간을 버스를 타고 간 적도 있었다.
‘이 시절엔 나도 여자에 목말라 있었지.’
이 시기의 남자들은-특히나 남자들만 있는 과라면-발정 난 강아지 저리 가라였다.
경주 여자를 만나려고, 2시간을 갈 정도였는데, 무려 이화여대라니!
‘너희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마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은 없다.
운이 좋아 성훈 선배 덕분에 이화여대생이랑 미팅을 했다.
그것으로 ‘끝’이다.
아무런 성취도 없이, 그냥 한때의 추억으로.
‘너희의 추억을 평생 잊을 수 없게 만들어주마.’
후배들을 향해 말했다.
“이화여대 한국무용과와 미팅? 원한다면 몇 번이라도 시켜주지.”
“와! 와! 와!”
아까의 함성은 저리 가라였다.
다른 과에서 봤다면 폭도라고 했을 것이다.
“단 1회당 인원은 10명으로 제한한다.”
“네? 선배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말 폭동을 일으킬 분위기였다.
‘경호 녀석이 너무 바람을 넣었는걸.’
지금 녀석들의 머릿속에는 현주가 하늘거리며 춤추던 장면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나라도 저 시절에는 저랬을 거야. 난 여자 만나러 경주까지 갔는데 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불평하는 녀석들에게 뻔뻔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쩌라고. 현주가 그렇게밖에 안 된다던데.”
물론 현주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내가 먼저 말을 한 것이지.
하지만 직접 전화해서 물어볼 녀석은 없었다.
왜냐고?
현주에게 경호 전화도 받지 말라고 했거든!
너무 한 거 아니냐고?
절대 아니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는 거라고 했다.
철저한 비밀 유지.
그것만이 이 발정 난 녀석들의 역량을 건전한 곳으로 올인하는 결과를 만들 테니까 말이다.
실망하는 녀석들을 위해서 위로의 말을 이었다.
“그 인원들의 선별은 학생회에서 하게 될 것이다.”
한 녀석이 손을 들었다.
“학생회라 하시면?”
“학생회 임원들을 말한다. 나, 총무, 회계…….”
경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있는 서기!”
“그럼 회장이 승인을 해도, 임원들이 반대하면 못하는 겁니까?”
“그렇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 얼마나 합리적인 일 처리인가?
학생들의 시선이 눈앞에 있는 경호를 향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중의 시선이 다시 성훈에게로 향하자, 경호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친구들아. 미안하다. 그냥 회장이 선택한다고 생각하면 돼.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럼 그 선별 조건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연히 학생으로서 해야 할 임무를 잘하고, 학생회에 협조적인 자 우선이다.”
“학생의 임무라고 하면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공부다.”
조금 더 명확한 지침이 필요할 것 같았다.
“평점 3.8 이하는 일단 제외한다.”
꿈도 꾸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린 영혼들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선배님,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잖습니까?”
이 말이 나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히 반박할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미팅, 한번 하고 말 거냐?”
“현주 누님이 몇 번이라도…….”
“처음의 미팅에 나간 녀석들이 덜 떨어지는 짓을 하면 다음의 미팅이 있을 것 같아?”
녀석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게 현주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다음에 또 미팅을 하자는 말을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말이 없었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조금만 더 당기면 확실히 코를 꿸 수 있겠군.’
지금 내게는 어떤 명령이라도 철저히 수행할 수 있는 병사들이 필요했다.
‘어중간한 각오로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다고.’
이왕 나간다면 확실하게 한 획을 그어줘야 했다. 또한 총장에게 다른 과를 끌어들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역량도 끌어들여서라도 목적을 이루겠다는 결심이었다. 물론 상은 우리가 타게 되겠지만.
박람회 말고도, 학과의 역량을 모을 일은 많을 것이다. 특히나 학과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라면 말이다.
건축은 아직은 남자들의 전유물이다.
힘을 모을 수만 있다면 군대 못지않은 단결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걸 집결할 수만 있다면 최강의 학과가 탄생한다.
‘이것도 못하면서 사회에 나가서 무슨 큰일을 할 거란 말이야?’
후배들에게 일갈했다.
“대충 해보고 말 생각이라면 아예 시작을 않는 게 나아.”
그게 박람회든, 아니면 미팅이든 말이다.
멍하게 입을 벌린 녀석들에게 말했다.
“우리나라 여대 중에 세 손가락에 들어가는 곳과 미팅을 한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가 나가서 학교의 격을 떨어뜨리고, 다음의 우리 후배들이 미팅 자리를 망쳐 버릴 것인가?”
‘어때? 대답해 보라고.’
굵직한 함성이 한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아닙니다!”
“이런 내 우려가 쓸데없는 것인가?”
“아닙니다!”
“싫은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싫은가?”
“아닙니다!”
“그럼. 내 제안을 승낙하는 것으로 알고, 사정이 허락하는 한은, 앞으로도 계속 이화여대와의 만남을 지속하도록 노력하겠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갑자기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잠깐, 성훈아!”
성훈보다 한 해 선배였다.
“뭡니까? 선배님?”
“거기 사학년도 포함되는 거냐?”
학우들이 웅성거렸다.
“다 늙은 선배가 염치도 없지.”
“선배님께서 왜 미팅에?”
선배가 외쳤다.
“왜 자식들아! 나도 이화여대 여자한테 장가 한번 가보자. 엉!”
성훈이 말했다.
“자격 조건은 아까 말한 것뿐입니다. 선배님.”
학과의 역량을 모으는 것이라면 성훈은 사람을 가릴 생각이 없었다.
3, 4학년들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고, 1, 2학년들은 긴장의 침을 삼켰다.
선배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만큼 경쟁자가 늘어난 것이다.
그것도 꽤나 건축에 대한 경험이 많은 선배들이 말이다.
달콤한 열매?
쉽게 입안에 넣어줄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왜 동문들 간의 무한 경쟁을 부추기냐고?
당연한 거다.
선의의 경쟁이 뭐가 어때서, 오히려 권장해야 할 것이 아닌가?
선배에 대한 예우?
자격 없는 자가 선배랍시고 나대면, 그것보다 골치 아픈 게 없다.
선후배보다는 각각의 존재의 관점에서, 노력한 자가 영광을 차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솔직히…….
사랑에 선후배가 어디 있고, 행복에 선후가 어디 있는가? 죽음에 선후가 없는 것과 같다.
‘어차피 나 아니면 안 될 미팅. 이왕 시켜줄 거라면 최대한 내 목적에 맞게 사용해 주겠어.’
학과 전체의 업그레이드.
그 시작은 치사하게도, 여자를 미끼로 걸었다.
눈앞에 없는 서울의 얼굴도 모르는 여자들을!
서울 여자들!
눈 감으면 코 베어갈 여자들이다.
울산 촌놈이 촌티 줄줄 흘리면서 갔다가는 근처에 접근도 못하고 퇴짜를 맞을 것이다.
그럴 거라면 퇴짜를 맞지 않을 능력이 되는 녀석이나, 퇴짜를 맞더라도 굴하지 않는 멘탈이 되는 녀석을 데리고 갈 것이다.
‘다음의 미팅을 위해서라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어디 있나?
강철로 된 나무도 아니고!
***
똑똑.
“들어오시게.”
총장은 창가에서 성훈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들어온 사람은 총장의 비서였다.
“총장님, 올해의 건축과는 여느 해보다 역동적일 것 같습니다.”
“흐흐, 그러게 말일세.”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보셨습니다.”
“허허, 황 비서. 왜 그렇게 비행기를 태우나? 얻어 걸린 거야. 얻어 걸린 거!”
“각 과의 학과장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이제 나가시지요.”
“아이고, 그나저나 저 친구 마음에 들게 잘 설득해야 할 텐데.”
황비서가 웃음을 지었다.
“원래 학교야, 총장님이 꽉 쥐고 계신 것 아닙니까? 전 걱정 안 합니다.”
총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학과장들을 설득하는 건 별문제 될 게 없지. 문제는 저 젊은이지.”
“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크크. 그렇지. 저렇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끌고 가는데, 학과장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상식을 넘어갈 거란 말이지. 과연 학과장들이 저 친구의 요구를 맞춰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
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대 최고의 학생회장이 탄생하겠군. 나가세나. 늙은이가 바쁜 친구들을 기다리게 해서야 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