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52화
학생회장(04)
교수실에서 학생회장 선거 때, 붙일 대자보를 만들고 있었다.
드르륵.
경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배님, 뭐하십니까?”
“보면 모르냐. 학생회장 선거 준비한다. 너도 좀 돕지?”
“에이, 선배님.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죠.”
‘염병! 하기 싫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냐?’
얄밉기가 그지없었다.
경호가 변명하듯 말했다.
“중간고사가 다음 달이라고요. 학생의 본분은 공부입니다. 열심히 해서 장학금 타야죠.”
“그래, 좋은 생각이다.”
학생이 공부를 하겠다는데, 더 무슨 말을 하랴!
“대신 애들에게는 선배님 찍으라고 말해두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녀석. 그런데 어쩐 일이냐? 도우려고 온 것도 아닌 것 같고.”
내 물음에 경호가 머뭇거렸다.
“뭔데? 할 말 있으면 해.”
“선배님, 혹시 현주 누님한테서 전화 없었습니까?”
“현주 씨가 나한테? 왜?”
“아닙니다. 그냥요.”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할 소리 있으면 이거나…….”
“아닙니다. 수업이 있어서.”
경호가 쏜살처럼 문을 닫고 사라졌다.
“실없는 녀석. 쯧.”
위이잉.
휴대폰의 진동 소리가 들렸다.
수화기를 여니 현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훈 씨, 다리는 괜찮아요?
“네, 문제없습니다. 현주 씨도 괜찮으시죠?”
그녀에게 용건을 물었다.
-네, 경호가 미팅을 주선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네? 웬 미팅요?”
-우리 과 애들이랑 미팅을 하고 싶다고 해서요.
그녀의 차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까 경호 녀석이 물었던 게 이거였군.’
하지만 내가 미팅을 할 리도 없고, 녀석들은 경호 말마따나 공부를 해야 할 시점이다.
수화기를 든 채 투덜거렸다.
“한창 공부해야 될 녀석들이 서울로 원정미팅이나 갈 생각을 하다니. 이것들을 그냥!”
-하는 짓이 귀엽잖아요. 혼내지 마세요.
‘당신이 몰라서 그래요. 그놈들 여자를 보기만 해도 좋아서 발광을 하는 녀석들인데.’
왜 이런 생각을 하냐고?
내가 딱 그랬거든!
울산에는 대학이 하나밖에 없다.
전문대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무래도 지방이다 보니 여성들의 외모가-화장 기술과 패션을 포함한-서울의 여자들에 비해서 세련됨이 덜했다.
그런 녀석들이 여대 중에서도 탑으로 꼽히는 이화여대생을 만난다고 해보라.
안 봐도 어떻게 될지 뻔하니 말이다.
웃으며 말했다.
“하하, 공부나 하라고 혼쭐을 내주지 그랬어요.”
-아뇨. 저도 그냥…….
“그냥 뭐요?”
-귀여운 부탁이라서 들어주고 싶었어요.
“그럼 하시면 되죠. 뭘 고민하세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살아 야죠. 한 번뿐인 인생인데.”
-어쨌거나 성훈 씨한테 물어보겠다고 했어요.
“저한테요? 왜?”
-당신이 주선자로 나왔으면 해서요.
“그건 또 왜요?”
-경호가 얼마나 자랑을 했다고요. 당신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를. 그 정도는 돼야 저도…….
현주가 망설인 부분이 무엇인지, 대략 감이 왔다.
미팅을 구실로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은 것이리라. 물어보진 않았지만 여대 측의 주선자로는 현주가 나오겠지.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바빴다.
학생회장 선거와 중간고사가 코앞이었고, 한 교수의 논문도 거의 막바지였다.
내 안의 김성훈이 물었다.
‘현주 정도면 괜찮지 않아? 꽤나 미인이고, 성격도 집안도 모두 괜찮은 것 같은데, 뭘 그리 비싸게 굴어!’
김성훈의 투덜거림을 단칼에 잘랐다.
‘바빠. 내가 지금 미팅이나 하려고 서울까지 올라간단 말이야? 미쳤어?’
지금은 연애를 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아쉽네요. 정말 기분 좋은 제안이기는 한데, 지금 당장은 어렵겠네요.”
-왜요?
그녀에게 내가 바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읊었다.
현주의 아쉬운 한숨 소리가 들렸다.
‘너무 대놓고 거절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그녀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후. 그렇게 바쁘다면 어쩔 수가 없네요. 하지만 아쉬워요. 경호도 많이 좋아했을 텐데.
서로에게 안부 인사를 하며 전화를 끊었다.
‘녀석. 날 떠보러 왔었군.’
***
저녁에 경호가 나를 찾았다.
“선배님, 현주 누님께 미팅을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응. 바쁘다. 학생회장 선거 준비하랴, 공부하랴. 내가 한가하게 미팅할 시간이 어디 있냐?”
“선배님은 주선만 하시면.”
“주선만 해도 서울은 가야겠지? 아니면 네가 그 애들 여기까지 불러올래?”
“그건 좀. 만나 주기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그러니까 나는 시간이 없다고. 내가 후배들을 위해서 내 시간을 버리랴?”
그 말을 하는 중에는 나는 선거용 현수막을 만들고 있었다.
그걸 보던 경호가 물었다.
“선배님, 그런데 왜 갑자기 학생회장은 왜 되려고 하시는 겁니까?”
“너, 2학년 과대지?”
‘차후 녀석의 협조도 필요할지 모르겠군.’
성훈은 박람회 건을 이야기했다.
총장의 제의라는 것만 빼고 말이다.
‘뭐, 어때. 나중에 박람회 포스터가 붙으면 모두 알게 될 텐데.’
녀석이 물었다.
“그럼 일단 선거가 최우선 과제네요.”
“녀석, 심각하기는. 네가 뭘 걱정 하냐? 내 일인데.”
경호가 물었다.
“선배님, 만약에 회장이 되지 못하면 박람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 좀 귀찮기는 하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모아 봐야지.”
경호가 생각에 잠겼다.
“선배님은 거기에 무조건 참가하실 생각이시죠.”
“당연하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참가한다.”
이건 나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학교를 위해서도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구조대전 대상이 개인의 영광이었다면 총장이 말한 박람회는 학교 전체의 위상을 올리는 것이었다.
학교의 위상이 올라가면 그 자체로 백그라운드가 된다. 전통이 그래서 무서운 것 아니겠나?
무슨 생각인지 경호가 두 팔을 걷어 붙였다.
“제가 돕겠습니다. 선배님.”
“됐거든. 다 했어. 나가 봐.”
“아니, 이거 말고 선거 말입니다.”
“네가 왜?”
“돕도록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왜? 미팅 때문에?”
정곡을 찔렸음인가? 녀석이 허둥거렸다.
“당연…… 히 아닙니다. 전 원래 선배님을 도우려고 했습니다.”
“흐음,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며.”
“학생이라고 공부만 하겠습니까? 교우관계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호를 보며 턱을 긁적였다.
‘속이 훤히 보이는걸.’
“일단 학생회장이 되시고 나면 그 뒤의 일은 훨씬 수월해질 것 아닙니까?”
그 말을 하는 녀석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당연한 거지. 내 일에 딴죽을 거는 것들이 사라질 테니까.”
“그럼 시간적 여유도 생기실 게 아닙니까?”
경호에게 넌지시 말했다.
“미팅은 안 한다고 현주한테 이미 말했다.”
“헤헤, 선배님. 그건 제가 현주 누님하고 따로…….”
너스레를 떠는 녀석이 귀여워 보였다.
‘딱히 녀석들의 미팅을 말릴 이유는 없지.’
“왜 그렇게 미팅이 하고 싶은 거냐?”
“선배님, 그건 모든 남자의 로망이라고요.”
“뭐가? 미팅이?”
“그 상대가 이화여대라고요. 한국무용과.”
“그런데. 그게 뭐 어째서.”
“이건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기회란 말입니다.”
경호가 말을 이었다.
“현주 누님이랑 말했을 때, 누님은 굉장히 긍정적이었다고요. 거의 다된 밥이었는데. 크윽!”
경호를 보면서 웃었다.
“크, 니들이 보기엔 내가 훼방 놓는 것처럼 보이겠다. 그치?”
내 말투가 살짝 꼬이는 것은 느꼈던지 경호가 꼬리를 말았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런 기회도 선배님께서 누님을 구해주신 덕에 기회가 생겼는데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헤헤.”
“경호야. 이번 선거 어렵지 않겠냐?”
나는 지난 삶에서 선거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경호가 되물었다.
“왜요? 전 낙승이라고 봅니다만.”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냐? 작년에 학생회장이랑 붙었던 녀석도 나온다고 하던데, 박빙이라고 하지 않았어?”
경호가 코웃음을 쳤다.
“에이, 제가 작년에 투표 집계했습니다. 전체 투표율이 30%도 채 안 나왔습니다. 선배님.”
“그러냐?”
작년의 나는 학생회장 선거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나온 후보들이 모두 운동권 학생이었고, 그들의 관심은 건축과의 발전이 아니었다.
반면, 경호는 선거의 유경험자였다.
‘누가 되든, 그 나물에 그 밥인데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지.’
경호가 말을 이었다.
“말이 박빙이지, 그냥 자기들 밥그릇 나눠 먹기였습니다.”
녀석이 확신하며 말을 이었다.
“선배님 정도 커리어면 충분합니다.”
“쩝.”
경호가 나보다 더 열정적이었다.
‘이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야 하나?’
“선배님, 저를 선거위원장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그런 감투라도 하나 있는 게 낫겠지.”
뭐, 어떠랴. 돕겠다고 나서는데.
‘후배의 순수한 열정을 몰라주면 안 되겠지.’
경호가 나가면서 각오에 한 한마디를 했다.
“선배님, 내일부터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
한 교수실 앞 복도가 바글거렸다.
“비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한 교수의 입이 떡 벌어졌다. 복도를 채운 아이들을 헤치고 나서야 겨우 자신의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 교수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이게 뭔 일이냐?”
“성훈 선배님을 학생회장으로 만들기 위한 선거위원회입니다.”
“너는 누군데?”
“안녕하십니까? 한 교수님. 2학년 과대 이경호입니다.”
“그런데?”
“학생회장 선거를 위해서 모인 겁니다.”
“성훈이는 어디 갔냐?”
“수업 들어가셨습니다.”
한 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논문 쓰기는 다 틀렸네. 밖으로 나갈까’
창밖을 바라보는데, 하늘이 쾌청했다.
한 교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크흠! 경호야. 오늘 날씨 좋다. 그치?”
꽃피는 춘삼월 날씨가 얼마나 좋으랴?
경호가 힘차게 말했다.
“네, 정말 날씨가 좋습니다.”
한 교수가 눈썹을 으쓱이며 웃었다.
“책상 하나 들고 나가서 하는 게 어때?”
“왜요?”
“성훈이 오면 시끄럽다고 지랄할 텐데. 너 감당할 자신 있어?”
“네? 그건…….”
한 교수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곧 오겠네.”
몰려 있던 학생들이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100여 명의 학생이 잔디밭에 둘러앉았다.
경호가 물었다.
“왜 이리 숫자가 적어?”
“1, 2학년 A조 수업 중이라 그래. 빨리 하자.”
“좋아. 그럼 후보들의 인지도에 대해 알아보자.”
“성훈 선배님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흠, 그렇군.”
경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상대 후보가 누군지 아는 사람?”
“몰라. 수업에나 나와야 알지. 선거 운동할 때나 인사하러 다니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
“흠, 그럼 인지도. 문제없고.”
경호는 가져온 종이에 체크를 하면서 다시 물었다.
“그럼 성훈 선배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홍보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냐?”
“이미 믿을 만해! 너 같으면 거기서 사람 안고 뛰어내릴 수 있냐?”
다른 학우가 얼굴이 벌게지며 말했다.
“그거야 현주 누님 같은 미인이면 나도…….”
“그래도 정도가 있는 거야! 죽을 수도 있었다고.”
경호가 체크를 하면 흥분한 좌중을 진정시켰다.
“됐고. 어쨌거나 믿을 만한 건 사실이란 거지. 그럼 능력 면에서는 어때?”
“더 말할 거 있냐? 이번 신입생들 중의 절반 이상은 에펠탑에 꽂혀서 왔어. 그리고 구조대전 대상이 있잖아. 더 볼 거 없고, 과대!”
“왜?”
“미팅은 어떻게 됐어? 성훈 선배님이 오케이 하셨어?”
“아이 씨. 잘 나가다가 왜 그래? 선배님 앞에서 그 이야기 꺼내지도 마. 일단 결과로 보여주자고. 우리도 믿을 만하다고 말이야.”
***
참모가 말했다.
“이번 선거는 선배님이 낙승을 하실 겁니다.”
“당연하지! 구조대상 그딴 게 뭐 그리 중요하냐? 공부벌레가 이런 판에 끼어든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상대 후보가 물었다.
“저거 뭐냐?”
그가 가리킨 잔디밭에는 경호를 중심으로 100명이 넘는 학생이 모여서 이야기 중이었다.
참모가 돌아와서 말했다.
“선배님! 큰일 났습니다.”
“왜?”
“저거 다. 성훈이란 선배 편인 모양인데요?”
후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우리 과 정원이 몇 명이었지?”
“한 삼, 사백 명쯤 되겠죠?”
“사학년들 빼면?”
“아마도 이삼백 명쯤 될 걸요.”
“이거 어떡하냐? 어렵겠는데.”
이미 투표 인원의 1/3이 상대방에게 몰려 있었다.
고민하고 있을 때, 참모가 말했다.
“선배님, 수업 끝나면 백 명 정도 더 올 거랍니다.”
그 말에 후보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건 애초에 게임이 안 되잖아.”
“쩝, 그러게 말입니다. 그동안 고민했던 공약이랑 전략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됐습니다. 선배님, 이번에는 포기하시죠.”
후보가 역정을 냈다.
“이번에는? 나 4학년이야. 임마!”
다음 기회? 당연히 없었다.
전 학생회장이 자퇴서를 낸다고 했을 때, 그는 쾌재를 불렀다. ‘하늘이 나를 돕는 구나’ 하고 말이다.
이름도 모르던 선배가 나온다고 할 때, 직감을 했었다. 일방적인 승부가 될 거라고 말이다.
‘선거는 인지도라고! 아무리 바보라도 아는 사람을 찍게 되어 있어.’
작년에 떨어지기는 했지만 자신 외의 당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다 틀렸어!”
후보가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를 달래야 할 참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방적이기는 하네요. 이거야 원.’
뚜껑을 열기도 전에 뭐가 들어있을지 알면 승부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남은 건 아름다운 퇴장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