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46화
MT(08)
현주의 가방을 들어주며 감사의 말을 건넸다.
“부담스러웠을 텐데,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가 고맙죠.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인데도 걱정해 줘서요.”
그 말을 하면서 내 옆을 걸어가는데, 그녀의 옆모습에서 옅은 미소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오지랖이 넓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내가 생각해도 이번 일은 오지랖이었으니까.’
지난 삶의 나였다면 모른 척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인데. 굳이 비난받을 각오까지 하면서 남 좋은 일을 할 내가 아니었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눠본 바, 현주라는 여자는 굉장히 여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말투에서 살짝 단아함이 묻어나온다고나 할까?
아까 미현을 다룰 때에도 강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언니가 동생을 달래는 분위기를 풍겼었다.
“그런데 여자들끼리 이런 곳에 놀러 오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음……. 가끔씩 일탈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지금이 그런 시기인가 봐요.”
그녀들이 묵고 있는 펜션을 보며 말했다.
“그런 곳치고는 너무 위험한 곳을 골랐어요.”
“모르고 왔으니까요.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아쉬운 듯 뒤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예쁘잖아요.”
파랑색의 작고 아담한 복층 건물.
예쁘긴 하네.
“그래요. 좀 더 튼튼하기만 했어도. 아쉽네요. 친구들끼리 여행을 망치게 돼서. 혹시 제 제안 때문에 의 상한 건 아니죠?”
걱정하는 내 말에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매번 만나면 다투고, 안 보면 보고 싶고 하는 그런 사이인 걸요.”
“마음 상하는 일이 뭔지 모르겠지만,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네요.”
“아뇨.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얘들이 오버하는 거예요.”
우리 대화에 경호가 끼어들었다.
“누님, 저희 저녁 먹고 장기자랑하면서 놀 건데, 같이 오시죠?”
“경호야. 그건 다음에 하자. 쉬러 오셨단다.”
그럼에도 경호는 간절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현주가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런 분위기에서 털어버리는 것도 괜찮죠. 우리가 언제 이런 애기들이랑 놀아 보겠어요.”
경호에게 경고의 눈빛을 쏘아 보냈지만, 녀석은 내 눈을 피하며 도망가 버렸다.
“감사합니다. 누님.”
‘녀석!’
***
분위기를 내기 전에 내가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학우 여러분, 오늘 눈이 많이 옵니다.”
“네, 그렇습니다. 분위기 좋습니다.”
“그 분위기를 타서, 술 많이 마시면 나한테 죽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일단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야 했다.
술이 들어가면 통제하기 어려운 녀석들이니까.
“선배님, 그래도 오늘 같은 날…….”
마이크를 끄고 말했다.
그럼에도 내 목소리는 강당 끝까지 울려 퍼졌다.
“정신 못 차리고 술 많이 마셔서 혀가 꼬이거나, 혹은 여기 계신 숙녀분들께 무례한 행동을 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놈은 물론, 주변에 있는 녀석들에게까지 연대책임을 묻는다. 알겠나?”
후배들의 야유 어린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몇 녀석을 지적하며 말했다.
“너, 너, 너. 얼굴 기억했다. 특별히 지켜보겠어.”
지적당한 녀석들이 황급히 얼굴을 숙였다.
“술 취해서 정신 나간 놈은 나랑 일대일로 면담하는 영광을 안겨 주겠다. 아마 죽을 때까지 오늘의 MT를 잊지 못할 거다.”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자신 있는 놈은 마셔라. 알았어?”
“조심하겠습니다, 선배님.”
“술 안 먹고도 충분히 재미있게 놀 수 있다는 걸, 여기 숙녀분들께 보여주는 거다. 알겠나?”
살짝 군대식 분위기가 나는 것은 좀 보기 좋지 않았지만 뭐 어떤가?
무슨 사고가 생길지 모르는 오늘 같은 날, 술에 취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말을 마친 후, 2학년 과대 경호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경호가 눈치 빠르게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런 고로 오늘 음주는 맥주 한 병으로 제한합니다. 불만이 있으신 분들은 직접 읍내로 나가시길 권합니다.”
한 녀석이 소리쳤다.
“나가지 말라는 소리잖아. 당장 얼어 죽을 텐데.”
경호가 피식 웃었다.
“알아들었으면 됐어. 그럼 MT 이틀째 밤을 시작합니다.”
본격적인 장기자랑이 시작되었다.
심사위원으로는 여자 다섯 명이 앉아 있다.
공정한 심사를 위한 외부 인원이 필요하다면서 경호가 현주를 꼬드긴 결과였다.
사회를 맡은 경호가 말했다.
“본격적인 장기자랑을 시작하기 전에 놀라운 소식 하나 알려드립니다. 심사위원을 맡으신 고현주님께서는 이화여대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하셨습니다.”
“와아!”
짐승 같은 남자들의 환호가 울려 나왔다.
경호가 분위기를 살린다.
‘녀석. 잘하는데.’
“심사를 하시는 분들의 실력을 알아야 공정한 심사를 한다고 신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와아! 맞습니다. 과대. 잘한다!”
녀석들이 엄지를 쌍수로 치켜 올리며, 경호의 분위기에 호응했다.
“그럼. 여러분의 성원의 힘입어, 용기를 내어 부탁드려 보겠습니다. 현주 누님, 부타케요.”
이덕화 아저씨 흉내를 내며 손짓했다.
현주는 슬며시 웃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한 모양이네.’
당황하거나 긴장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동생들과 같이 놀아주는 누나 같은 얼굴로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호가 당황하자 오히려 나일론 박수를 치면서 경호를 유도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박수가 없었군요. 박수!”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짝!
비록 한복은 입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춤사위는 아름다웠다.
어깨에서 팔꿈치를 넘어 손가락 끝까지 이어지는 움직임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눈을 반개하고 빙글빙글 턴을 돌 때는 그녀의 향기가 강당을 가득 채우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했다.
‘와!’
나 또한 입을 떡 벌리고, 그녀의 춤사위를 감상했다. 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나조차도 감히 감상평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춤사위였다.
허공을 휘휘 돌던 그녀의 팔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허리께를 지나가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가 부드럽게 접혔다. 나머지 한 손은 가슴에 올린 채.
끝났다는 인사였다.
“경호야. 진행 안 하냐?”
번쩍 정신을 차린 경호가 입가를 훔쳤다.
“후릅.”
나머지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녀석들아. 입 닫아라. 파리 들어간다.”
‘이런 망신이.’
이런 걸 본 적이 있어야 내성이 생기지.
하지만 정신을 차린 녀석들이 입을 닫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앵콜! 앵콜!”
사태를 진정시켜야 할 경호마저도 앙코르를 외치고 있었으니, 지금의 분위기를 말로 설명할 필요가 있으랴!
‘상태를 보고해야지. 지금도 이마에 땀이 고여 있구만. 어쩔 수 없군. 강제 진행이다.’
“주목!”
내 목소리가 강당의 끝까지 퍼져 나갔다.
“우!”
한 녀석을 주목하며 불러내었다.
“너. 나와.”
“네, 선배님.”
“지붕에 올라가서 학회장들 일 잘하고 있는지 감시해라. 위에 있는 놈 내려오라고 하고.”
“네?”
“당장!”
놈이 죽을상을 지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또 가고 싶은 녀석은 야유해라. 빈자리 많으니까.”
야유와 앙코를 소리가 쏙 들어갔다.
경호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다소 강압적인 진행이 이어졌다.
“일번 올빼미 나온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녀석들이 알 리가 있나?
그래도 눈치 있는 몇몇이 첫 번째 순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녀석이 부리나케 튀어나왔다.
“동작 봐라. 복명복창 안 하지?”
“일, 일번 올빼미.”
“어허, 옥상으로 가고 싶나?”
“아, 아닙니다.”
“들어간다.”
후다다닥.
“일번 올빼미.”
“네, 일번 올빼미!”
이번에는 ‘미’ 소리가 끝나기 전에 자리에 섰다.
“목소리 그것밖에 안 되나? 앉아. 일어서.”
병영의 흔한 얼차려지만, 그걸 시킨다고 한다는 것이 웃겼던 모양이다.
현주와 몇몇이 큭큭대며 웃었다.
물론 그걸 당하는 일번 올빼미는 초긴장 상태지만 말이다.
몇 차례의 ‘앉아 일어서’가 끝난 후 다시 물었다.
“목소리 그것밖에 안 되나?”
“아닙니다!”
강당이 쩌렁쩌렁 울렸다.
“전방에 5초간 함성한다. 시작!”
평소 군대에서 행해지는 발성을 시작으로 자리가 정돈되어 갔다.
“노래 일발 장전.”
“노래 일발 장전!”
“발사.”
“발사!”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경호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일번으로 나온 녀석은 제 역할을 충분히 했다.
지르박 박자에 맞춰서 트로트를 부르면서 심사위원들에게 충분히 매력을 어필했다.
심사위원들에게 윙크까지 날리면서 말이다.
‘생긴 건 우락부락한 놈이. 제법 하네.’
평점 7.5
미현만 4점을 주고, 나머지 4명은 상당히 고득점을 주었다.
박수를 받으며, 녀석이 자리를 물러났다.
경호가 진행을 계속했다.
“이번 올빼미.”
내가 한 것에 약간의 애드리브를 섞으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아까 옥상으로 올라갔던 녀석이 내려와 말했다.
“선배님, 학회장 선배들 기절했습니다.”
***
학생회장은 무리한 제설 작업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었다.
성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이렇게 약해서 무슨 일을 하겠다고. 나약한 녀석들.”
회장의 감은 눈이 꿈틀거렸다.
‘오전 10시부터 12시간 동안 쉬지도 못하고 눈을 쓸었다고. 크흑.’
1학년 과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저희가 눈 쓸겠습니다.”
기특한 모습이었지만, 성훈은 다른 지시를 했다.
“됐어. 한 시간마다 올라와서 소금이나 뿌려라.”
“네? 소금을 뿌리라고요?”
“응. 염화칼슘이 있으면 좋겠지만, 소금도 비슷하게 눈을 녹이니까. 한 시간마다 빼먹지 말고 뿌려. 눈 녹으면 자연히 흘러내릴 거야.”
과대가 물었다.
“선배님, 그럼 애초부터 소금을 뿌리면 됐을 거 아닙니까?”
회장은 반쯤 기절한 상태에서도 이유를 알고 싶었다.
‘질문 잘했다. 도대체 왜?’
“소금이 남아도냐? 얼마나 눈이 올지도 모르는데. 저것들한테는 소금도 아까워.”
성훈이 말을 이었다.
“저것들 따뜻한 곳에 처박아둬. 좀 있다가 눈 뜨면 다시 눈 쓸게 해야 하니까. 군기가 빠져가지고.”
내일 아침에 있을 중노동을 생각하는 것인가?
학생회장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젠장. 더러운 놈한테 걸렸다.’
***
다시 들어가니 아직도 흥겨운 분위기였다.
후배 하나가 말했다.
“좀 있으면 선배님 차례십니다.”
“요즘 무슨 노래 유행하냐?”
“선배님, 완전 공부만 하셨나 봅니다.”
‘크크, 그게 아니다. 이 녀석아.’
아직 나오지도 않은 걸 부르면, 나 작살난다고. 십몇 년 전에 어떤 노래가 유행했는지, 무슨 수로 기억을 할 것인가?
‘참. 어이없는 곳에서 조심을 해야 하네.’
이번 삶에서는 한동안 공부만 했고, 방학 때는 외국 나가기 바빴으니, 국내 음악 차트는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Here I Stand For You’라는 노래 아냐?”
모른다고 하면, 외국 팝송이라고 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말이다.
“‘넥스트’ 노래잖아요. 저 그 노래 굉장히 좋아합니다.”
다행이다. 나온 노래라서.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을 텐데, 용케 아네.”
“제가 과내 그룹사운드 동아리 회장입니다.”
“우리 과에 그런 게 있었어?”
“헤헤, 비공식입니다. 제가 음악에 미쳤거든요.”
“그럼 건축과는 뭐 하러 들어왔냐? 음대로 갈 것이지.”
“제 마음에 쏙 드는 음악당 하나 만들고 싶어서요.”
참. 대단한 배짱이 아니질 않나!
작은 꿈 하나 간직하고 세상을 살다보면, 기나긴 인생에서 그것 하나 정도는 이루지 않을까?
‘문제는 그 꿈 하나가 없다는 거지.’
너무 기특해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좋은 꿈이다. 잘해봐라.”
몇 차례가 지나가고, 녀석이 말했다.
“이제 선배님 차례이십니다.”
이번 삶에 처음으로 불러보는 열창이었다.
김동률의 소풍이야, 이런 노래가 아니지 않던가.
‘아, 오랜만에 목 풀었네.’
점수는 8.0을 받았다.
‘젠장 할! 성미현. 0점을 주다니.’
다른 녀석들에게는 그래도 5점은 주더니.
미현이 나를 골려대듯 보면서 웃었다.
‘아오, 약 올라.’
자리로 돌아오자, 아까의 녀석이 맥주 한 잔을 들이밀었다. 이름은 청수라고 했던가?
“선배님, 목청 죽이십니다.”
‘내 목소리가 크기는 하지.’
“음성도 매력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 칭찬을 하는 거지?
음악당이라도 하나 설계해 주랴?
“부탁이 있습니다. 선배님.”
갑자기 부탁이라니, 녀석을 돌아봤다.
“무슨 부탁?”
녀석은 제법 진지했다.
“저희 그룹사운드 보컬 좀 맡아주시면 안 됩니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됐다. 일없다.”
그 일 아니라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보컬은.
“선배님…….”
“자꾸 그러면 너도 옥상으로 올려 보낸다.”
“그래도 한 번 고려를…….”
“쓰읍!”
녀석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
“선배님, 큰일 났습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후배들이 뛰어 들어왔다.
옥상에 소금을 뿌리러 올라갔던 녀석들이었다.
“뭔데, 이렇게 호들갑이냐?”
“저쪽 펜션이 이상합니다. 소리도 나고.”
“뭐?”
언젠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