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38화
스타타워 프로젝트(04)
“김 비서, 이만 일어나도록 하지.”
사장은 성훈과 양 부장이 이야기를 하러 회의실에 들어간 사이에 조용히 일어났다.
“사장님, 직원들을 안 만나셔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군.”
사장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에서 만남을 가지기도 어색했으리라.
하다 보니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보다 오너에게 민망한 상황이 있으랴!
비서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
“할 이야기란 게 뭔가?”
“일단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양 부장님께서는 저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양 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디자인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런 면이 있지.”
“저도 그 부분을 말씀드리는 거죠. 그래서 말인데, 만약 팀을 만들게 된다면 프로젝트 팀을 양 부장님께서 맡아주십시오.”
지금 노 과장은 아까 성훈과 한 이야기를 박 부장에게 말하고 있을 터였다.
“가능할까? 아직 승부도 마무리 짓지 않았는데, 최 이사 반발이 만만치 않을 거야.”
“그렇겠죠. 그분도 실적이 걸려 있는 문제니까요.”
양 부장이 수긍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님, 원래대로라면 부장님과의 승부를 마무리 지어야겠지만 제게 시간이 많이 없습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직원이 아닌데, 회사의 일에 너무 개입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굳이 승부를 하지 않아도 더 안전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택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제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부장님, 일단 프로젝트팀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구조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세부 설계에 들어가야 할 겁니다.”
양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겠지.”
“그때는 전기, 공조, 설비 등 건축설계의 전반을 아우르게 될 겁니다.”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의도는 좋지만 그런데 굳이 프로젝트팀까지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새 건물에는 새 공법을 넣어야지요. 그런데 이사님들이 하려 할까요?”
내 말에 부장이 슬며시 웃음 지었다.
“새로운 공법으로 건물을 지으니, 그 안에 들어가는 것들도 그에 준하는 새로운 걸로 설치를 하자? 그거지?”
건축학도라면 누군들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고 싶지 않을 것인가?
“최 이사님 같은 분들이 또 계시면 여전히 똑같은 공법을 반복해야 할 것 아닙니까? 설계 2팀에서 사장시킬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도면처럼요.”
양 부장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사람들도 그게 일이니까.”
“하지만 곽 이사님이 진행을 한다고 해도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양 부장님께서 팀을 맡기고 싶습니다.”
양 부장이 난감한 듯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설계 2팀에는 박 부장이 있지 않나?”
“물론입니다. 하지만 박 부장님 성격으로 곽 이사님과 최 이사님을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흠…… 어려울 거야.”
“그래서 저는 양 부장님을 추천했습니다. 부장님이라면 최 이사와 곽이사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충분히 디자인을 소신껏 진행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팀을 꾸린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독립성이 부족해서는 아무래도 휘둘릴 수밖에 없어. 난 오로지 그 사람들의 불만을 막아내는 데만 신경을 써야 할 거야?”
“만약 양 부장님이 이사가 되면 어떻겠습니까?”
“하하. 이 친구야.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할 나위가 없지. 하지만 회사라는 게 자기 생각처럼 돌아가는 곳이 아니야.”
“그럼. 제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양 부장이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럴 정도의 힘이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현재에서 정 안 된다고 하면 계약파기 건을 들이밀어서라도 관철을 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고 쳐도 자네에게 이득되는 것은 뭔가?”
‘지금부터는 말을 잘해야 해.’
“저는 학교를 졸업하면 현재에 들어올 생각입니다.”
“좋지. 자네 같은 재원이 온다면 언제든지 환영일세.”
“하지만 저는 회사원으로 취직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에 여기로 들어오는 것인가?”
“제가 하고 싶은 일에 현재가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현재라는 잘 갖추어진 조직이 필요한 겁니다.”
양 부장이 웃었다.
“그 꿈이라는 것이 뭔가?”
“아직은 말씀을 드릴 때가 아닙니다. 준비가 덜되었거든요.”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은 뭔가?”
“저는 그때를 위해서 준비를 하고 싶은 겁니다. 처음에 입사한 신입이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내 말을 듣고 양 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도면 그리는 법부터 새로 배웠지.”
“그때 양 부장님께서 저를 밀어주셨으면 합니다.”
양 부장은 나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내 말이 진심인지 확인하려는 거겠지.’
나도 지지 않고, 양 부장을 쳐다보았다.
“뭔지 모르지만 재미있는 일이겠지. 좋아. 밀어주지.”
“하지만 부장의 힘으로는 한계라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양 부장님이 이사가 되셨으면 합니다.”
“이 사람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거라면 벌써 했겠지.”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어떻게?”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이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를 밀어주신다는 약속 지킬 수 있습니까?”
“좋아. 그렇게만 된다면 자네가 무엇을 하든 밀어주도록 하지.”
이 이야기를 하면서 곽 이사를 떠올렸다.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내가 예상하는 곽이사라면, 아예 하지 않거나 혹은 내게 빚을 지워 두려고 할 것이다.
‘왜냐고? 당장 자신에게 이득되는 것은 아니니까.’
요 며칠 승부를 진행하는 동안, 그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최 이사와 마주치기가 싫든지, 아니면 승부가 패했을 경우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이제 승리를 했으니까, 슬쩍 얼굴을 비추지 않을까? 생색을 내기 위해서?
‘그 전에 찾아가야지.’
그리고 양 부장을 이사로 만든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곽 이사는 양 부장을 경계할 것이고, 나에게 빚을 지우는 것이 이득인지, 경쟁자가 생기는 것이 이득인지를 계산하게 될 것이다.
‘고민이 길면 일이 성사되지 않는 법이지.’
그럼에도 이사가 될 거라고 예상하는 것은, 일을 제대로 하려면 그 일에 대한 권한이 필요하다.
부장이 할 수 있는 일의 경계와 이사의 영역 사이에는 명확한 선이 그어진다.
‘사장이 정말 프로젝트팀을 만들 생각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양 부장을 이사로 승진시킬 거야.’
내 나름대로의 확신이었다.
***
“곽 이사님, 프로젝트팀을 만들고 싶습니다.”
뜬금없는 성훈의 말에 곽 이사의 미간에 고민이 어렸다.
의도를 파악하려 성훈을 바라본다.
‘곤란하네. 안 들어주자니 후환이 두렵고, 들어주자니 의도를 모르겠어.’
양 부장의 승진 건을 제외하고 모두 곽 이사에게 이야기했다.
곽 이사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지금 당장의 실적과 승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내게 도움도 전혀 안 되는 팀은 내가 왜 만들어.’
하지만 성훈이 누구이던가?
그의 눈에 성훈이 팔에 찬 시계가 들어왔다.
척 봐도 초고가의 시계였다.
성훈이 몸에 두른 단 하나의 사치품이었다.
“그 시계는 못 보던 건데…….”
성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동안 작동만 잘되면 좋은 시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차고 있는 시계는 달랐다. 무게도 착용감도, 모든 면에서 말이다.
“아, 이거 압둘이 준 겁니다. 비행기 타고 갈 때, 그 경호원들이 주더라고요. 압둘의 선물이라고. 값도 꽤 나가요.”
곽이사가 성훈을 보며 말없이 웃음 지었다.
그가 알기로 대체로 압둘의 선물이란 가볍게 억을 넘는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자신도 저 시계의 값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 압둘이 얘기했었던 스포츠카와 비슷한 가격대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저게 값이 꽤 나가? 미쳤군!’
순간 약이 올랐다.
‘누구는 환심을 사려고 몇 년 동안 개고생을 했는데, 이 인간은 낙타 물통 하나 만들어주고는 몇 억을 챙기네. 아이고, 배 아파.’
곽 이사는 쓰린 속을 달래며 말했다.
“성훈 군, 지금 당장은 곤란하다네.”
그렇지만 성훈의 부탁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이럴 때 신세를 한 번 지워놓으면 나중에 나를 밀어줄 거야. 하지만 한 번에 들어주면 사람이 가치 없어 보이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회사 사정이 좋지를 않다네. 일단 심각하게 재고를 해보도록 하지.”
“결정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성훈은 데이터베이스 건은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곽 이사는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강요를 할 것이고, 데이터베이스 건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더 중요한 것은 프로젝트 팀을 만드는 것이었다.
‘방학도 끝나 가는데, 빨리 믿을 만한 팀을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게 이득이지.’
***
“곽 이사, 뭐 할 말 없어?”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무님.”
“자네 팀에서 무슨 말 나온 것 없냐고?”
‘혹시 성훈의 정체를 알아챈 것인가?’
“그것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
‘이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황 전무가 짜증 내면서 말했다.
“확인은 무슨 확인? 지금 나하고 장난치나? 자네 팀에서 프로젝트팀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면서! 왜 내가 그걸 사장님한테 들어야 하는 건가? 자네 지금 일부러 날 물 먹이는 건가? 사우디 왕자가 밀어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
곽 이사의 표정이 풀어졌다.
“아, 그거 말씀이십니까? 저도 어제 이야기를 들었던 겁니다. 좋은 제안이었지만, 사장님께 올리려면 좀 더 구체적이어야겠기에 기안서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들고 있던 다른 결재서류를 황 전무에게 들이밀었다.
황 전무는 곽 이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냥 웃을 일이 아닐 텐데, 프로젝트팀을 만들면 양 부장 승진한다는 거 알고 한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사 설계 자체를 그 팀에서 독자적으로 한다는 건데, 부장급으로 진행할 수 있겠어? 당연히 이사로 승진시켜야지.”
“그건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일부러 경쟁자를 키워준 꼴이 되었다.
‘미운 개새끼들 사이에서 따돌림 받던 고양이가 알고 보니 사자였다’라는 느낌이랄까.
곽 이사의 얼굴에 난감한 기운이 어렸다.
황 전무가 또다시 짜증을 냈다.
“일단 내놔! 바로 결재 올려야 돼. 일이 꼬였어. 사장님이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지실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내 판단 오류였어.”
***
“양 부장님, 아니, 이제 이사님이신가요?”
“박 부장, 우리 멋있게 이 프로젝트를 끝내 보자고.”
양 부장을 필두로 하는 프로젝트 팀이 만들어졌다.
물론 ‘스타타워’ 홍보에 대한 것은 사내 홍보팀에서 따로 진행하기로 했지만, 적어도 설계에서만큼은 다른 이사들의 간섭을 받지 않게 되었다.
나는 프로젝트팀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고 서울을 떠났다.
혜주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성훈 씨, 열심히 공부해서 꼭 현재에 입사해요. 그때는 제가 선배니까, 잘해줄게요.”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그녀의 위로를 받으며 말했다.
“네, 알았어요. 꼭 현재에 입사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양 부장과의 2차전은 프로젝트팀이 만들어지면서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최 이사는 닭 �i던 개꼴이 되었고, 나를 물리치기 위해 빼들었던 양 부장은 최 이사와 동급인 이사가 되었다.
***
“김 비서, 자네가 보기에 황 전무 어때 보여?”
“이번 프로젝트팀 건은 밑에서 보고가 늦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전반적으로 일처리가 매끄럽고 부하들을 관리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너무 일찍 자리를 잡아서 해이해진 건 아니고?”
“그렇게 급하게 진행시키지 않아도 되는 건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이번 프로젝트 팀 안건은 사장이 좀 다급하게 진행하는 느낌이 있었으니, 황 전무 쪽에서도 정신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겨우 반년인데 벌써 자리를 잡은 건가?”
“네, 서 전무 측의 이사들을 많이 포섭했더군요.”
“아냐. 해이해졌어. 쯧. 긴장 좀 시켜야지. 딴생각들 못하고 일만 하게 말이야.”
김 비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 전무가 알래스카로 떠난 지 얼마나 되었더라?”
“이제 6개월이 약간 넘었습니다.”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정도 고생했으면 정신 차렸겠지.”
“돌아오기만 하면 황 전무를 갈아 마셔 버리겠다고 이빨을 갈더군요.”
“그래, 이제 슬슬 돌아올 때도 됐지.”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서 전무 후임으로 누가 좋겠나?”
비서가 아리송하게 대답했다.
“서 전무 후임이라면 최 이사입니다만.”
“그런가? 서 전무한테 가서 인수인계 받으라고 해!”
***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성훈아, 엠티 가자!”
나를 본 한교수의 첫 마디였다.
“안 갈래요.”
“왜?”
“남자들만 득실득실한 데를 뭐 하러 가요?”
다른 과라면 아리따운 신입생들을 보는 재미라도 있다지만, 남탕 같은 곳에 가서 내가 무슨 이득이 있다고.
가서 술만 진탕마시다가 올 거란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따라갈 리가 만무하다.
“설악산에 기가 막힌 펜션인데, 정말 안 갈 거냐?”
“미친 거 아니에요? 아직 거기 눈 올 텐데.”
“야! 미국 북부에 비하면 그건 눈도 아냐?”
한교수가 설득했지만 내 마음은 변화가 없었다.
“에이, 안 가요. 잘 다녀오세요.”
교수실을 빠져나왔다.
‘뭔가 잊은 것 같은데, 그게 뭐였더라.’
찝찝한 기분에 뒤통수가 근질거렸지만, 새 학기를 준비하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