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35화
스타타워 프로젝트(01)
“그럼 오늘 하루는 쉬고, 내일 다시 시작하자고.”
“네.”
“딴 데로 새지 말고 일찍 들어가! 내일 해롱거리는 놈은 죽을 각오하고.”
모두 즐거운 얼굴로 나가는데, 부장이 말했다.
“노 과장은 나 좀 보고 가지.”
과장이 자리에 앉자, 부장이 물었다.
“혜주랑 얘기해 봤어?”
과장은 어제 혜주와 성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했다.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해가 되는군.”
“뭐가 말입니까?”
“어제 혜주 보고서랑 오늘 것이 완전히 달랐다고 했지?”
“네. 그럼 부장님은?”
“내 말은 성훈 군이 옆에서 코치해준 거라고.”
“하지만 오늘 혜주 보셨잖아요. 그게 말 몇 마디로 코치한다고 될 일입니까? 제가 직접 물어봤습니다. 성훈이가 어디까지 도와줬냐고.”
박부장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니까. 뭐라고 하던데.”
“보고서 작성 요령이랑 자료 찾는 방법까지만 가르쳐준 모양이던데요.”
박 부장이 신음성을 토했다.
“허. 그래? 대단한데.”
“네. 그렇죠. 가르친다고, 금방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죠. 혜주를 그렇게까지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는데.”
박 부장의 생각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혜주 말고 저 녀석 말이야.”
“네. 무슨 말씀이세요? 혜주가 다 한 거라니까요.”
오늘 노 과장의 모든 초점은 혜주에게 꽂혀 있는 모양이었다.
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 혜주 하루 만에 그렇게 가르칠 수 있냐?”
“음. 그건 어렵죠.”
고기를 잡아 주는 것보다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저 녀석은 그걸 해냈다고.”
“그러네요. 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박 부장이 확신하며 말했다.
“저 녀석 어디선가 분명히 직장 생활 해본 놈이야. 그것도 제대로 말이야.”
“말씀을 들으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알아서 잘할 것 같으니, 뒤에서 지원이나 잘 해 줘.”
박 부장이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부장님. 퇴근 안 하십니까?”
“보고는 하고 가야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
“전무님. 최 이사 코가 납작해졌습니다. 하하하.”
“아주 잘했다고 하더군. 그 팀 막내 아가씨가 혜주라고 했던가?”
“네. 성훈 군이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 박 부장이 그러더군요.”
“안전모가?”
“실제적으로 혜주를 뒤에서 움직였다고 합니다.”
“흠. 어쨌거나, 최 이사는 똥줄이 탔겠는 걸.”
“내년에 주주총회 때까지 실적이 없으면, 놈은 이사 자리를 내놔야 할 겁니다.”
“그런 만큼 더 강하게 푸시를 하겠지. 내년이라고 해 봐야, 석 달도 안 남았어.”
“그때까지군요. 놈의 목숨도.”
“그렇지. 그 전까지 서 전무가 돌아오지 않으면, 놈도 어쩔 수 없겠지.”
“그때는 부사장님이 되어 계실 겁니다.”
“그건 그렇고, 이 건에 사장님도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니 특별히 신경을 쓰도록.”
“우리가 이겼다고 소문을 내면 어떻겠습니까? 전무님.”
황 전무의 눈이 반짝거렸다.
“오호. 그거 좋은 생각이야.”
“그러면 애매하게 중립을 지키고 있는 이사들도 전무님 쪽으로 붙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놈들도 많이 불안할 거야. 서전무가 알래스카로 간 지도 어언 반년이 다 되어 가는군.”
“그동안 서 전무보다 전무님이 뛰어나다고 눈도장을 찍어야겠지요.”
“좋아. 그렇게 하게.”
***
다음 날 아침.
최대리가 말했다.
“혜주 씨. 이거 복사 좀 해 줘요.”
“네.”
혜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노 과장이 말했다.
“최 대리.”
“네. 과장님.”
“직접 해.”
“네? 네. 알겠습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최 대리가 혜주에게 넘기려던 서류를 들고 복사기로 향하며 말했다.
“혜주 씨는 하던 일 계속해요.”
노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들아. 어제부로 혜주 씨 수습딱지 뗐다. 잡심부름 시키다가 걸리면 죽는다. 알았어?”
“네.”
혜주가 노 과장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앞으로는 이름 부를 테니. 그렇게 알아. 그리고 여기 있는 놈들이랑 똑같이 대할 테니. 각오하고. 알았어?”
혜주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네. 과장님!”
그녀가 나를 향해 눈인사를 했다.
고맙다는 의미겠지.
신입사원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 실수를 만회하는 과정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상사는 새삼 다른 눈으로 부하를 바라보게 되며, ‘아. 이 친구는 스스로 극복을 할 열정이 있구나.’라는 각인을 하게 된다.
혜주는 이 과정을 스스로 극복했다.
‘물론 내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일 테지.’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이 사람들과 동료가 되어, 어엿한 사회인으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기특하네. 정말.’
어엿한 사회인(社會人)이란 사회의 일원으로서 홀로서기에 성공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홀로서기란 남에게 기대지 않는 걸 의미하고, 기대지 않는다는 것은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번다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어엿한 사회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동료들에게 그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사람, 그가 바로 어엿한 사회인일 것이다.
그녀를 돕고 싶었던 것은 내 지난 삶에서 겪었던 아픔을 다른 사람은 겪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을 것이다.
‘혜주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나 김성훈에 대한 동정이었지. 누구나 생각하지 않을까? 내게도 좋은 멘토가 있었으면, 좋은 상사가 있었으면 하고 말이다.’
***
노 과장이 내 책상 앞으로 왔다.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요?”
그는 씨익 웃으면서 양손으로 배를 퍽퍽 쳤다.
“족집게 선생. 나도 하나 찍어주지.”
“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까 못 봤어? 부장님이 혜주만 이뻐 하는 거. 나도 이쁨 좀 받아보고 싶다. 설마 둘이서 무슨 썸씽이라도 있는 거냐?”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에이. 아니라니까요.”
“그럼 나도 하나만 가르쳐 줘. 혜주만 이뻐 하지 말고 말이야.”
“과장님이 세 번째입니다.”
“뭐?”
“벌써 박 대리, 오 대리, 다 왔다 갔다고요.”
“이것들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발끈하는 노 과장에게 말했다.
“객쩍은 소리는 하지 마시고, 부장님 어디 가셨어요?”
“에이. 혜주는 놀리는 맛이 있는데, 젊은 사람이 너무 덤덤해.”
‘그런 거에 부끄러워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답니다.’
그는 재미없다고 궁시렁대면서 말했다.
“응. 아까 외주처 사람 좀 만난다고 가셨지.”
“할 말 있는데, 부장님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무슨 말인데, 나한테 해 봐.”
“사람들 모이라고 하죠. 같이 있을 때 의견을 물어보고 싶어요.”
잠시 후 회의를 하자는 소리가 들렸다.
‘회사 생활 다 이렇지. 회의의 연속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끝내고 학교나 가야겠다.’
***
다들 외근 중이라, 노 과장, 나, 혜주밖에 없었다.
단출하게 모여 앉았다.
노 과장이 물었다.
“할 말이라는 게 뭔데?”
“일단 두 가지 안건이 있습니다.”
“말해 봐.”
“이번에 자료실을 뒤지면서 느낀 건데, 자료 찾기가 너무 어려워요.”
“왜 목차집이 있잖아?”
‘목차집이 있기야 하지요. 나는 e-book이 판치던 세상에서 살다가 왔다고요.’
묵은 종이냄새를 맡으며 자료를 찾는데, 머리가 아파서 죽을 뻔했다.
현재건설의 수많은 자료가 쌓여 있으니, 내게는 지식의 보물창고와도 같았다.
하지만.
‘있으면 뭐하나. 사용을 할 수가 없는데.’
1998년 우리나라는 아직 인터넷 강국이라 불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자료를 정리하면서 나는 건축, 아니 적어도 건설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꿰뚫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자료들 중에는 대외비로 외부에 공개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겠지. 흐흐흐.’
“목차집이 있어도, 힘들지 않으셨어요?”
“힘들지. 하지만 그건 막내들이 할 일이라고.”
이제 밀레니엄이 지나면, 세계는 급속도로 발전한다.
범람이라고 해도 어울릴 정도로 정보로 넘쳐나는 현상이 발생하고, 회사의 정보가 데이터베이스화 되어 있지 못하면 도태되는 시대가 온다.
‘난 그런 시대의 주역이 되고 싶거든요. 적어도 건축에서는 말이죠.’
하지만 개인의 힘으로 하는 것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보의 전산화를 요청할 수는 있잖아요.”
과장은 그 의견에 부정적이었다.
“위에서는 돈도 안 되는 거 하지 말라고 할 걸.”
“일단 결재를 올려볼 수는 있잖아요.”
“알았어. 일단 그 건에 대한 구체적인 보고서를 줘 봐. 결재는 올려보도록 하지.”
내 안의 김성훈이 물었다.
‘너 괜히 이렇게 나대다가 남 좋은 일만 시키고 팽 당하는 거 아니냐?’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건 내게도 실험적인 무대라고. 그리고 앞으로는 정보화가 급속히 진행될 거야.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말이지.”
‘그럼 그때 가서 그것들을 이용하면 되는 거잖아. 괜히 네가 나서서 힘든 일을 감수할 할 이유가 있어?’
“이런 경험을 통해서 성장하는 거지.”
‘아까도 말했지만, 팽 당하면?’
“사람을 볼 줄 아는 오너라면, 인재를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넌 지난 삶에서도 뽑아 먹힐 대로 뽑아 먹히고 팽 당한 적이 있잖아.’
녀석은 지난 삶에서의 가구 몰딩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랬지. 나를 일회성으로 봤던 거지. 나도 사람 볼 줄을 몰랐고 말이야.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아. 좀 더 나아졌어. 진정으로 사람의 가치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일 이후의 가능성을 볼 거야.”
‘지나치게 긍정적인 마인드야. 그래도 팽 당하면 어쩔 건데?’
녀석은 계속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며, 나를 몰아붙였다.
“경쟁사로 가서 더 나은 시스템을 구축할 거야. 그리고 현재를 엿 먹여 버릴 거야! 됐어?”
‘흐흐흐. 그런 각오라면 됐어. 이번 삶에도 바보처럼 당하고만 살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이건 내가 나를 설득하고 정당화하는 과정이었다.
남들이 보면 미친놈이라고 비웃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른 안건은?”
“프로젝트팀을 만들고 싶습니다.”
나는 이번 설계를 최고로 디자인할 팀을 만들고 싶었다.
‘사람들은 이미 찾아뒀지.’
첫날 왔을 때부터 설계 2팀의 쓸 만한 인물이 있는지를 점검했었고, 아까의 회의에서는 1팀의 주요인물을 탐색했었다.
‘이제 그들을 모으기만 하면 된다고.’
양 부장 휘하의 몇 명과 박 부장과 설계 2팀의 실력자들을 모두 모은 드림팀을 만드는 것이다.
처음부터 내 목표는 프로젝트팀을 만드는 것이었다.
‘양 부장이 갑자기 승부를 걸어오는 바람에 방향이 틀어지고 말았지만.’
승패에 따라 결과가 바뀐다는 불안 요소를 내가 스스로 떠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승부에는 어떤 변수가 끼어들지 알 수 없거든.’
더군다나 양 부장 같은 베테랑이 끼어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기껏 현재에 팔아먹은 디자인이 콘크리트 투성이가 되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내가 겪어본 양 부장은 새로운 공법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던 한계상태 설계법을 이미 실행해 본 사람이었다.
그리고 고집불통 최 이사에게도 할 말은 하는, 강단이 있는 사람이었다.
‘양 부장을 필두로 박 부장이 뒤를 받쳐준다면, 충분히 내가 원하는 디자인을 완성시킬 수 있을 거야.’
노 과장이 말했다.
“데이터베이스 건은 구체적인 안이 나오면 얘기 하도록 하고, 프로젝트 팀 건은 부장님 오시면 같이 이야기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