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34화
실시설계 (14)
혜주가 손을 슬그머니 들었다.
‘이런 분위기에 내가 나서도 되는 거야?’
그녀의 눈에 성훈의 분해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박 부장이 물었다.
“혜주 씨, 뭐 할 말이라도 있나?”
패색이 짙어가는 상황이라, 박 부장도 좀 힘이 빠진 모습이었다.
“부장님, 제가 저 부분을 설명해 봐도 될까요?”
박 부장의 얼굴에 흥미가 어렸다.
“그래? 해결책이 있어?”
“박 부장! 여기가 애들 장난치는 자리야?”
최 이사였다.
승기를 거의 굳혀가던 상황이었는데, 2팀의 막내가 나서자 그는 심기가 아주 불쾌해졌다.
그가 혜주를 보며 말했다.
“이것 봐, 여직원! 이 자리는 자네 같은 애송이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고!”
박 부장이 혜주에게 눈짓했다.
‘정말 알고 말하는 거야? 아니라면 팀 전체의 망신이 된다고!’
혜주를 내세웠는데도 결과가 좋지 못하다면, 분명히 최 이사는 ‘저런 것들한테도 발언권을 주느냐. 무슨 팀이 이따위냐’며 꼬투리를 잡고 망신을 줄 것이다.
망신만 당하면 다행이게!
그녀를 어떤 이유로든 퇴출시킬 것이고, 차후 박 부장의 행보에도 이번의 예를 들어 제동을 걸 것이 분명했다.
성훈이 혜주에게 물었다.
“어제 제가 말한 부분, 다 암기했어요?”
혜주가 긴장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님! 기회를 한 번 주시죠?”
박 부장은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성훈이 확신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이자, 뭔가가 있음을 눈치챘다.
‘따로 준비한 것이 있다는 말이겠지. 믿어보는 수밖에.’
“어차피 여기서 지면 끝이야. 혜주 씨, 발언해!”
최 이사가 인상을 팍 썼다.
“이게 뭐야! 박 부장. 망신 한번 제대로 당하고 싶어!”
막내라고 해서, 혹은 여자라고 해서 발언을 못할 이유는 또 뭔가?
성훈이 최 이사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사님, 그녀도 당당하게 시험을 치루고 입사했습니다. 능력을 확인 받은 바는 없지만, 발언할 기회는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냥 커피 심부름이나 시킬 거면 다방 아가씨나 데리고 오지, 시험은 왜 쳤습니까?”
“너 이 새끼! 어디서 건방지게.”
양 부장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다.
어차피 발언권은 줘야 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뭔가 딜이라도 걸어야 겠지. 보아하니 이런 자리는 처음인 것 같은데. 긴장하면 안 할 실수도 하는 법이지!’
양 부장 자신도 이 승부에 본사 복귀가 걸려 있었다.
‘승부에 어설픈 동정은 금물이지. 아무렴!’
“혜주가 제대로 답을 못 하면 우리가 이기는 걸로 해도 되는 건가? 성훈 군?”
‘양 부장은 혜주에게 부담을 주고 싶은 모양이군.’
그런 의도라면 충분히 혜주에게 먹힌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으니 말이다.
자신의 발표에 따라서 승부가 결정된다고 해보라.
승부차기 전문 선수도, 승패가 갈리는 상황에서는 실축을 하는 법이다.
이런 경우는 실력보다 배짱이 승부를 좌우한다.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혜주에게 집중되었다.
어찌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혜주는 아랫배가 아파왔다.
‘윽!’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움켜잡았다.
그 모습을 본 최 이사가 비웃었다.
“왜! 갑자기 생리라도 왔나. 여자니까 이해하지. 얼른 화장실에나 가라고. 크크.”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인상도 썩어 들어갔다.
‘이사라는 인간이 꼭 저런 저급한 말을 해야만 하는가!’
과연 그녀는 이렇게 중압감에 지고 말 것인가?
혜주는 간절한 눈으로 성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성훈이 자신의 배를 양손으로 후려쳤다.
퍽퍽.
킹콩이라도 되듯이 말이다.
‘뭐해! 얼른 따라해!’
성훈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혜주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얼마나 부끄럽고 꼴불견이 모습이 될 것인가?
40대 아저씨들도 하지 않는 행동이 아니던가?
‘못해!’라며 고개를 저으려 하는데, 그녀의 눈에 비릿하게 웃고 있는 최 이사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승리를 거머쥔 듯 팔짱을 낀 거만한 모습이었다.
‘난 몰라. 이제 회사 어떻게 다니라고.’
하지만 망신만 당하고 쫓겨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보는 것이 백배 낫다.
승부는 걸어야 할 시점이 있다.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후웁.”
혜주는 눈을 질끈 감고, 양손을 번쩍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습이나 해둘 걸!’
사람들의 시선이 눈감은 혜주에게 꽂혔다.
‘저게 뭐야?’라는 시선일 것이다.
팡팡.
전력으로 아랫배를 내려쳤다.
방금까지 찌르듯이 아팠던 아랫배가 갑작스러운 충격 때문인지 아픔이 사라져 버렸다.
눈을 뜨니,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잉, 몰라. 이판사판이야!’
그사이 사람들의 눈이 성훈과 혜주 사이를 오갔다.
‘이건 뭐지?’라는 눈빛.
그 모습을 본 성훈이 흐뭇하게 웃었다.
‘드디어 준비가 됐군.’
“네, 양 부장님 말씀대로 하죠.”
양 부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허락했다.
“허허. 이거 참! 좋아. 혜주 씨, 시작해 봐!”
혜주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처음의 떨려 나오던 목소리는 공법을 설명하면서는 완전히 안정되었다.
지금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설명을 하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다.
명료하게 요점을 짚어가며, 설명하는 혜주에게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녀는 이제 살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저 빔의 처짐 문제는 아까 설명 드린 바와 같습니다.”
불만스러운 표정의 최 이사가 말했다.
“흥. 이론으로 건물 짓나? 선례라도 대고 말을 해. 말로는 뭘 못 하겠어?”
그러나 혜주는 그에게도 미소를 보내며 답했다.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한순간의 지체도 없이 말이다.
“선례로는 삼 년 전 양 부장님께서 설계하신 선현교회 예배당을 들 수 있습니다.”
최 이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양 부장은 눈가 주름이 꿈틀거렸다.
혜주가 지금 말하는 선현교회 예배당은 그의 숨겨진 자신작이었다.
장스팬의 빔 말고는 크게 눈에 띄지 않으므로 학계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자신만은 그 구조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수로 그걸 찾아낸 거지.’
혜주 말대로 30m 정도의 빔을 기둥 없이 해결하기 위해, 슬래브를 지탱하는 보에다가 포스트텐션 방식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이따금씩 혜주가 설명을 하다가 한 곳으로 시선이 머무는 것이 보였다.
혜주는 성훈을 보면서 말을 하고 있었다.
‘크, 또 저 녀석이군. 대체 그걸 어떻게 찾아낸 거지? 설마 자료실을 다 뒤진 거야? 미치겠구만!’
이건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하지만 어디를 가서 하소연을 할 것인가!
건물의 한 층을 차지할 정도로 넓은 자료실에서 찾아냈을 것인데 말이다.
성훈은 지난 삶에서, 양 부장의 설계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설계자가 누군지도 몰랐다.
자료실을 찾다가 아는 도면이 보였고, 추억을 떠올리며 혜주에게 보여주려고 가져왔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7, 8m마다 기둥이 박히는 게 상식이었다.
철골구조라고 해도 10m에 하나씩은 박혀야 안정적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기둥도 없이 30m의 보를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선현교회 예배당 설계도는 슬래브의 처짐을 과감한 공법의 적용을 통해 적절히 해결했다는 선례가 되어, 2, 3년 뒤에는 학생들의 참고서에 실리게 된다.
하지만 그건 성훈만이 알고 있는 몇 년 후의 미래였다.
“허허.”
양 부장이 놀란 얼굴로 성훈을 바라보았다.
성훈이 고개를 까딱하면서 인사를 했다.
‘저건 또 무슨 의미야?’
양 부장은 성훈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당신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라는 의미라는 것을.
혜주의 발표는 계속 이어졌다.
“저는 이 빔의 처짐을 선현교회에서 적용했던 포스트텐션 공법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녀의 발표가 끝났을 때, 최 이사는 패배를 직감했다. 그의 얼굴이 패배감에 물들었다.
‘저런 새파란 년에게 지다니, 병신 같은 것들.’
일의 원흉이 된 혜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혜주는 꿀림 없이 당당하게 인사를 했다.
“이상입니다. 최 이사님.”
혜주의 프레젠테이션은 성공적으로 끝을 맺었다.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를 보며 양 부장이 말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들의 숨통을 끊은 마지막 비수가 자신의 설계였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으랴!
“끝난 건가?”
“네, 끝났어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양 부장이 팀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반론할 말 있는 사람?”
아무도 없었다. 아까의 그 문제가 최후의 공격이었던 것이다.
“졌네. 총알이 다 떨어졌어.”
양 부장이 말했다.
“쩝. 우리가 진 건 진 거고. 승리는 축하해 줘야지.”
양 부장이 일어서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는 뒤의 팀원들에게 말했다.
“니들은 안 치냐? 나 쪽팔리게 할 거야?”
팀원들은 최 이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막 폭발하기 직전의 최 이사를 말이다.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린 것도 열 받아 죽겠는데, 그걸 빠뜨린 사람이 최 이사가 깔보던 여직원이었다.
양 부장이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사라는 양반이 밴댕이 소갈딱지도 아니고!’
타인의 성공에 박수를 칠 줄 알아야, 나중에 자신도 그 자리에 섰을 때,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팀원들을 돌아보며 일갈했다.
“전원 기상!”
십수 명의 사람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어섰다.
“박수!”
양 부장의 명령에 시작된 박수였지만, 그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띠여 있었다.
누군가는 혜주를 엄지를 슬쩍 들었다. 최 이사가 못 보도록 가리고서 말이다.
결국 최 이사는 화를 못 이긴 채 자리를 박차며 나가 버렸다.
쾅.
밖에서 최 이사의 고성이 들려온다.
“김 부장! 결재서류 안 올려? 제대로 일하는 놈들이 하나도 없어! 이 따위로 일할 거면 몽땅 때려 쳐!”
박 부장도 팀원들을 일으켜 세우고 인사를 하며 그들의 박수에 동참했다.
양 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자네 팀의 승리를 인정해주지. 하지만 우리 반격이 만만치는 않을 거야.”
“운이 좋았습니다. 다음엔 우리 사무실에 오셔서 복수전을 하셔야죠. 철저히 준비하고 기다리겠습니다.”
1차전은 설계 2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양 부장이 작별 인사를 했다.
“혜주 씨, 수고했어.”
혜주가 허리를 숙여서 감사를 표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장님.”
‘잘했어, 혜주’라는 말과 함께 퍽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양 부장이 제 배를 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혜주는 아까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을 감싸며, 도망치듯이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
모든 팀원이 바로 회의실로 모였다.
“혜주 씨, 대단해! 그게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야?”
엄지를 세우는 노 과장의 말에 혜주는 자신의 파일에 붙은 노란 포스트잇을 떼어내어 흔들었다.
“이것 때문이죠.”
노 과장이 그것을 잽싸게 채갔다.
“뭔데? 이거 성훈 씨가 쓴 거네.”
“네, 맞아요.”
그는 의문스럽다는 듯 물었다.
“언제 준 건데?”
“어제 밤에요.”
노 과장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흐흠. 그럼 어제 둘이 같이 잤어?”
혜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한테 무슨…….’
“과장님!”
혜주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귀야. 미안해. 장난친 거야.”
“흥!”
“혜주 씨, 어쨌거나 성훈 씨가 가르쳐 줬다는 거지.”
“네.”
아직 혜주의 볼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노 과장은 더 장난을 치고 싶었다.
항상 조용하게 자기 할 일만 하던 혜주였는데, 오늘 모습은 많이 의외였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건 뭐야?”
“무엇 말씀이세요?”
노 과장은 큰 포즈로 양손을 들고는 배를 내려쳤다.
퍽퍽.
아프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거!”
다시 혜주의 볼이 빨개졌다.
“몰라요. 성훈 씨한테 물어 보세요.”
그녀는 화장실 간다면서 나가 버렸다. 있어봐야 놀림거리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성훈 군, 그걸 어떻게 찾아냈나? 삼 년도 넘어서 구석에 처박혀 있었을 건데. 양 부장님 작품이라는 걸 알고 일부러 그런 건가?”
노 과장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난 솔직히 생각도 못 했어. 양 부장님을 물리치는데, 양 부장님 작품을 쓰다니 말이야. 부장님 속 좀 쓰리시겠는데. 하하하.”
모두의 시선이 성훈에게 집중되었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미래에는 그게 참고교재에 나올 정도로 유명해진다고는.
그냥 얼버무렸다.
“뭐. 그냥 찾다가 보니 얻어 걸린 겁니다.”
“그래도 대단했어. 그게 역전의 한 수가 되었잖아, 난 아까 짜릿했다고. 양 부장님 얼굴이 확 변하는데 말야. 하하.”
“그래도 그걸 외우고 발표한 사람은 혜주 씨죠. 전 사실 어제 잠이 와서 기억도 잘 안 나요.”
오늘의 공은 혜주에게 온전히 돌려야 한다. 한 사람의 몫을 해냈다는 기쁨은 그녀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두고두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후. 그래도 잘돼서 다행이다.’
더 있으면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뻔히 보였다.
‘배를 퍽퍽 치면서 그게 뭐냐고 물으며 놀리겠지.’
혜주를 이은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았다.
“부장님, 저 잠 와서 자러 가려는데 괜찮을까요?”
“그래, 그래. 밤새운다고 고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