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31화
실시설계 (11)
“김 비서, 안전모는 아직도 외국에서 안 돌아왔나?”
사장도 ‘스타타워’ 건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신문에다가 빵빵 터뜨려 놨는데, 슬슬 중간 결과를 보도해 줘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원설계자라는 녀석은 외국에 나가서 감감무소식이고, 다른 원설계자들은 성훈이 와야 움직인다고 했었다.
“어제 설계 2팀으로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른 것 때문에 미처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장이 웃으며 팔을 내저었다.
“아, 그래. 왔다니 다행이구만. 나보다 자네가 더 바쁜 거 아니, 신경 쓰지 말게나. 진행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그게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비서의 말에 사장의 허리가 앞으로 숙여진다.
“재미있다니? 뭐가?”
“예전에 서 전무가 양 부장을 제주도로 �i아 보냈잖습니까?”
“그랬지. 서 전무가 ‘양재형이 때문에 못살겠다’며 죽는 소리를 해대서 그러라고 했지.”
얼마나 하소연을 해댔던지, 사장은 양 부장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서 전무의 의견을 들어줘야 할 필요가 있었지.’
양 부장을 한직으로 보내는 것은 서 전무의 힘을 키워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서 전무의 일처리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었다. 자신의 집 욕조를 뜯어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최 이사가 그 양 부장을 불렀습니다.”
“엉? 최 이사가 왜? 둘이 앙숙이잖나.”
비서는 설계 2팀에서 벌어진 성훈과 최 이사의 일을 이야기했다.
“최 이사가 빡 돌았다는 말이네. 크하하.”
“제 세상인 줄 알고 나대다가 한 방 먹은 거지요.”
“아직 최 이사는 안전모가 어떤 놈인지 파악을 못 하고 이빨을 갈고 있다는 거네? 그나저나 양재형이가 올라왔으면 황 전무도 긴장하겠는데.”
“조용히 분위기만 관망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조만간 한 번 들러봐야겠는걸.”
“그럼 일정을 잡아 보겠습니다.”
비서가 수첩을 꺼내 적을 준비를 했다.
사장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시간 날 때 들르면 되는 거지.”
사장이 자기 회사를 방문하는데, 무슨 스케줄까지 필요할 것인가?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
업무가 거의 끝나갈 시간이었다.
박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은 진짜로 전투 모드에 들어가야 하니까. 오늘은 일찍 들어가. 술도 마시지 말고. 알았어?”
“네!”
“나 이사실 갔다가 바로 약속 있어서 나간다. 노 과장 애들 단속 잘하고.”
“네, 부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부장이 나가고, 혜주가 노 과장에게 보고서를 내밀었다.
“과장님, 지시하신 보고서예요. 한 번 봐주세요.”
“벌써? 빠르네.”
노 과장이 웃으며, 파일을 받고 페이지를 넘기면서 인상이 굳어갔다. 뭔가 맘에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흠, 흠…….”
파일을 검토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혜주 씨, 일단 이 건은 신경 쓰지 말아요. 알아서 할게요.”
손 떼라는 말이었다. 혜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지금까지 썼던 어떤 리포트보다 심혈을 기울였는데.’
노 과장은 책상에 쌓인 다른 서류로 손을 뻗었다.
“혜주 씨,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과장님, 뭐가 잘못된 건지 말씀을 해주셔야.”
“지금은 바빠서 설명을 할 시간도 없어요. 이번 건은 없었던 걸로 해요.”
“이유라도 알아야죠.”
혜주는 대답을 듣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기세였다.
“흠, 뭐랄까? 혜주 씨가 가져온 보고서는 대학 리포트를 보는 느낌이에요.”
혜주는 자존심이 상했다.
“다시 해올게요.”
“안 해도 괜찮아요. 그럴 시간도 없고. 당장은 직원들 서포트하는 게 더 효율적이에요.”
‘또 매번 자료 찾으러 다니라는 말이야?’
과장은 최 대리를 불렀다.
“최 대리, 이리 와 봐라.”
최 대리는 데이터를 입력 중이라 정신이 없었다.
최 대리는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과장님, 좀 있다가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야! 빨리 안 와?”
과장의 고함에 정신이 번쩍 든 최대리가 달려왔다.
“네, 부르셨습니까? 과장님.”
“개기냐? 요즘 좋게 말하니까 정신 못 차리지. 엉?”
“아닙니다!”
순식간에 사무실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혜주가 노 과장의 변한 분위기에 겁을 먹었다.
원래 이런 분위기였다면 믿을까?
“이 건, 네가 처리해라. 초안 잡히면 바로 나한테 들고 오고.”
“어! 이거 혜주 씨가…….”
“입 닥치고 해라. 최 대리, 나도 바쁘다.”
“네, 일단 지금 하던 거 먼저 해야 돼서, 이 건은 내일 업무 시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알았어. 점심때까지는 내 책상에 올려놔라.”
“네, 과장님.”
설명도 필요 없다. 오로지 지시와 수행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혜주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다.
노 과장이 말했다.
“가서 일 봐.”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최 대리가 투덜거렸다.
“혜주 씨, 일을 하려면 똑바로 하던지 이게…….”
그는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혜주는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다시 하면 되는데, 왜!’
그녀는 단 한 번의 결과로 자신을 쓸모없다고 판단해 버리는 노 과장이 원망스러웠다.
‘어디를 고치라고 말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 처음인데, 꼭 그렇게 말을 해야 하는 거야?’
혜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미안해요. 비난할 의도는…….”
최 대리는 자신의 말 때문에 그러는 줄 알고 당황했다.
혜주는 걸음을 재촉했다.
“대리님, 저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빠르게 걸어가는 혜주의 등 뒤로 최 대리가 말했다.
“직장 생활 원래 이래요. 겨우 그런 거 가지고, 맘 상하지 마요.”
그의 위로가 혜주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
자료실에서 돌아오니 혜주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 보고서가 완성됐을 텐데. 한번 보여 달라니까, 어딜 간 거야?’
처음 쓰는 보고서이니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학교의 리포트는 학생의 과제 이해도를 보는 것이 목적이지만, 회사의 보고서는 다르다.
‘당장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보고서에는 상사가 알고 싶어 하는 자료만 담겨 있으면 된다. 물론 일정한 형식을 갖추기는 해야겠지만.
노 과장에게 물었다.
“혜주는요?”
“몰라. 자료실에 없어?”
그는 데이터를 분석 정리하느라 건성으로 대답했다.
‘쳇. 다들 정신이 없구만!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돌아서 내 자리로 가는데, 혜주가 보고 있던 자료들이 최 대리의 책상에 있었다.
“최 대리님, 이걸 왜 가지고 계세요?”
데이터를 입력하던 최 대리도 건성으로 답했다.
“혜주 씨가 하던 것 내가 맡게 됐거든.”
“왜요? 어떻게 했길래요?”
최 대리는 말 대신 혜주의 보고서를 내게 건넸다.
‘쯧. 역시 이럴 줄 알았어.’
‘골조공사’에 대한 지식으로 도배된 한 편의 리포트였다.
‘나 이만큼 많이 알아요’라고 어필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교수였으면 A+를 줬겠지만, 상사였으면 쓰레기통으로 갈 만한 보고서였다.
학교에서는 아는 것만으로도 인정을 받지만, 사회에서는 가진 지식을 써먹을 줄 알아야 인정을 받는다.
‘네가 많이 아는 게, 지금 무슨 도움이 된다고!’
상사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였다.
하기야 너무 급하게 작업 분배가 이루어졌고, 노 과장도 그녀의 실력을 100% 신뢰해서 일을 맡긴 것은 아닐 것이다.
‘얼마나 적응했는지, 바로 투입이 가능한지 테스트할 요량이었겠지. 혜주가 타격이 크겠는걸.’
시간이 넉넉한 상황이었다면, 노 과장도 그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 최대한 보듬고 설명을 해줬을 것이다. 하나 지금처럼 정신없는 분위기라면 그게 불가능했을 터!
혜주를 찾아 계단실로 갔지만 보이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신입사원이 있을 곳은 뻔했다.
‘나도 옛날엔 옥상에서 담배 많이 피웠었는데.’
나 같은 남자라면 당연히 옥상이겠지만, 혜주는 여자니까 매점에서 뭔가를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있지 않을까?
지하 매점으로 향했다.
***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 옆에 서서 노크를 했다.
똑똑.
‘누구지?’ 하면서 고개를 드는 그녀 앞에 빨대 꽂은 바나나 우유를 내밀었다.
침울하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좋으면서도 쑥스러운지, 작은 목소리로 나를 타박했다.
“왜 매번 바나나 우유예요? 제가 그렇게 어려 보이세요?”
“그런 건 아닌데요. 탄산 안 먹는 사람도 있고,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도 있죠. 우유도 마찬가지고.”
“그런데요?”
“살면서 바나나 우유 안 먹는 사람은 못 봤거든요.”
“치. 나랑 나이도 비슷하면서. 나이 많이 먹은 사람처럼 말하네요.”
가끔 내 나이를 잊어버릴 때가 있다.
내가 25살짜리 청년이라는 것을.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피.”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혜주 씨, 힘들죠?”
“어떻게 과장님이 저한테 그러실 수가 있어요?”
그녀는 기분이 많이 진정되었는지 노 과장의 뒷담화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들어주는 거였다.
‘노 과장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원래 다 그런 건데.’
그녀와 함께 뒷담화를 깔 수는 없지 않는가!
한참 동안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시계를 보니 5시 반이 넘어 있었다.
“혜주 씨, 어떻게 할 거에요?”
“뭐 어떻게 하긴요. 다시 보조 업무에라도 충실해야죠.”
“보고서 다시 작성해 볼 생각은 없고?”
“보조업무를 하면서 그걸 할 만한 능력이 안 돼요.”
“오늘 직원들 야근 안 한다면서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 업무는 최 대리님께 넘어갔어요.”
“하지만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죠. 내일 아침부터 한다면서요?”
“그렇기는 한데. 노 과장님도 괜찮다고 했어요. 어차피 저 같은 애한테 큰 기대는 안 했을 거예요.”
“상사의 ‘괜찮아’를 곧이곧대로 이해하면 안 돼요.”
“그럼요?”
상사가 괜찮다고 해도, 내 마음이 불편하면 그건 괜찮지 않은 거다.
결국 직장 생활도 자기만족이다.
‘지금 상태라면 노 과장은 다음부터 당신에게 일을 맡길 때, 생각을 많이 하게 될 거예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한직으로 밀려나는 거다.
규모가 있는 업무와는 멀어지고, 인정받을 길도 요원해지는 것이다.
‘굳이 나중의 일을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녀가 노 과장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금방 이해하겠지만, 지금은 무리일 것이다.
“혜주 씨. 이 테이블 약간 흔들거리죠.”
“오래 돼서 그런가 보죠.”
“아니에요. 다리 길이가 안 맞아서 그런 거예요.”
“호호. 왜 갑자기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요?”
“하나의 다리에서 받지 못하는 하중을 나머지 세 다리가 부담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당신이 일을 수행하지 못한 만큼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본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도 내 말을 이해한 듯했다.
“하지만 과장님은…….”
“시간이 지나면 과장은 당신이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만 기억할 거예요. 당신의 능력에 버거웠다는 사실은 잊어버린 채 말이죠.”
사실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결국에는 무능한 사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올챙이였을 적에 겪었던 아픔은 나도 기억하지 못했었다.
‘개구리가 되면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리는 건가?’
“혜주 씨. 아마 내일 아침이 되면 최 대리님도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물론 말씀은 안 하시겠지만.”
“그렇겠죠?”
그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미안해했다.
“벌써부터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왜요? 피해를 끼쳤는데?”
“아직은 아니잖아요. 피해를 끼치지 않을 기회가 있는데, 굳이 원망을 받을 필요는 없죠.”
“과장님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결과가 모든 걸 말하는 거예요.”
“미움받지 않을까요?”
“하지 말라는 걸 해서?”
그녀가 망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아니죠. 오히려 멋있게 만들어서 ‘짜잔’ 하고 내놓으면 기특해 하실 걸요.”
그녀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정말 그럴까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직원을 싫어하는 상사는 없다.
“좀 더 쉬면서 생각해 봐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오늘 밤에 사무실에서 할 일이 있어요.”
“하지만 부장님이 다들 일찍 퇴근하라고 했잖아요.”
“하하. 전 부장님 부하가 아니거든요. 그러니 말을 안 들어도 돼요.”
“그럼 저도.”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당신은 어떤 핑계를 댈 건가요?”
“아직 임시직이거든요. 말 안 들었다고 자르실까요?”
‘헤’ 하고 혀를 내밀며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늦둥이 막내 동생이 있다면 저런 느낌일까?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럼 끝나고 우리끼리 저녁 먹고 들어가요. 일찍 퇴근하랬는데, 안 하고 미적거리면 눈치 보일 테니.”
그녀를 두고 돌아오면서 생각을 해봤다.
‘말은 잘 듣지만 일을 못하는 무능한 부하가 예뻐 보일까? 말은 좀 안 들어도 제 할 일을 깔끔하게 하는 부하가 예뻐 보일까?’
성향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나라면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나저나 오늘 뭐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