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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129화 (129/427)

건축의 신 129화

실시설계 (09)

그녀가 돌아왔다.

매점에 들렀는지 비닐봉지에 캔커피를 사들고 왔다.

노 과장이 말했다.

“혜주 씨! 어디 갔다 이렇게 늦게 온 거야?”

그녀는 노 과장의 책상에 캔을 올려놓았다.

혜주가 노려보듯 눈을 부릅떴다. 그래도 귀엽다.

노 과장이 깜짝 놀라서 의자 등받이로 몸을 뉘였다.

“왜 그래? 혜주 씨.”

혜주가 캔 뚜껑을 따서 노 과장에게 내밀었다.

“과장님, 잘 부탁드려요.”

금세 노 과장의 얼굴이 훤해진다.

헤벌쭉해서는 하는 말이 ‘헤, 나 주려고 사온 거야? 나 뇌물, 그런 거 안 좋아하는데’라고 한다.

혜주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알려고 마음먹으면 금방 알 수 있었는데. 고마워요. 과장님!’

혜주는 긴장된 마음이 자연스레 자신의 시야를 좁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뇌물은? 미운 놈 떡 하나 주는 심정이지.’

그러면서도 함께 드는 마음.

‘어쩜 저렇게 말을 얄밉게 하니!’

“흥!”

혜주의 돌변한 반응에 노 과장이 벙쪘다.

그리고 박 부장에게 생글거리며 말했다.

“부장님, 드세요. 저 찾지 않으셨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혜주가 내민 캔커피는 아직도 따뜻했다.

박 부장도 기분 좋아지기는 마찬가지.

“허허, 혜주 씨. 고마워.”

그리고 말을 이었다.

“좀 쉬었다가 양 부장님께 우리 자료들 좀 갖다드리고 오면 좋겠네. 성훈 군이랑 같이 다녀오게.”

혜주가 돌아서자 박 부장이 말했다.

“혜주 씨, 고마워. 잘 마실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커피를 돌린 후, 성훈에게는 커피 대신 초콜릿을 내밀었다.

위에 붙은 포스트잇에 귀여운 글자체로 ‘고마워요. 성훈 씨’라고 쓰여 있었다.

성훈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성훈의 모습이 약 올리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다 알면서. 능구렁이.’

그녀는 성훈에게도 일갈을 날렸다.

“아뇨! 화장실 간 거 아니거든요. 매점 갔다 왔거든요!”

그리곤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성훈 씨. 저거 들고 따라 오세요.”

성훈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노 과장이 물었다.

“부장님, 쟤 왜 저래요? 오늘 하루 종일 저기압이더니.”

“글쎄다. 그래도 저렇게 웃으니까, 사무실 분위기가 화사해진 것 같군. 허허”

“매번 저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쯧쯧.”

혀를 차는 노 과장에게 박 부장이 핀잔을 준다.

“노 과장, 너만 잘해주면 된다.”

“저만큼 잘해주는 사람은 또 어디 있다고.”

아까 계단실에서의 다짐은 생각도 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박 부장이 말했다.

“노 과장아. 네 거만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다. 아냐?”

자신이 마시던 캔커피를 보더니 말했다.

“그러네요. 하하. 역시 혜주가 나를 많이 생각하네.”

박 부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까 혜주가 직접 따줬지?”

노 과장 기억에도 혜주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뚜껑을 따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요?”

“설사약 들었을지도 모른다. 조심해서 마셔라.”

노 과장은 그녀가 준 커피를 아주 진지하게 바라본다.

“이거 먹어도 될라나?”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 부장이 말했다.

“자자, 다시 일하자고. 최 대리, 히히덕거리지 말고 집중해.”

남자들만 득시글한 곳.

그녀의 변화에 사무실 분위기가 밝아졌다.

***

위층의 승강기 앞에 멈춰 섰다.

혜주가 물었다.

“성훈 씨, 왜 우리보고 들고 오라고 하셨을까요?”

“막내니까 당연한 거죠. 왜요? 무서워요?”

“여긴…… 최 이사님이 계신 곳이잖아요.”

그렇다.

지금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설계1팀, 최 이사의 안마당이다.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안 불러주면 핑계라도 만들 참이었다고.’

이렇게 당당하게 적진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으랴!

뜻하지 않은 행운에 기분 좋게 웃었다.

“적진에 당당하게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주는데 감사해야죠.”

“당신은 긴장도 안 돼요?”

“최 이사가 그랬잖아요. 잡아먹지는 않는다고.”

어제의 노 과장을 흉내 내는 내 말투에 혜주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제는 정말 웃겼는데 그죠.”

깔깔대는 그녀의 양손에 서류가 없었다면, 다시 내 등짝은 작살이 났으리라.

“겁낼 필요 없어요. 다 같은 사람인데.”

나이, 성별, 인종 다 상관없다.

생물학적으로 사람은 다 같은 종(種)일 뿐이다.

좀 더 똑똑한 사람, 돈 많은 사람 등등이 있을 뿐이다.

사람의 존재가치는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이 이뤄온 것에 의해 인정되어야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적진의 한복판으로.

“오, 우리 설계 2팀 루키들께서 오셨구만.”

양 부장이 쾌활한 목소리로 우리를 맞았다.

그의 목소리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저 친구가 그 친구야?”

“허, 어제 최 이사가 발렸다기에 곰 같은 덩치일 줄 알았는데, 아주 깔끔하게 생겼는걸! 우리 팀으로 오지.”

“에이. 꿈 깨. 이 친구야. 애초에 우리 팀으로 오는 건 틀렸어. 최 이사가 가만히 있겠어?”

“에휴, 우리는 언제 저런 신입 한번 받아보냐!”

사람들은 나를 신입으로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혜주에 대한 말도 은근히 들렸다.

“야, 꽃향기 나지 않냐? 박 부장님 복도 많으시지.”

그때였다.

이사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왜 이리 소란스러워! 일들 안 해!”

바깥의 부산스러움에 밖으로 나온 최 이사였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네가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야!”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쁜 것인가?

‘옹졸하군. 이사씩이나 되어 가지고.’

“안녕하십니까, 최 이사님. 양 부장 심부름 왔습니다.”

“근데 왜 하필 너냐고.”

양 부장이 끼어들었다.

“이사님, 우리 일하는데 개인감정 좀 넣지 맙시다. 예!”

최 이사는 생각하기도 싫은 어제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던지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개인감정은 무슨 개인감정! 저놈은 우리 라이벌이야.”

“너무 그러지 마시죠. 같은 회사 사람들끼리.”

최 이사에게 투덜거리면서 나와 혜주를 불렀다.

“이리 오게나.”

최 이사가 화를 버럭 냈다.

“오긴 뭘 와. 자료만 놓고 꺼져. 양 부장은 나 좀 보지!”

“아 참, 이사라는 분이 낄 데 못 낄 데를 분간을 못 하시네. 믿지 못하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믿어라. 그런 말 몰라요? 이사님!”

양 부장의 말에 혜주가 피식 웃으면서 귓속말을 했다.

“어제도 저거 비슷한 말을 들은 거 같은데, 그렇죠.”

그렇다. 어제 최 이사가 내게 했던 말이다.

양 부장에게 모든 포커스가 맞춰져 있던 최 이사는 우리의 속삭임을 듣지 못했다.

“뭐야. 이 새끼가.”

“최 이사님도 실적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닙니까? 다음 해에 이거 못 하면 실적 미달로 쫓겨날까 봐.”

대놓고 최 이사의 약점을 공개해 버리는 양 부장이었다.

‘호탕한 건지, 전략적인 건지.’

생긴 건 호탕한 게 분명한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계산된 느낌이 들었다. 상대로 하여금 덤벼들지도, 물러나지도 못 하게 하는 그런 계산 말이다.

‘저렇게 상사를 까대니 미움을 받았겠지만.’

그에 반해서 부하직원들의 신망은 대단했다. 아까의 박 부장과 다른 사람들이 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떡할 건데.”

“나도 내 밥줄 걸린 거 아닙니까? 어련히 알아서 하겠어요! 좀 믿음을 가져 봐요. 최 이사님.”

“크, 일단 믿어보지. 어떻게 할 건데.”

양 부장이 말했다.

“성훈아, 이러면 어떠냐?”

그가 말을 하는데, 얼굴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네 설계안에는 슬래브와 기둥에 ‘Y’자로 걸리는 와이어에 치명적일 수 있는 약점이 숨어 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있고.”

“그래서요?”

“그 약점을 미리 알려주지.”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지?

“그 건에 대한 해결책을 내가 만족하게 만들어 내면, 너희 설계안 그대로를 인정해 주지.”

‘헐. 상당히 고단수인걸. 역시 만만치 않아.’

이런 제안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상당히 좋은 제안 같아 보이지 않는가?

문제를 미리 내준다는데.

최 이사가 보기에도 우리에게 유리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게 뭔 소리야. 다 알려주면 어떻게 해!”

“말을 끝까지 들어봐요.”

그가 말을 이었다.

“만약 해결하지 못한다면, 최 이사님 의견을 최대한 고려해서 변경하는 거다. 어때!”

양 부장은 ‘이기면, 최 이사의 의견을 고려하라’는 말로 최 이사의 입을 막아버렸다.

겉으로 듣기에 양 부장의 말은 우리 입장을 고려해 주는 것 같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나한테 방어 일변도로 가라는 말이네? 당신은 공격만 하시겠다.’

그리고 어차피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전진은 불가능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더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듯 그가 웃었다.

방어? 말이 좋아, 방어지.

방어만 하다가는 샌드백 신세를 면치 못한다.

백번을 잘 막아도, 한 번 뚫리면 지는 게 싸움이다.

‘상당히 고단수의 수법을 쓰네.’

그는 내게 방어를 강요하고 있었다.

상대가 지칠 때까지 막아낸다면 그것도 승리겠지만 그걸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해 내라. 생각해 내라.’

이렇게 단시간에 승부를 걸어올 줄은 생각을 못 했다.

‘곰 같은 겉모습에 완전히 속았어.’

혜주도 옆에서 거들었다.

“성훈 씨, 좋은 제안이잖아요. 문제를 가르쳐 주고 시험 치는 거나 마찬가진데요.”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이 아가씨야. 속사정도 모르면서.’

양 부장이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은 최대한 빠른 시간에 승부를 마무리 짓겠다는 말이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범위 제한 없이 무차별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겪었던 어떤 일보다도 긴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상황에서 반격을 할 방법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내 디자인에 흠집을 내는 것.

태생적으로 방어를 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다가 머리에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양 부장은 착각하고 있군. 내가 무조건 내 디자인을 고수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나는 내 디자인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발전시킬 수 있는 안이 나온다면, 바로 적용시켜 버릴 것이다.

‘이게 왜 가능하냐고? 내 거니까. 더 좋은 안이 나온다는데, 현재에서도 반대할 리는 없다.’

한 교수와 아이들은? 설득하면 된다.

‘반대하면 몽땅 불러 들여서 개고생을 시켜줄 테다.’

그때까지는 나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이 승부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주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어야지.

‘나만 당할 수 있나? 당신들도 머리를 짜내야 할 거야.’

“좋은 의견 잘 들었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

양 부장이 내 얘기를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조건을 걸리라고는 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에게도 본사로의 복귀가 달린 일전이었다.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저도 주는 대로 받기만 하면 죄송해서요.”

“조건이 뭔지 말해 봐.”

“무조건 수락한다고 하시면 부장님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양 부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짧은 순간에.

‘이 일의 열쇠는 양 부장이 쥐고 있어. 이미 불러들인 이상은 가란다고 갈 사람도 아니고.’

양 부장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미 승리를 예상한 자의 미소였다.

“성훈아,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 팀이 할 건 방어밖에 없거든. 이걸로도 많이 양보한 거야.”

“승낙하시는 겁니까?”

“좋아. 승낙하지.”

최 이사는 중간에 끼어서 우리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그가 양 부장을 부른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박살을 내려고 불렀지, 승부를 보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믿겠습니다. 그 말씀.”

“믿어. 이제 그 조건 뭔지 들어보지.”

“문제를 하나만 내실 건 아니죠? 그럼 끝나지 않는 싸움이 될 텐데요.”

양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네버엔딩 파이트를 할 생각은 없었다.

“당연하지. 일단 몇 개의 문제점을 발견해서 넘겨주지.”

“모두 우리 쪽에서 해답을 찾는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것들이겠죠?”

너무 당연한 소리였다.

“그렇게 쉬운 정도면, 자네가 이미 답을 찾아뒀을 것 아닌가! 그건 승부가 아니지.”

“그럼 현장 쪽에서 이미 답이 나와 있는 문제를 내실 겁니까?”

“이봐, 이봐. 날 뭘로 보는 거야? 거기 박 부장도 베테랑이야. 만만치 않다고.”

“그럼 이렇게 하시죠. 문제를 내시고, 우리 쪽에서 하나를 해결해 내면…….”

“그러면?”

“그 문제들 중에서 하나를 양 부장님 쪽으로 토스할 겁니다. 그럼 부장님 팀에서 답을 찾아주셔야 됩니다. 제 마음에 들게요.”

“박 부장 마음이 아니고?”

“변경을 해도 제가 직접 할 거니까요.”

“변경을 한다고? 누구 맘대로?”

“네? 제 맘대로죠. 제가 원설계자니까요.”

“잠깐 잠깐! 바꾼다는 말은 안 했잖아.”

“그건 말이 안 되죠. 처음부터 최 이사님은 바꾸려고 오셨는걸요. 그렇죠. 이사님.”

최 이사는 눈을 꿈뻑꿈뻑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양 부장에게 웃어주었다.

‘당신 상관이 먼저 시작한 일이라고요.’

나라고 바꾸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남아일언!”

양 부장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중천금!”

혜주는 우리 둘의 말을 완전히 이해를 못한 모양이다.

“성훈 씨, 이게 무슨 말이에요? 방어는 뭐고?”

“그런 게 있어요.”

양 부장에게 말했다.

“이틀 드릴게요. 최소 약점 5개는 만들어 주셔야 됩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기 전에 양 부장에게 말을 덧붙였다.

“아! 우리는 방어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슬래브를 방어할지, 와이어를 방어할지는 우리가 정하겠습니다. 방어하는 입장이니까요. 그 정도 핸디캡은 이해해 주시겠죠?”

양 부장의 광대가 꿈틀거렸다.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이 싸움은 도 아니면 모다.

내 작품을 대박으로 만들 것인지, 쪽박으로 만들 것인지.

‘그래도 여기의 브레인들이 모두 의견을 모으면 쪽박은 나오지 않을 거야.’

돌아 나오는 내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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