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축의 신-124화 (124/427)

건축의 신 124화

실시설계 (04)

혜주가 회의실에서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에구, 쯧쯧.’

남자도 어지간해서는 버티기 어려운 곳이 건설이다.

나름대로는 여성이라고 많이 배려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직도 건설은 남성적인 분위기가 많았다.

아까 혜주의 분위기에서 수습이 남자였다면, 노 과장은 쪼인트를 까거나 한바탕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나한테도 처음 보는 사람이라 참는 것 같던데.’

현장이 체질인 사람 같은데, 왜 여기 와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대신 부하들에 대한 통솔력은 확실히 있는 것으로 보였다.

‘울고 싶을 때는 놔두는 게 상책이지.’

달래는 것도 타이밍이 있다. 특히나 여성의 경우에는.

잠시 후, 회의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그중 하나가 말했다.

“잠시 들어오셨으면 하던데요. 성훈 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부장에게 대놓고 물었다.

일단은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최 이사님은 어떤 분입니까?”

“흠. 혜주 씨 말을 들어보니 아는 것 같던데.”

“그때 계약하러 오셨을 때, 겨우 5분 봤었습니다.”

그에게 최 이사와의 첫 만남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 성훈 군. 자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던가?”

박 부장도 나이가 꽤 있으니, 말을 놓는 게 자연스러웠다.

“성격이 좀 괄괄하시더군요.”

“뭐. 솔직히 말하면 성질이 좀 더럽지.”

그 말에는 나도 노 과장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박 부장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의리는 확실해. 제 새끼 챙기는 건 확실하니까.”

노 과장도 설명을 덧붙였다.

“그 분이 추진력 하나는 남다르지. 그렇죠. 부장님?”

“그렇긴 해. 거의 다 죽어가다가 판을 뒤엎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건 인정해 줘야지.”

‘만만치 않은 단점 뒤에 그걸 커버할 만한 더 큰 장점이 있다는 말이군.’

내가 생각하기에나 단점이지, 정작 최 이사 자신은 강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박 부장에게 물었다.

“곽 이사님은 뭐라고 평하실까요?”

그가 웃었다.

“아마도…… 개새끼라고 하시겠지.”

“아니죠. 부장님. 미친개새끼겠죠. 어지간히 데었어야죠.”

인사가 만사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한다는 말이다.

장사도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고, 외교도 결국은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된통 걸렸다.

‘미친개를 어떻게 설득하지.’

잠시 동안 최 이사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박 부장이 물었다.

“성훈 군, 현장경험이 얼마나 있나?”

“아직은 별로 없습니다. 현재 중공업 외국인 기숙사가 다죠.”

“엇. 그 사람이 자네였나?”

박 부장의 말에 내가 반문했다.

“그 사람이라뇨?”

“거기 내장공사가 칼같이 되어 있더구만. 나도 억지로 따라가서 봤지만, 배우는 것이 많았어.”

노 과장은 내용을 모르니 슬그머니 박 부장에게 물었다.

“부장님, 무슨 말씀이신지?”

“저번에 사장님이 노발대발하시면서 임원급 몽땅 울산으로 내려 보낸 적 있었잖아. 거기 나도 곽 이사님이랑 같이 갔었거든.”

그리고는 박 부장이 말을 이었다.

“김성훈, 이 친구가 현장은 너보다 잘할 거다.”

“에이, 부장님도 무슨 농담을. 제가 경력이 얼만데.”

박 부장이 그런 노 과장을 비웃었다.

“직접 가서 보면, 경력 같은 소리 안 나와. 부끄러워서 죽고 싶을걸.”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노 과장이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본다.

“어쨌거나 현장경험은 확실한 친구니까, 믿을 만해.”

자꾸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새는 것 같아서 본론으로 돌아왔다.

사실 내 칭찬을 하는데 듣고 있기도 민망했다.

“부장님, 실시설계는 얼마나 진행이 되었습니까?”

“사실은 별로 진행을 못 했다네. 매번 최 이사가 와서 브레이크를 거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네.”

박 부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프로젝트도 이랬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다가 무산된 프로젝트도 많겠네요.”

“훗. ‘거의 다’라고 봐도 된다네.”

정말 그런 거라면 구조설계팀이 왜 필요한가?

그냥 제멋대로 도장 하나 찍어서 승인하면 될 것이지.

그가 겸연쩍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스타타워’는 저작권이 우리 현재건설한테 없지 않나. 그래서 최대한 버티면서 필요한 도면을 만들어낸 거지. 그나마도 모두 박살 나버렸지만.”

“그동안 계속 이랬다면 만들어둔 실패작들 많으셨겠네요?”

노 과장은 정말 속이 쓰린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성훈 씨. 무산된 완성작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맞아. 지금 우리 캐비닛에 강제로 잠들 수밖에 없었던 수백 개의 공법들이 있다네.”

“전부 최 이사에게 당한 거군요.”

박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 이사는 진짜로 신공법을 싫어한다네. 변화 자체를 싫어해.”

“성훈 씨, 그 인간 머릿속에는 공기 단축밖에 없다고 봐도 돼.”

최 이사를 비난하는 둘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들 또한 이빨을 갈고 있었네.’

“그럼 제 공법도 작살을 내려고 하겠군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지금까지는 자네처럼 저작권을 고수한 전례가 거의 없다시피 하지. 그리고 공기 단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자네도 알 테지.”

적의 적은 동지라고 했다.

이 순간 우리는 진한 동질감을 느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최 이사를 이겨봤으면 하네.”

“그런 이야기를 저에게 하시는 것은.”

“성훈 군, 우리는 뭔가 얘기가 통하는 것 같네. 일전에 한 번 최 이사를 꺽은 적이 있다지?”

꺾었다고까지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정도는 아닌데.

“어쨌든, 최 이사는 분명히 이빨을 갈고 있을 거라네.”

“일단 그동안의 공법을 모두 꺼내서 보여주시죠. 일단은 시간을 벌 방패막이가 필요합니다. 그중에서 대체 가능한 것도 찾아보고요.”

이유가 어찌 되었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박 부장 같은 전문가에게 최고의 모욕이 될 터.

“박 부장님, 일단 처음이니까, 방어적으로 가면서 최 이사를 탐색해 보겠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군. 간만 보자는 말이지?”

나의 고개 끄덕임에 박 부장은 의욕이 솟은 듯했다.

“알겠네. 한번 해보세. 미친개를 한번 꺾어 보자고.”

우리는 의기투합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박 부장이 말했다.

“자, 오늘 새로운 사람도 왔으니 회식이다.”

***

회식을 끝내고, 박 부장이 말했다.

“자, 그럼 혜주 씨는 먼저 가요.”

혜주가 물었다.

“부장님은요?”

“우리도 조금만 더 하고 갈 거야. 먼저 퇴근해.”

더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내가 혜주의 등을 떠밀었다.

“피곤했을 텐데, 얼른 가서 쉬어요.”

“네.”

그녀가 일행들과 인사를 했다.

노 과장이 물었다.

“이쪽으로 안 가요? 혜주 씨. 버스정류장 이쪽인데?”

이번에는 노 과장의 등을 떠밀었다.

“다른 볼일이 있나 보죠. 우리 먼저 가요.”

‘보면 모르냐! 인간아. 회식 내내 얼굴이 찌뿌듯하더구먼.’

내 추측에 노 과장이란 사람은 모태솔로였을 것이다.

오늘 자기 때문에 울기까지 했는데.

사람들과 걷다가 박 부장에게 말했다.

“저 잠시 볼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천천히 와도 돼. 자네가 할 일은 많이 없으니.”

일행이 보이지 않을 때 즈음 그녀가 걸어간 길을 뛰어갔다.

회사에서 좀 떨어진 놀이터 벤치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주변 가게로 들어가 바나나 우유를 샀다.

내가 옆으로 다가갔는데도 그녀는 멍하니 앞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벤치 옆에 앉아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어? 성훈 씨. 안 갔어요?”

“소화가 잘 안 돼서요. 산책 나왔어요.”

“그래요? 그렇구나.”

“그런 거죠.”

그녀의 무릎에 사온 바나나우유를 올려놓았다.

그녀가 눈으로 물었다.

‘이게 뭐예요?’

그냥 웃었다.

“바나나 우유.”

“칫!”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서울도 달빛은 밝기만 하네.’

그녀에게 말했다.

“난 속상하면 달달한 게 땡기더라고요.”

잠시 후, 그녀의 어깨가 들썩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오랜만에 정장차림에 풀로 장착해온 보람이 있네.’

나름 현재건설 본사에는 처음 오는 걸음이라, 완전 정장 차림을 하고 왔었다. 손수건도 물론이고.

첫 대면부터 후줄근하게 모습으로, 건설계의 엘리트들에게 꿇리기 싫었던 내 발악이었다.

가만히 울게 내버려 두었다.

아까 회식 때부터 참았던 울음이었다.

회식 내내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게 만들어낸 거짓 웃음임을 어찌 모르랴.

손수건이 축축하게 젖은 뒤에야 그녀는 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물었다.

“성훈 씨는요?”

‘내가 속상할 게 뭐가 있다고.’

“마셨어요.”

“언제요?”

“아침부터 계속 마셨더니, 이제는 속이 더부룩해요.”

“피. 거짓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초라했던 나의 첫 직장 생활이 생각났다.

몰라서 서투르고, 어설퍼서 욕먹었던 그때가 말이다.

사회초년병들이 가장 많이 하는 생각.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데, 나만 힘들어.’

어떤 사람에게는 꾸지람으로 단련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칭찬과 위로가 약이 되기도 한다.

“혜주 씨, 원래 처음이 힘들어요. 많이 아프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만큼 소중해요.”

과연 그녀가 동의를 할 것인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나를 흘겨봤다.

‘당연한 반응이겠지.’

젊음이란 호르몬이 지배하는 시기라서, 대부분의 행동들이 그 분비물의 영향을 받는다.

첫 키스의 느낌을 어렴풋이 떠올리는 사람은 있지만, 어떤 행위가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때의 감미로움은 남아 있지만, 어떻게 그 느낌을 이끌어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때는 뇌가 녹아내려 기억에 없기 때문이다.

‘하긴! 제정신으로 첫 키스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첫 키스 당시, 뇌에서 아드레날린이 콸콸콸 쏟아져 나왔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지.

‘그리고 그 경험은 단 한 번뿐이라는 것도.’

두 번의 세 번의 키스도 황홀할 수는 있지만, 처음의 그 느낌을 따라잡지는 못 한다.

첫 경험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여러 번 혹은 수천 번의 오르가즘을 경험할 수도 있지만, 맨 처음의 가슴 두근거림을 능가하지는 못 한다.

그리고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모든 첫 경험을 스스로 인식하고 진행할 수 있다면, 완벽하게 똑같지는 못할지언정, 그 경로를 따라갈 수는 있고, 완벽한 첫 경험에 근접할 수는 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 달라서 남이 설명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첫 출근의 두근거림과 박동 소리.

그 심장에 새겼던 자신감, 그리고 미래의 희망.

‘세상이 내 능력을 인정할 거야. 모든 사람이 내게 반하고 말 거야.’

그리고 첫 환상의 무참한 깨어짐.

자신의 무지와 나약함을 깨닫게 하는 상사의 첫 꾸지람.

‘그때는 누구나 자신이 병신처럼 느껴지지.’

치욕, 온몸을 뒤틀리게 만드는 모욕감.

기억하고 있다면 두 번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 기를 쓸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인간은 망각으로 인해, 다시 꾸지람을 듣고, 또 실의에 빠진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 나보다 힘든 사람은 없을 거야.’

여성들은 남성보다 그 느낌이 강하다.

남자들의 대부분은 그것이 헛소리라는 것을 군대에서 깨닫고 나온다.

‘아파니까 청춘이라고? 무슨 뻘소리냐!’

아픈 것밖에 기억 안 나는 게 청춘이다.

설명도 해주지 않으면서 틀렸다고 말한다.

칭찬보다는 비난이 앞선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전부 쓰레기가 된다.

처음으로 사회의 쓴물을 마시게 된다.

그러나 정당한 논리를 앞세우지 못한다.

‘결국은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듣게 되지.’

“혜주 씨. 선배들 꼴 보기 싫죠?”

그녀는 빙긋이 웃을 뿐 대답이 없었다.

“정말 꼴 보기 싫은지 확인하러 가 볼까요?”

“네? 지금? 금방 퇴근 하신다 그랬는데. 지금 10시예요”

“일단 가봐요.”

회사 근처에 다다랐을 때, 그녀에게 말했다.

“저기 불 켜 있죠? 지금 남아 있을 사람들은 우리 부서밖에 없어요. 내일 최 이사랑 한판 붙으려면 준비가 철저해야 하거든요.”

“성훈 씨는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얘기를 들어보니, 요즘 맨날 야근한 거 같던데 몰랐어요?”

“진짜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당연하죠. 미안하죠?”

“그러네요. 전 그것도 모르고. 노 과장님 냄새난다 생각했는데.”

“노 과장 냄새는 자기가 잘 안 씻어서 그런 거죠.”

“어쩌죠.”

“어쩌긴요. 미안하면 올라가서 부장님 어깨라도 주물러 드리세요.”

“저 부장님. 무서운데.”

과장도 무서워하는데, 부장은 또 얼마나 무서우랴.

‘노 과장에 비하면 보살이더구만. 보살.’

“혜주 씨, 삼촌들 어깨 주물러 드린 적 있어요?”

“네, 가끔.”

“삼촌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 나이 또래인데 어색할 게 뭐 있는가?

정 어색하면 눈 한 번 딱 감고 들이 밀면 된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일도 아니다.

“당신 같은 미인이 주물러 주는데 싫어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내 말이 맞아요. 중년은 내가 잘 알아요.”

동네 슈퍼에 들러서 간식거리를 사서 올라갔다.

그녀를 보면서 웃었다.

“빈손으로 가면 환영을 못 받겠죠?”

***

승강기에서 내렸을 때, 그녀의 어깨는 다시 처져 있었다.

철썩.

그녀의 등을 때렸다.

“아얏!”

“어깨 펴라고요. 자세가 잡혀야 용기도 나온다고요.”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박 부장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다. 그리고 박 부장은 정말 보살 같은 웃음을 짓고 있다.

노 과장이 투덜거렸다.

“에이, 누구는 우리 팀 최고 미녀가 주무르는데, 나는……”

그러면서 뒤를 쳐다본다.

‘으이구, 이 화상아.’

“선배님. 눈 버립니다.”

뒤돌아보는 그의 목을 원래대로 앞을 보게 꺾었다.

아주 강하게.

으드득!

“윽!”

그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눈은 미녀를 봐야죠. 안 그래요? 선배님.”

그리고 혜주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죠. 혜주 씨.”

넓더란 박 부장의 어깨를 주무르면서도 그녀는 내게 환한 미소를 보냈다.

내일이 되면 또 꼴 보기 싫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다가가기는 훨씬 쉬울 테지.’

그리고 밤새 우리는 최 이사를 맞을 준비를 했다.

***

“잘 있었나, 박 부장.”

오랜만에 보는 최 이사였다.

그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