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23화
실시설계 (03)
살다 보면 관심받지 않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알게 될 때가 있다. 딱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100명이 넘을 것 같은 설계 2팀이 모두 ‘스타타워’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는 사이에 나는 다른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사람을 구해야 해. 쓸 만한 사람을.’
이곳은 적진의 한복판이었고, 나는 혼자였다.
아무리 마스터키를 쥐고 있는 갑이면 뭐하나, 물량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일전에 만난 최 이사라는 사람도 만만치 않아 보였는데.’
당시에는 내 안마당이었지만, 이곳은 그의 안마당이었다.
매번 찾아와서 시비를 건다는 것을 봤을 때, 그는 현장 상황에 능통한 사람이며, ‘스타타워’의 시공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관심도 없는데, 와서 딴지를 걸 리가 없지.’
잠시 만난 최 이사라는 사람은 순수한 정면 돌파로 이겨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를 맞이할 준비가 필요했다.
아까 곽 이사를 따라 들어간 박 부장을 비롯하여, 내 앞에 있는 노 과장을 포함한 대략 10명 정도의 사람들, 즉 이 파티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 ‘스타타워’에 할당된 인원이었다.
모든 사람과 친해지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일단 몇 명을 선별하기로 했다.
‘방금 봐서 알 수는 없지만 노 과장의 행동으로 봤을 때는 실력이 있거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대기업의 부장 직함은 아무나 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백전노장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부하 직원에게 인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능력을 알 수 있다.
노 과장은 다른 직원들에게 이리저리 일거리를 분배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제법 일머리를 알고 있어.’
나머지는 노 과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굳이 그들 외에 눈에 띄는 사람을 꼽자면 100명 중의 홍일점인 한혜주 정도였다.
아까의 꾸중은 극복을 한 것인지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귀를 쫑긋하고 있었다. 복사기를 돌리면서도 말이다.
‘저러기도 쉽지 않은데.’
슬그머니 일어나 중앙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며 다른 부서들을 훔쳐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내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열정적으로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는 사람, 뭔가 일방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갑질을 하는 것 같다.
“과장님, 이 단가로 안 돼요. 더 낮춰서 다시 보내세요.”
팩스로 온 종이를 흔들면서 항의를 하고 있다.
‘저 단가 픽스 안 시키면 오늘 깨지겠네.’
수화기를 놓으면 한숨을 푹 쉰다.
대기업 직원들의 갑질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접대나 떡값 말고는 대부분 상사의 지시에 의한 경우이다. 욕먹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들도 불쌍한 사람들이다.
멍하니 모니터를 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별 통보라도 받은 모양이지.’
개중에는 진지하게 모니터를 보는 사람도 있었다. 영어로 된 바탕에 구조도가 그려져 있고, 실제 사진이 보인다. 그 와중에도 공부를 하는 모양이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이 눈에 띄었다.
‘봐두기만 하자. 나중에 충원할 때, 저 사람들을 우선으로 뽑아달라고 해야지.’
회사는 전쟁터의 축소판이다. 죽거나 살아남거나.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쓸 만한 사람들도 있고, 큰 도움 안 되는 사람도 있다. 또한 각자의 사정이 있다.
‘그 각자의 사정을 알게 되면 이해를 할 수밖에 없기에, 오너들은 그것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영원한 이별은 있어도, 영원한 만남은 없다.
숫자로만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파티션 사이를 걷는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
“성훈 군, 우리끼리 잠깐 회의를 좀 해야겠군. 이해해 주게나.”
부하들을 불러 회의실로 밀어 넣으며 박 부장이 한 말이었다.
그리고 혜주를 불렀다.
“혜주 씨도 복사 다 하면 들어와.”
“네! 부장님.”
잠시 후 그녀는 작업이 끝난 복사물들을 노 과장의 책상에 얹어 놓았다.
회의실로 들어가기 전,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청춘은, 그리고 수습사원은 극복해야 할 것이 많다. 그중에서도 수위에 꼽으라고 하면 꾸지람에 대한 공포일 것이다.
‘그래도 스스로 잘 극복하네. 대단해.’
옆에서 보고 있는 내가 짠해졌다.
도산 소장이 말했었다.
‘네 주변이 있는 사람들, 다 너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생각해라.’
그런 충고가 필요 없을 정도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나보다 스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알아주는 명문대를 나왔고, 학점이 좋았던 사람들.
현재건설은 어설픈 대학으로는 명함도 내밀기 힘든 곳이었다.
‘여기는 보고(寶庫)다. 인재의 보고.’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 현재건설에 들어와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었다.
‘명문대를 나왔다고 하면 일단은 성실하지.’
명문대를 나오지 못한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성실하지 못하다고 확신하느냐는 질문에는 딱히 할 말이 없다.
그저 결과가 그것을 말해준다고 변명할 수밖에.
부모 말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해야 명문대를 갈 수 있다. 실제로 현실이 그랬다.
그렇게 말 잘 듣는 사람이 돈 준다고 하는데 말을 안 들을까? 물론 반골기질이 있는 천재가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비한 확률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나도 확실히 나이를 먹었어.’
여기 있는 인재들 몇 명만 데리고 있어도, 중소기업 하나 먹여 살리는 건 문제가 안 될지도 모른다.
명문대 나와서 대기업에 들어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거칠고 거친 남자들의 틈새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다른 곳은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내가 체험한 건설계통은 군대 저리가라 할 정도로 군기가 강하다.
‘졸라 빡세지!’
정말 정신력이 강하거나, 깡이 좋지 않은 한은 거의 버텨내기 어려울 정도다.
코피 터져 가며, 공부하는 정신력은 되어야 버틸 수 있다. 그건 어느 계통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건설계통도 무시할 수 없다.
대부분의 현장 기사들은 영하의 추위에도, 폭염의 더위에도, 심지어 장마가 몰아쳐도 기둥뿌리가 뽑힐 정도가 아니라면 작업을 진행한다.
어떻게 가능하냐고?
장마가 오기 전에 일할 거리를 만들어 둔다.
창호를 다 설치하고, 틈새 벌어진 곳은 미장질하고, 다음 공정이 진행되도록 단속을 해둔다.
그렇게 공기를 맞추지 못하는 현장기사는 자격이 없다고 판단된다. 회사에 손실을 어마어마하게 입히는 암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창호공사가 하루만 늦어서 장맛비가 실내에 들이치면, 장마가 끝날 때까지 아무 일도 못 하고 쉬어야 한다. 물론 욕은 죽도록 먹을 것이다.
그 전날 술을 새벽 3시까지 마셔도, 밤새 야근을 했어도 그들은 새벽 5시가 되면 눈을 떠야 한다.
아침 점호에 나가서 작업자들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제의 과음으로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은 없는지, 몸이 아픈 사람은 없는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들을 선별하는 걸로 생각한다면 아주 큰 착각이다.
현장에서 물건이 파손되는 것은 그러려니 한다. 돈으로 대체가 되기 때문이다.
혹시나 아픈 사람이 안 아픈 척 일을 하다가, 공사 중에 발이라도 헛디디면 사고로 이어진다.
보상의 문제가 생기고, 담당자의 과실로 이어진다.
운이 안 좋아서 작업자가 사망하기라도 하면,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 결국 일을 못 한다. 회사는 손해를 본다.
철저하게 자본주의 논리지만, 그 논리가 사람의 안전과도 연결된다.
자기 자신은 아파도 못 쉬지만, 다른 사람들은 쉬게 하는, 그런 투철한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 현장기사들이다.
***
“전무님, 드디어 왔습니다.”
“수고했어. 곽 이사. 이제 좀 편해지겠네.”
“말도 마십시오. 최 이사 때문에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을 거야. 서전무가 없으니, 어떻게라도 혼자 살아남아야겠지.”
“요즘 들어 더 나대는 것 같아서 꼴 보기 싫어 죽겠습니다.”
“내일 온다고 했나?”
“네, 흐흐흐. 미친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이지요.”
자신이 당했을 때는 죽을 맛이었지만, 이제는 남의 일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이 되니 곽 이사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자네 말대로 될까?”
“될 겁니다. 보통이 넘습니다. 우리는 싸움 붙여놓고 구경만 하면 됩니다.”
그는 쿠웨이트에서 한국으로 도착하자마자 황 전무에게 보고를 했다.
물론 무릎 꿇고 빌었다는 것과 왕 회장 핏줄로 보인다는 자신의 추측은 빼고 말이다.
전자는 부끄러웠고, 후자는 자기만 잘 보이면 된다는 심보 때문이었다.
‘굳이 심복이 둘이나 될 필요가 있을까? 나중에 왜 말 안 했냐고 하면 추측일 뿐이었다고 둘러대면 되지.’
성훈이 직접 말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가치가 있는 법이다.
***
한편.
노 과장이 분통을 터뜨렸다.
“부장님. 이게 말이 됩니까? 저런 새파란 친구랑 무슨 의논을 합니까?”
“어떡하냐. 원설계자인데.”
“곽 이사님이 적어도 중간에 조율을 해주거나, 그 교수라는 사람을 데려와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럼 노 과장, 네가 직접 가서 말하든가!”
“곽 이사 완전 미친 거 아닙니까! 아무리 최 이사랑 부딪치는 게 싫어도 그렇지.”
박 부장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럴수록 노 과장은 더 화가 나는 모양이다.
“아오, 씨발! 곽 이사 아까 표정 보셨죠? 아주 큰 똥 치운 것마냥 속 시원해 하던데.”
“노 과장, 말 좀 가려서 해라. 아가씨도 있는데.”
박 부장은 노 과장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혜주 씨는 방금 한 말, 못 들은 걸로 해줘. 그리고 자네들도 여기서 들은 말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부하들이었다.
하루 이틀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후.”
한숨을 푹 쉬며 박 부장이 말을 이었다.
“일단 명령이 하달되었으니, 지켜보자. 과연 들을 가치가 있는 명령이었는지, 아닌지. 그 뒤에 판단해도 안 늦다.”
“당장 내일 아침에 최 이사가 이빨 들이밀 텐데, 그런 말씀이 나오십니까?”
“야, 임마!”
결국은 박 부장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
“물려도 내가 물리는데, 왜 니가 나서서 지랄이야! 지랄이. 난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아냐? 곽 이사 성격 몰라?”
“그래도 부장님.”
“으이구, 인간아. 나이를 먹었으면 철 좀 들어라. 여기가 현장이냐?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친 거냐? 응?”
노 과장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 이야기 나누는 것 같더니. 어떤 친구야.”
“현장경험은 좀 있는 것 같은데, 어린 친구가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어요.”
박 부장이 한숨 쉬었다.
당장 내일 최 이사가 들이닥칠 텐데, 적당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방패막이가 되어야 할 곽 이사는 원설계자 왔다고 발뺌을 하질 않나. 정작 원설계자는 너무 경험이 없어 보이니, 내일 희생양은 자신이 될 것이 뻔했다.
“다른 사람은? 저 친구랑 이야기 해본 사람 없어?”
혜주가 말했다.
“저…… 아까 올 때 잠깐 이야기했었는데요.”
“응. 그런데?”
“현장을 잘 아는 분위기이던데요?”
그 말을 하는 한혜주 자체가 현장을 안 겪어 봤으니, 그 말에 얼마나 신뢰가 가겠는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자세히 말해보게.”
노 과장의 급한 성격이 또 나왔다.
“한혜주 씨. 그걸 미주알고주알 다 말한 거야? 내가 그만큼 극비라고 했는데.”
“하지만 과장님. 그 건으로 왔다고 했어요.”
“선임자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혜주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했지만, 노 과장의 윽박이 만만치 않았다.
억울하기도 하고, 매번 자신을 몰아붙이는 노 과장이 원망스러웠다.
‘부장님이 말하래서 말한 것뿐인데.’
결국은 자신의 잘못된 점만 드러난 꼴이 되었다.
박 부장이 노 과장의 말을 잘랐다.
“자넨 그 성격부터 좀 고쳐.”
“하지만 부장님.”
“너 때문에 반년을 버티는 놈들이 없어. 너부터 죽고 싶어!”
장혜주가 이 부서로 배정을 받은 것도 결국은 노 과장의 닦달에 걸핏하면 결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노 과장, 너 데리고 있다가 내가 늙는다. 늙어.”
한혜주가 벌떡 일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혜주에게 쏠렸다.
“부장님,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박 부장이 손을 내저었다.
“그래. 얼른 나가 봐.”
혜주가 나가자마자, 박 부장이 과장에게 고함을 버럭 질렀다.
“너 이 자식. 내가 애 울리지 말랬지. 이리 와!”
“부장님. 애들도 있는데.”
박 부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야, 새끼야. 애들 앞에서 맞는 게 처음도 아니고. 너, 나하고 내외하냐? 얘들 내보내고 죽을래? 한 대 맞고 말래.”
노 과장이 박 부장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좌중을 향해 말했다.
“눈 감아. 자식들아.”
빡.
“으극!”
노 과장이 정강이를 쥐고 팔짝팔짝 뛰었다.
“눈 안 감아? 이 자식들아.”
“노 과장 너. 혜주 돌아오면 사과해라. 안 그럼 내 손에 죽는다.”
노 과장이 자리에 앉자 박 부장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냐? 저 친구. 승산이 있어 보이냐?”
“혜주 말을 들어보면 뭔가 있기는 한데, 일단 말을 섞어 보면 알겠죠.”
박 부장이 회의를 마쳤다.
“나머진 나가고, 성훈이란 친구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
현장이나 사무실이나 현장 사람들은 다 거기서 거기다.
건설이라는 곳 자체가 현장을 모르면 이야기가 안 통하고, 그러기에 다 한 번씩은 현장을 거치고 오기 때문이리라.
왜 이렇게 폭력적이냐고?
1990년대의 건설업체들은 거의 대부분 그랬다. 그리고 그 관행은 꽤 오랫동안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