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22화
실시설계 (02)
현재건설 본사 1층 안내판에는 11층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계 2팀이 아예 한 층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확실히 1군 업체는 규모가 다르네.’
지난 삶에서 아파트에 납품하는 특판 가구 일을 할 때도 건설업체 본사를 방문할 일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전부였다.
긴장할 법도 했지만, 이번에는 크게 긴장되지 않았다.
‘입장이 다르잖아. 이번에는 내가 갑이라고.’
이리저리 흔들면 흔들리던 지난 삶과는 많이 다르다.
격세지감이랄까?
과거의 나는 항상 주눅이 들어 있었다. ‘들어주기 어려운 것을 요구하면 어떻게 요령 있게 거절을 해야 하나’ 하는 매뉴얼을 만들 정도였다. 물론 그마저도 상대가 강하게 푸시를 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지만 말이다.
띵.
11층에서 승강기 문이 열렸다.
문 앞에 바로 로비가 있고, 승강기 바로 앞쪽에 여닫이로 된 유리문이 있었다.
창도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직원들의 부산한 모습이 보인다. 그럼에도 출입문에서 조금 떨어진 뒤쪽에는 천정까지 닿은 파티션이 있어서, 직원들에게 방문자들의 모습이 바로 보이지는 않도록 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출입에 신경이 쓰일 수가 있으니, 직원들의 작업 효율을 배려한 모습이었다.
‘이제 한동안 여기서 지지고 볶고 해야 하는 건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다잡았다.
‘전심전력 무소불위(全心全力 無所不爲).’
하고자 심력을 다하면 못할 것이 없다.
기죽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툭.
“죄송…… 어머.”
내가 다른 생각을 하던 사이에 옆 승강기가 올라왔던 모양이다. 서류를 한가득 들고 오던 여자와 부딪쳤다.
그녀가 말하는 사이에도 턱과 양손으로 받치고 있던 서류가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여성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에는 여러 색깔의 실 핀이 꽂혀 있는 모습이 뭔가 모르게 언밸런스했다.
원숙한 커리어우먼이라기보다는 이제 막 졸업한 신입의 모습으로 보였다. 하지만 감상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머뭇하다가는 로비 전체에 문서들이 깔려 버릴 테니.
내가 대기업 회장 아들이면 드라마틱한 전개였겠지만, 지금은 현실이었다.
그녀는 곧 사방으로 흩어질 서류들을 상상하며,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이것 봐요. 아가씨! 아직 떨어진 것도 아닌데.’
다급히 그녀의 앞으로 넘어지는 서류들을 가슴으로 받으며 두 팔을 그녀의 손가락 아래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서류들을 양팔로 고정시켰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네.’
어쩜 그때는 번개같이 움직였던지.
그녀의 턱까지 차있던 서류더미들이 차례대로 촤르륵 내 가슴께로 미끄러져 안착했다.
그녀는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본다.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길 바란 건 아니죠? 네?”
그녀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어머. 죄송해요.”
정신을 차리고는 내 쪽으로 몸을 밀며 말을 이었다.
“제가 받을 테니, 이쪽으로 넘기세요.”
‘어라. 흥미로운 친구일세.’
뭐랄까.
요전 여행부터 느낀 거지만, 지금의 나는 지난 삶의 김성훈과는 많이 달랐다. 지금 나이 대를 비교한다면 말이다.
그때의 나는 한석과 비슷한 부류의 남자였다.
한없이 가볍고, 여자를 밝히는 그런 젊은 남자.
소피아를 만나면서 느낀 거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물론 욕망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여자를 만나면 흥분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모든 여자를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소피아만 해도, 그녀를 바라보며 음심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작품 혹은 지켜줘야 할 여동생 정도로 봐왔던 것 같다.
지금 이 여자를 보는 것도 딱 그랬다.
‘막둥이 여동생을 보는 느낌이랄까.’
연년생이라면 죽어라고 싸우겠지만, 나처럼 정신적으로 나이 차이가 나서야, 귀엽기만 했다. 지금 내 정신연령은 44을 막 넘어서고 있다.
‘이러다가 내 나이 또래랑은 연애 한 번 못 해보는 거 아니야!’
물론 실제 나이로는 별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수습사원으로 들어왔다면, 내 앞의 여자는 한국 나이로 23 혹은 24이겠지.
어깨까지 올 법한 단발머리를 질끈 묶은 160 정도의 여자였다. 뽀얀 피부에 외까풀의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럼에도 자기 일에 책임감을 가진다는 것은 굉장히 바람직하지 않은가?
미모만을 믿고 민폐를 끼치는 여자들에 비하면 말이다.
기특해 보였다.
‘가다가 또 흘릴 것 같은데, 내가 불안해서 못 주겠네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왕 제 쪽으로 넘어온 김에 들어다 드릴게요. 멍하니 있던 제 잘못도 있어요.”
“미안해서 어떡해요.”
“앞장서세요. 전 방향을 모르니.”
그녀가 인사를 하고는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못 봤던 분 같은데, 누굴 찾아오신 건가요?”
“네, 설계 2팀을 찾아왔습니다. 곽 이사님께서 그 팀에서 ‘구조설계건’을 진행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설계 2팀인데, 구조설계 건요?”
“네, 경남구조대전에 출품했었던…….”
“아! ‘밀레니엄 스타타워’ 말씀하시는 거구나.”
‘햐. 이름 한번 거창하게 지었네.’
이 당시 서기 2000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면서 별의별 유행어가 많이 나왔었지만, 가장 기억나는 건 아무래도 밀레니엄과 Y2K가 아닐까 싶다.
내가 알던 그때와 지금은 아직은 변한 것이 별로 없었다.
걸어가며 물었다.
“실시설계는 어느 정도 진행이 되었나요?”
요약된 곽 이사의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실무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 현장감이 있을 것이다.
“저, 아직 들어온 지 사흘밖에 안 돼서 잘 몰라요.”
“아는 대로만 말해봐요.”
갑작스레 도움이 된 나에게 그녀는 호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그 건의 관계자인 것도 경계를 푸는 데 한몫을 했겠지만 말이다.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들리지도 않을 테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시면 안 돼요. 알았죠?”
배에서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곽 이사님께서 부장님을 미친 듯이 쪼아대신데요. 그래서 진척은 좀 되고 있는데, 그걸 현장 쪽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운가 봐요.”
왜 현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처음 보는 공법을 쓰게 되면, 직공들이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니까, 공사가 지연이 되겠죠. 교육도 뒤따라야 하구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맞장구쳤다.
“어머. 제 또래로 보이시는데, 현장을 잘 아시네요. 최 이사님이 부장님께 하던 말씀을 그대로 하시네요. 표현은 좀 거칠었지만요.”
표현 방법만 다를 뿐, 주된 골자는 별로 다르지 않을 터였다.
현장의 공기(工期:공사기간)가 정해지면, 그들은 그것을 좀 더 줄이는데 전력투구해야 하는데, 다른 일이 생기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다. 현장의 입장에서 볼 때, 공기를 지연시키는 모든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분류된다.
모든 것은 실적으로 평가되고, 그 실적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공기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꼼꼼하게 공사를 진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비용을 얼마만큼 절감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의 비중은 공기단축만 못하다.*
“현장을 담당하실 책임자는 누구신가요?”
“아직 딱히 정해진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대표로 난리치시는 분이 최 이사님이시니, 그분이 아니실까요? 현장 쪽은 그분이 꽉 쥐고 계신 것 같았어요.”
그때 나와 저작권으로 싸운 그 최 이사를 말하는 건가?
“혹시 키 작고 땅땅하게 생기신 그분요?”
“아시네요. 네. 그분요.”
“흠. 한 팀에서 맡아서 진행하는 거 아닌가요?”
“저도 수습사원이라 정확한 건 몰라요. 대략 수주를 해온 이사님을 중심으로 일이 진행되기는 하는데. 결국 일의 분배를 결정하시는 건 사장님이시니까요.”
사흘밖에 안 되었다는데, 제법 알고 있는 것이 많았다.
정보의 정확도 여부를 떠나서, 이 정도 흐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일에 관심이 있고, 항상 귀를 열고 있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제대로 잘만 크면 쓸 만한 재목이 되겠네.’
나도 현재건설의 시스템은 잘 모른다. 이제부터 알아가야 할 것이다.
그녀에게 흥미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애당초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건설에 여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흥밋거리였다.
그녀에게서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서류들의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았다.
그녀보다 상사로 보이는 사람이 모니터에 눈을 박고 도면을 변경하고 있었다.
“노 과장님. 가져왔어요.”
그제서야 인기척을 느낀 과장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내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그녀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냈다.
“한혜주 씨. 밀레니엄 프로젝트, 극비란 거 몰라?”
극비라고까지 할 것이 있나?
하지만 과장은 입장이 다른 모양이었다.
혜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게…….”
수습들은 원래 고참 앞에 서면 반사적으로 주눅이 든다.
거침없이 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젊음의 특성상 브레이크를 잡을 줄 모르기에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듣는다.
과장에게 말했다.
“저에게는 비밀로 하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의 눈은 ‘왜? 넌 특별하냐?’냐고 묻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예의를 지킬 뿐이었다.
“경남구조대전 대상작 원설계자입니다.”
과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그러셨습니까? 오늘 오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이번에 새로운 공법이 적용될 것 같은데, 외부로 새어 나가면 곤란하기 때문에 부서 전체가 좀 민감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런 사정이라면야. 참. 곽 이사님을 만나 뵙기로 했는데.”
“곽 이사님과 저희 부장님은 회의에 들어가셔서 좀 있다가 오실 겁니다. 잠시 앉아 계시죠. 노진광 과장입니다.”
자리를 권하고는 그는 냉장고로 향했다.
“혜주 씨는 저 파일들 복사하고.”
과장이 아침햇살 2병을 가지고 왔고, 나는 그에게 진척 상황을 다시 물었다.
혜주에게 설명을 들었지만, 이미 주눅이 든 것 같은데 입 싸다고 다시 한 번 그녀에게 혼날 거리를 제공할 필요는 없었다. 아까도 당황해서 눈물을 쏟을 것 같았는데.
과장이 하는 말은 혜주의 말과 거의 비슷했다.
* * *
곽 이사는 악수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아이고, 성훈 군. 얼마나 내가 자네를 기다렸는지 아나?”
그의 친근한 행동에 사람들의 표정이 벙쪘다.
“소개하지. 지금 진행 중인 ‘밀레니엄 스타타워’의 원설계자 중의 한 사람이라네.”
곽 이사는 황당한 사람들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박 부장!”
“네, 이사님.”
“앞으로 모든! 구조 안건에 관해서는 여기, 성훈 군과 상의해.”
“네? 이사님. 어린 친구지 않습니까? 그렇게 간단한…….”
곽 이사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해.”
내 쪽을 보고 있지 않아서 표정은 알 수 없지만, 묵은 변을 내보낸 듯한 상쾌한 목소리였다.
“이사님…….”
“그렇게 알고 작업 시작해. 박 부장. 자넨 따라오고.”
박 부장이 곽 이사 뒤를 서둘러 따라갔다.
노 과장이 말했다.
“일단 성훈 씨는 좀 쉬고 계세요. 부장님 나오시면, 따로 회의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도 나는 외부인이었다.
* * *
“전무님께 보고드리러 가야 하니. 짧게 얘기해.”
“이사님, 최 이사님 닦달을 저보고 어떻게 감당하라고.”
“이 멍충아. 원설계자 왔잖아. 그 쪽으로 토스해.”
“그게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설계가 바뀌기라도 하면, 지금까지 한 거 몽땅!”
“자넨 저 친구가 어려 보여서 걱정하는 거지?”
박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진행해 본 바로는, 상당히 실용가능성이 있는 구조공법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좀 더 연구와 실용화가 필요합니다만.”
그동안 최 이사에 의해서 무산된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곽 이사가 서류철을 들며 물었다.
“최 이사 그 인간, 출장 갔다가 언제 온다고 했지?”
“내일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박 부장의 대답에 곽 이사의 광대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래?”
“이사님, 그렇게 웃으실 일이 아니란 것 알고 계시잖습니까?”
하지만 곽 이사는 떠오른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안 겪어본 놈은 절대 모르지. 저놈이 어떤 놈인지!’
오히려 박 부장을 타박했다.
“자넨 해보지도 않고 그렇게 겁을 내나!”
‘자기도 최 이사 오면 피하기 바쁘면서!’
상사의 흠을 솔직히 말하는 것은 자신의 명을 줄이는 것이라 박 부장은 신음성을 흘리며 참았다.
“끙.”
“박 부장. 저 친구 액면 그대로 보지 말게.”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겪어보면 금방 알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말고, 넘겨.”
곽 이사는 박 부장의 등을 떠밀며, 방을 나갔다.
<작가주>
일 년에 1,000억짜리 공사를 진행한다고 할 때, 굉장히 공사를 꼼꼼하게 잘했고, 공정의 효율을 높여서 1억의 비용을 절감한 현장소장 A가 있다.
그리고 꼼꼼하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공기를 한 달 줄인 현장소장 B가 있다.
결과를 두고 봤을 때, 사장이라면 누구를 칭찬하겠는가?
아마도 B일 것이다.
시간은 곧 돈이다.
1,000억의 일 년 이자 10%라면 100억이다.
하루에 나가는 이자비용이 대략 2,750만 원이다.
11일만 공기를 단축시켜도 3억을 절감하는 효과가 난다.
한 달을 단축시키면, 거의 8억이 넘는 효과가 난다.
또한 그만큼 빨리 분양해서 현금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 현장의 공정들은 공기단축에 집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