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20화
힐링 여행(10)
귄터가 날 보며 빙긋이 웃는다.
“성훈. 부탁이 있네.”
“뭡니까?”
“소피아를 집에 좀 데려다 주겠나. 잔소리가 심해서 명줄이 줄어드는 느낌이야.”
“당신 때문에 소피아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가 몸살을 앓는 동안, 그녀는 귄터를 간호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원래 이 나이가 되면 다 그런 것을. 쓸데없는 걱정을.”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늙어지면 쓸데없는 자존심이 생기는 모양이다.
귄터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성훈. 왜 웃나?”
“전 당신처럼 늙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당연하지. 나처럼 늙으면 안 돼. 꼰대밖에 더 되겠냐?”
“훗.”
내 웃음에 그도 웃으며 말했다.
“싱겁기는.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이 의자는 자네가 가져가게나. 마음에 들어했잖나.”
“왜요? 필요해서 만드신 거 아닙니까?”
“만들고 나니, 필요가 없어졌어. 내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말야.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가져가.”
‘고집 센 늙은이, 전해 달라고 하면 될 것을.’
내 것은 아니지만, 전달자의 역할은 할 수 있으리라.
“가면 아드님을 만나게 될 텐데, 안부도 전해 드릴까요?”
“흥. 궁금해하지도 않을게야. 신경 쓰지 말게.”
“그래도 하나만 전해야 할 것이 있다면요.”
귄터는 눈을 감고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잘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이대로만 해라고 하게.”
***
‘귄터&프란쯔’ 사장실에 도착했다.
“당신들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야. 이대로 회사를 말아먹자는 건가?”
문 밖에까지 쩌렁쩌렁하는 고함소리가 울려 나왔다.
여비서가 머쓱한 듯 웃으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지금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듯했다.
소피아도 익히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기다릴게요. 에린.”
“감사합니다. 아가씨. 차를 내오겠습니다.”
그녀가 차를 내오는 동안에도 고성은 끊이지 않았다.
“지금 우리 회사는 생존의 기로에 서 있어.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하지 말고, 대안을 가져오란 말이야. 다음 회의 때까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면, 당신들부터 모가지 날아갈 줄 알아. 다들 나가봐.”
인터폰으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린, 시원한 물 한 잔 갖다 주게.
에린은 이미 물잔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같이 들어가시죠. 아가씨.”
그는 소파에 앉아 이마의 땀을 닦으며, 비서와 이야기 중이었다.
“오. 소피아. 어쩐 일이냐?”
방금 전에 화를 내며 고함치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모습이었다.
“할아버지에게 다녀왔어요.”
“흠. 그래?”
“안 궁금하세요?”
“뭐. 잘 지내시겠지.”
애써 궁금함을 참으며 말하지 않는 모습이 어찌 저리 귄터와 똑같을 수 있는지.
“같이 온 사람은 누구냐?”
소피아는 나와 그를 소개시켜 줬다.
“오호, 그래요?”
그는 내가 알고 있던 냉혈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상당히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사업 쪽에서만 그런 모습을 보이는가 보군.’
상당히 자기 자신을 잘 절제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어쩐 일로. 지금 시간을 많이 낼 수는 없는데.”
“귄터가 전해 주라고 한 겁니다.”
물론 귄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지만, 일단 확인을 하려면 만나야 할 것이다. 만난 뒤에는 확인유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예상외의 말에 그는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그의 앞에서 조립을 했다.
별로 시간 걸리는 것도 아니었다.
“흔들의자로군. 날개가 달린. 너도 늙었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
실망감을 가슴에 숨긴 채 그는 말을 이었다.
“고맙다고 전해 주게.”
“그냥 흔들의자로 보이십니까?”
성훈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얼굴에 슬쩍 불쾌함이 스쳐 지나 갔다.
“애써서 가져와 주었는데, 미안하게 됐군. 지금은 시간이.”
“다른 용도도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놀리는 건 그 정도로 해두고. 용건만 말하게.”
비웃음을 날리는 그를 바라보면 흔들의자 뒤에 섰다.
등받이를 뽑아냈다.
그는 내가 뭘 하자는 건지 보기나 하겠다면 팔짱을 낀다.
두개의 팔걸이를 빼서 양쪽의 컵받이 끝의 구멍에 꽂았다. 그리고 이단으로 된 등받이 상부를 분리하여 엉덩이 판 앞쪽의 구멍에 끼워 넣었다.
흔들의자는 사라지고, 요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엇!”
모두의 시선이 성훈에게 향했다.
비서가 말했다.
“사장님, 저건 흔들 요람이 아닙니까.”
“음…….”
“저런 제품을 시장에 내보낸다면 충분히 소비자들에게 어필…….”
“알고 있어!”
그는 비서에게 일갈했다.
“자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가?”
성훈은 귄터가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해주기로 했다.
“곧 아기가 태어날 거라고, 축하한다고 하더군요.”
“정말인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네, 하지만 전해 줄 방법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귄터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귄터가 엉덩이를 걸치고 쉬던 그 자리에 그의 손주가 등을 눕히게 될 것이다. 사람의 진심은 그렇게 이어진다.
귄터의 진심은 이미 아들에게 전해졌다.
사장이 코끝을 어루만지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훅…….”
요람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흠…….”
사무실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그는 아랫입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고개를 반쯤 숙이다가 문을 바라본다.
“저, 사장님.”
비서가 근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다시 급히 창밖으로 흐르는 구름을 주시한다.
사장이 말했다.
“비서. 자네는 소피를 데리고 좀 나가 주겠나.”
사장은 다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흠…….”
입술을 말아 물고 잘근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사장이 말을 꺼냈다.
“그걸 이리 좀 가져다주겠나.”
가져온 흔들 요람을 손으로 슬쩍 밀며 말한다.
“앉게나. 젊은이.”
또다시 침묵.
무뚝뚝한 얼굴로 두 손을 모아 코앞에서 꼼지락거린다.
그저 말없이 요람을 주시할 뿐이다.
“아버지께서 나에 대해 뭐라 하시던가?”
“괘씸한 놈이라 욕하시더군요.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이라고요.”
귄터의 말을 하나도 가감 없이 전했다.
“크크큭. 아버지라면 그러셨을 테지.”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그런 결단을 했을 뿐이네.”
나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냥 그의 차가운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풀었다가 다시 합쳤다.
“그때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어.”
“…….”
그가 모은 두 손에 이마를 갖다 대며 고개를 숙였다.
“큭…… 아버지에게 차마 말하지 못할 이야기들도 있었지. 그들은 아버지가 평생을 믿고 신뢰해 온 사람들이었어. 그들의 부정을 차마…….”
“하지만 진실을 말해줄 수도 있었잖아요.”
“아닐세. 아버지는 그걸 들을 상황이 아니셨지.”
오해는 시간이 묵으면 강해지는 마물이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 버린 거군요.”
“그렇게 된 거지. 살아남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이제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더군.”
“하지만 이제는 모두 지난 일들이 되어버렸으니,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럴까?”
“귄터가 이 말은 꼭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내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잘해 왔으니, 앞으로도 이대로만 하랍니다.”
그 말을 들은 사장은 옆의 요람을 손으로 밀었다.
요람이 시계추처럼 흔들리며, 제자리를 왔다 갔다 한다.
사장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건강하시겠지?”
그는 힘겨운 듯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내가 그를 탓할 이유는 없었다.
각자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었을 테니까.
“아마 지금쯤 몸져누우셨을 겁니다. 오기 전에 몸살을 아주 심하게 앓으셨거든요. 저것도 마지막 작품이 아니겠냐고 하시던걸요.”
그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참으려는 듯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지만, 흰 자위는 붉게 변해 있었다.
“소피아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괜찮은 척하셨지만, 이제 나이가 있으신 만큼…….”
눈자위를 꿈틀거리며 그가 다시 물었다.
“정말인가?”
그를 보는 대신, 요람으로 눈길을 보냈다.
“저걸 꼭 완성하고 싶어 하셨거든요. 직접 전해 주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요.”
“왜?”
왜 직접 전해 주지 않는가 하는 말이겠지.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고인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거다.
‘이 단순한 사람들아!’
“그건 아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 당신과 같은 이유겠죠.”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 흔들림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독일의 가구업계를 정복했을까?’
그는 흔들리는 어깨를 감추지 못했다.
폐에서 나오는 소리가 쩍쩍 갈라진다.
“나를 미워하시던가?”
“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큭큭큭. 그러시겠지.”
“하지만…….”
그의 어깨가 멈췄다. 그럼에도 아직은 작은 떨림이 있다.
“제게는 당신에게 미움받는 것이 더 두렵다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어차피 시작한 말, 마저 말해 버리기로 했다.
나직하게 물었다.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티슈를 뽑아 고개 숙인 그에게 내밀었다.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아마도.”
“과연 그럴까?”
그의 목소리에서 망설임이 느껴진다.
“욕을 한 바가지 하시겠죠.”
“그렇겠지.”
“그렇게라도 안아드리면 좋지 않을까요. 이제 내칠 힘도 없으실 테니.”
“그렇게 약해지신 건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중요한 건 둘이 만나는 거지.
나중에는 날 사기꾼이라도 욕해도 상관없다.
그때가 되면, 난 이곳에 없을 테니까.
그는 눈물을 정리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다시 차가운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에게 말했다.
“고맙다는 말을 하실 거면 직접 하시지요.”
“그래야겠지.”
그는 인터폰을 눌렀다.
“차를 준비해. 오늘 일정은 모두 미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난 모습을 보였네. 그리고…… 고맙네.”
그가 악수를 청했다.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
감사를 받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귄터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다.
소중한 것이 뭔지 가르쳐 준 그에 대한 보답이었다.
모든 일에 보상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래도…… 고맙네.”
“알겠습니다. 부디 잘 화해하시길.”
그의 맞잡은 손을 꽉 쥐었다.
입을 꾹 다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아는 아버지와 함께 귄터에게 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귄터가 내심 원하던 것은 잘 전달된 것 같다.
그의 흔들의자는 제대로 된 작품이었다.
욕심은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내 것이 아님에도 탐하면 내 것을 잃게 된다.
“성훈 씨,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사장과 있던 비서가 나를 불렀다.
아까 소피아와 나갔을 때, 내 이야기를 나눴던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아가 전해 드리라 하더군요.”
그가 내민 것은 소피아의 스케치북이었다.
“이걸 왜?”
“찾으러 갈 거라고, 잘 간직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스케치북을 넘겼다.
처음 만났을 때의 롱샹성당부터 시작해서, 오두막, 내 얼굴, 내가 낚시하는 모습, 귄터와 의자를 만들 때의 광경, 눈물자국이 남아 있는 산의 스케치까지.
우리가 만났던 여정이 담겨 있었다.
‘2주간의 일기장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도 소중한 기억이었다.
나는 귄터와 가구를 만드느라, 미처 그림을 그릴 여력이 없었지만, 그녀는 그동안 그림을 그렸던 모양이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그에게 연락처를 남겼다.
“이리로 연락하라고 하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잘 전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목 빠져라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끼어들 자리와 그러지 말아야 할 자리가 있다.
그들만의 오해가 풀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둘이서만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 말이다. 오로지 둘만의 시간을 가지기를 바랐다.
귄터와의 만남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내게는 더없이 소중했다. 그는 진정한 장인이었다. 그에게서 나무를 대하는 자세를 다시 배웠고, 장인의 감각이란 말로는 전할 수 없다는 가르침을 깨달았다.
그 외에도 그가 했던 말들은 내게는 큰 선물이었다.
두 사람의 화해를 봤으면 좋겠지만,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인연이란 술과 같아서 기다림으로 익어간다.
비서가 내 연락처를 받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사장님의 직통 번호입니다.”
고급스러운 금장이 된 명함이었다.
명함을 받자 비서가 말했다.
“제가 공항으로 모시겠습니다. 가시죠.”
리무진을 타며 비서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하다는 말인가?
“큰 어른의 소식을 전해 주신 것 말입니다.”
“아, 네.”
“그분은 제게 삼촌 같으신 분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분 밑에서 가구를 배웠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지금 공장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 ‘귄터&프란쯔’를 처음 시작했던 장인들의 자녀입니다. 사장님께서 가려 뽑으셨죠.”
왜 이런 말을 사장은 하지 않았을까?
귄터가 만약 공장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아들의 진심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친구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님을.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서로를 생각하는 진심보다는-이미 충분했으니-허울이라도 좋으니 사과하는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사랑이 넘쳐나도 상대가 알아주지 못하면, 그것은 공염불만큼이나 무의미하다.
“훗. 계기가 필요했던 거네요. 화해를 할 뭔가가.”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해 주신 큰어른의 작품은 우리 회사의 돌파구가 될 것 같습니다. 그 또한 감사드립니다.”
“전 배달부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역할을 아무도 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저조차도 내쫓기기 일쑤였으니까요.”
사장이 직접 갔으면 결과가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과거의 일일 뿐이다.
‘지금쯤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면서, 욕을 먹고 있겠지!’
상황이 눈에 잡힐 듯 훤하니, 피식하는 웃음이 나왔다.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잘 될 겁니다.”
‘귄터&프란쯔’는 잘될 것이다.
이 브랜드는 이전 삶에서도 유명세를 떨쳤었다.
굳이 나의 ‘배달’이 아니었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했을 것이다.
비서도 동의했다.
“그럴 겁니다. 역시 큰어른의 작품은 예사롭지 않더군요.”
서로 동문서답을 하며 공항에 도착했다.
***
“이제 곧 도착이구나.”
김포공항이 눈에 보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행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