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16화
힐링 여행(06)
6시간을 달려서 프라이부르크 인근의 산에 다다랐다.
산 아래에 작은 호수가 있었다.
“여긴 다행히 잘 기억하고 있네요?”
“매년 방학 때면 여기 와서 할아버지와 함께 했는걸요.”
호수를 잔잔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여기에 오면요. 마음이 편안해져요.”
시야에서 호수가 차지하는 비율이 많아질수록 호수 건너편의 오두막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세요?”
고집쟁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들었다.
“그는 멋있는 고집쟁이에요.”
‘결국은 고집쟁이라는 말이네.’
오두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음, 풍겨 나오는 아우라가 다르네.’
문 앞의 발코니에는 성당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의자가 있었다.
좀 더 투박하지만 나뭇결을 살려낸 방식은 똑같았고, 아름다움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냥 지나갈 수 있나! 앉아 봤다.
‘아, 편안하다. 미치도록 편안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 흔한 쿠션 하나 없이 나무로만 만들어진 의자가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다니.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고 들어가, 주방을 뒤져서 밀가루를 꺼냈다.
새로운 모습이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생긴 여인이 말이다.
열린 문으로 얼굴을 쏙 내밀고는 내게 물었다.
“성훈. 여기서 자고 갈 거죠?”
당연하지! �i아낼 생각이었냐?
“재워만 주신다면.”
오늘도 노숙을 할 수는 없다.
‘아직도 뼈골이 쑤신다고.’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양동이를 내밀었다.
‘이걸 어쩌라고. 다짜고짜 말도 없이.’
“뭘 그렇게 쳐다봐요. 밥값은 해야죠.”
“그러니까. 뭘 어쩌…….”
“수돗가에서 물을 길어오세요.”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요리하려는 거예요? 자신은 있고?”
“매년 방학 때마다 제가 여기 와서 뭘 했을 것 같아요?”
‘하긴. 가구 만드는 건 손도 못 대게 한다고 했지?’
물동이를 들고 수돗가로 갔다.
수동식 양수기가 있었다.
물을 넣고 펌프질을 해서 물을 길어 올렸다.
“여기요.”
그녀는 나에게 낚싯대를 내밀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할아버지는 항상 이러셨어요.”
“…….”
“혹시? 낚시할 줄 몰라요?”
울산 바닷가에서 자란 내가 들을 소리이던가?
뭔가 묘한 기분을 느끼며 큰소리쳤다.
“제일 큰 놈으로 잡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호미와 낚싯대를 들고 갈대가 우거진 곳으로 갔다.
갈대밭 주변의 축축한 땅을 팠다.
그곳에서 찾아야 할 것은 지렁이였다.
“역시…….”
몇 번을 파기도 전에, 꿈틀거리는 생명체가 걸려 올라왔다. 대략 열 마리정도를 집어 미끼통에 집어넣었다.
통나무 카약을 타고, 호수의 외진 곳, 포인트로 향했다.
***
그녀는 오븐에서 빵을 굽고 있었다.
샐러드를 만들 채소들을 썰고 있었다.
“손질은 할 줄 알겠죠?”
“당연히.”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수돗가로 향했다.
***
식사를 마치고, 그녀가 와인을 꺼냈다.
“오늘은 안 들어오실 것 같아요.”
“종종 이렇게 자리를 비우시나요?”
“봐둔 나무가 깊은 곳에 있으면, 종종 이런 경우가 있어요.”
하긴 훔쳐갈 것도 없으니, 마음도 편하겠다.
오히려 불안한 자는 훔쳐갈 것이 있는 사람이었다.
“먼저 나가 있어요. 할아버지 식사만 준비해 놓고 갈게요.”
오두막의 발코니로 나왔다.
여름보다는 겨울의 산속이 더 운치가 있다.
적어도 모기떼는 극성을 부리지 않는다.
해는 벌써 지고, 호수에서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발코니의 벤치에 마주 앉았다.
“맘대로 들어와도 괜찮은가요?”
“그럼요. 할아버지 집도 되지만, 제 집도 되거든요.”
무슨 근거인지는 몰라도 그렇다면 그럴 것이다.
복잡한 생각을 하기가 싫었다.
그의 할아버지 이름은 귄터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도 부계 쪽을 빼닮아서 고집이 세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질 때, 그녀는 다시 내게 머리를 기댔다.
머리에 든 게 많아 기울어지는 건지, 생각에 없어서 바람에 나부끼는 건지 기대기는 참 잘도 기댄다.
그녀를 안아 난로 앞 소파에 뉘였다.
소피아 아래에 누워 나무를 집어넣다가 잠이 들었다.
***
발코니 벤치에 앉아서 새벽안개를 보고 있었다.
환상처럼 일렁거리며 발아래를 잠식한 안개는, 마치 구름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저벅저벅.
누군가가 오두막을 향해 다가왔다.
160 정도의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노인이었다.
얼굴에 약간의 잔주름이 있고, 각진 턱은 그의 성격을 말해주는 듯했다.
소피아 말에 의하면, 나이 80에 가까운 노인일 텐데, 그는 어깨에 자기 키만 한 통나무를 지고 있었다.
노인이 물었다.
“웬 놈이냐?”
완전 독일식의 강직한 억양이었다.
“손님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손님이냐?”
“당신 손녀한테 물어보시지요.”
“내 손녀가 누군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는 것이 뭔가 심사가 상한 듯했다.
자기 집에 남이 들어와 있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피아요.”
“거긴 내 자리다. 비켜라?”
옆으로 비켜섰다.
무슨 할 말이 있을 것인가?
그가 자신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무슨 일이냐? 결혼 허락이라도 받으러 온 거냐?”
‘헉!’
돌직구도 이런 돌직구가!
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귄터가 나타난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인가? 직접적으로 물어야 하는가, 아니라면 에둘러서 물어야 하는가 하는 고민 말이다.
‘이런 상대에게 에둘러서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직구 승부를 하기로 했다.
“아닙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 그가 미간을 좁혔다.
“자네. 나를 아나?”
“아뇨. 오늘 처음 뵈었습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게 있다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상과 다를 수도 있고, 전혀 틀린 추측일 수도 있었다.
그냥 직접적으로 묻고, 반응을 보는 것이 나았다.
“르 꼬르뷔제를 아십니까?”
그의 한쪽 광대가 자신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삽시간에 지나간 일이라 그 자신도 모르는 듯했다.
“흥. 그 유명한 사람을 모를 리가 있나?”
“그럼 조르당을 아십니까?”
이번에는 두 번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곧이어 그보다 더 차가운 말이 튀어나왔다.
“기자 나부랭이냐? 객쩍은 소리를 하려면, 내 집에서 꺼져라.”
소파이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발코니로 나왔다.
“할아버지. 왜 내 손님한테 소리를 질러요?”
“흥.”
소피아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주섬주섬 파이프를 꺼내 물었다.
“넌 그저께쯤에나 온다는 녀석이 왜 지금 온 거냐?”
퉁명스레 말하는 그에게 소피아는 빙긋이 웃으며 옆으로 앉았다. 그리고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롱샹에 다녀오느라 늦었단 말이야.”
소피아가 애교스럽게 말했다.
“용서해 줄 거지? 응!”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밀착하듯 달라붙으며 아양을 떨고 있다.
그녀의 행동에 귄터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호수를 바라보며,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기분나빠하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그래. 별일은 없더냐?”
“의자가 부서져 있었어요?”
“그래! 그럼 가 봐야겠는걸?”
미간을 찌푸리며, 그가 걱정을 했다.
“괜찮아. 안 가도 돼.”
“왜? 부서졌다며.”
소피아와 귄터는 60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보기 좋은 조손사이였다.
“성훈이 고쳤어요.”
“누구?”
소피아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남자.”
그리고 그녀는 우리의 여정을 설명했다.
소피아의 말이 끝날 때 즈음, 그는 파이프 재를 난간에 털며 일어났다.
“그런 놈에 대해서는 알 필요도 없고, 설명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피아가 개구진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내게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어쨌거나 알기는 안다는 말이네. 그죠?”
궁금증이 풀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 것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역시 당신은 아름다워요.”
‘흥. 당연하지’ 하는 표정으로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고마워요.”
“뒷머리에 까치집만 안 지었으면.”
급히 머리를 매만지며 그녀가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들어와요! 커피 물 올려놨어요.”
날 초대한 사람이 꺼지라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으니, 나는 여기에 붙어 있을 권리가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울타리가 있다.
강제로 침입하려 하면 경계가 강해지고 밀어내지만, 물 스미듯 다가가면 어느새 그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때는 �i아내기는 이미 늦어버린 시점이다.
자존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울타리는 굵고 튼튼하다. 그러나 과연 그 틈새까지 촘촘할지는 모르겠다.
‘일단 비비고 들어가 보지. 뭐.’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광경만으로도 충분히 경탄이 나온다. 만족스럽다.
내 앞의 오두막. 그리고 그 뒤에는 수풀로 우거진 산이 있고, 내 옆에는 자그마한 호수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안개로 뒤덮여 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엄마 품속처럼 말이다.
주변을 한번 주욱 훑어보고는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나이 들면 이런 곳에 사는 것도 괜찮겠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
들어가니 소피아는 귄터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성훈은 기자가 아니라고요.”
“안 보니 어떻게 알아?”
“할아버지가 가구 고치는 것을 못 봐서 그래요. 얼마나 꼼꼼한지 몰라요. 그걸 기자가 할 수 있겠어요?”
‘나름 논리적인 설득이기는 한데, 이미 마음을 닫은 사람한테 아무리 말해봐야.’
말하는 사람 입만 아프다.
귄터가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려갈 거면 오늘 내려가게.”
“왜 할아버지 맘대로…….”
“오후에 눈이 심하게 올 것 같거든. 눈 쌓이면 차 못 내려가.”
그녀의 사슴 같은 눈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우린 전우잖아요! 고난의 길을 함께 왔잖아요.’
내가 미녀에게 이리도 약할 줄이야.
난로 옆의 장작을 주워 넣으며 말했다.
“눈 덮인 산장이라, 운치 있겠네요.”
그녀가 승리자의 표정으로 귄터에게 말했다.
“들었죠?”
그리고 내게 부드럽게 물었다.
“성훈? 아메리카노?”
손녀의 호감이 내게로 몰리자 빈정이 상했던 모양이다.
“쳇.”
“귄터는 카푸치노?”
그녀는 남자 둘 사이를 오가며, 어르고 달래고 있다.
“자네가 의자를 고쳤다면서. 제대로 고칠 실력은 되나?”
이상하게 툴툴거리는 목소리인데도 정감이 간다.
“아직 어설프지만, 정성을 다했습니다.”
소피아가 귄터를 살쾡이 눈으로 눈치를 줬지만, 귄터는 본체만체 무시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어디가 부러졌던가?”
“다리 연결대요. 그래서 몽땅 해체를 할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군데군데 흠집도 많았고요.”
고친 과정을 그가 이해할 수 있게끔,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설명을 들은 그는 걱정하며 말했다.
“새로운 목재를 끼워 넣었으면 색깔이 안 맞았을 텐데.”
소피아가 끼어들었다.
“가져오던 물감으로 색상을 맞췄어요. 다음에 귄터가 가면, 어떤 게 부러졌던 건지 구별 못할 걸요.”
‘설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요.’
그녀는 내가 아주 맘에 들었거나, 할아버지에게 지기 싫거나 아마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이니, 지금의 상황에서는 두 번째에 좀 더 많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발코니로 나왔다.
귄터가 지정석에 앉아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고 있었다.
“귄터. 아침에 들고 오셨던 나무는 뭡니까?”
“오후부터 눈이 올 것 같아서 잘라뒀던 나무를 가지고 내려왔다네.”
“뭔가를 만들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냥 궁금해서요.”
“의자라네.”
“저도 같이 해도 될까요?”
내 요청에 그는 나를 다시 쳐다봤다.
‘왜?’냐는 의문일 것이다.
“소피아가 그러더군요. 밥값을 하라고.”
“흥. 맘대로 하게. 할 일도 없을 테니.”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연기를 내뿜었다.
“의자를 일일이 풀어서 사포질을 했다면, 어느 정도 기본은 되어 있겠지?”
민수처럼 그렇게 능숙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장인의 보조 정도는 충분히 할 실력이 되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완전한 겨울이네요.”
오후에나 올 거라던 눈이 벌써 흩날리고 있었다.
“겨울은 생각보다 길다네.”
겨울의 눈 덮인 산장에는 할 이야기가 많다.
며칠을 한 공간에서 생활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서로에 대해 알아야 한다. 알기 위해서는 자신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게 꼭 입으로 나오는 말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우연(偶然)이 겹치고 겹쳐져 인연(因緣)을 만든다.
내가 가지 않았다면, 그녀가 오지 않았다면, 의자가 부서지지 않았다면, 내가 의자를 수리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면.
인연이 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