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15화
힐링 여행(05)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없이 잤네.’
한겨울 눈 오는 산속에서 노숙을 하면서 잘 잤다는 말은 어폐가 있겠지만, 어느 순간 설탕 녹듯이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내 머리에는 베게가, 내 어깨에는 모포가 덮여 있었다.
‘분명히 나무에 앉아서 잠이 들었는데.’
나는 모로 누워서 자고 있었다.
‘베개를 베어준 건가?’
베개를 좀 더 편히 베려고 더듬거리는데, 모닥불이 꺼져가는 것이 보였다.
‘소피아는 추워서 차에 들어간 건가?’
차라고 따뜻할 리는 없다.
히터를 트느라고 시동을 밤새 걸어뒀다간, 기름을 다 써버릴 테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몸을 일으키는데, 뒤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소피아가 나무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이 베게는…….’
그녀의 허벅지였다.
얇은 청바지에서 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어떡하지. 더듬거리기까지 했는데.’
그녀는 잠에 취해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일어나자.”
잠은 이미 충분히 잤다.
한 교수가 얼마나 더 정보를 모았는지 모르겠지만 전화를 걸어봐야 했다.
그나저나 그녀 모르게 실수를 해버렸다.
‘이런 미안해서 어떡하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내가 덮고 있던 모포를 모닥불 옆에 놓고, 그녀를 그곳에 눕혔다.
어제 운전을 하느라 많이 피곤했던지, 안아도 춥다고 잠꼬대만 할 뿐 깨어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모포를 덮어주고, 주변의 나뭇가지를 주워왔다.
모닥불을 살리고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았다.
지금 소피아는 나를 보며 자고 있다.
“한 교수님, 더 알아낸 정보는 있나요?”
-르 꼬르뷔제 주변의 자료들은 더 이상 찾을 수 없고, 직접 탐문수사 하는 식으로 할 수밖에 없지.
“거의 불가능하겠는데요?”
-그렇다고 봐야지. 그 시절에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독일인들에게 포인트를 맞춰야 하는데, 자료가 너무 없어.
“분명히 존재하기는 했지만, 드러내고 활동할 수 없었다? 안타깝네요.”
-그렇지.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라 가정하면, 정치에 이용당한 꼴밖에 안 되는 거지.
“세상 밖에 나올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건축가가 싹도 틔우기 전에 묻혀 버린 거네요.”
문서상으로만 존재했던 사람이 실재했었다는 것은 내가 직접 확인을 했다.
-그런 거지.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다.
“중요한 거 아니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성훈아. 굳이 내 의견을 말하자면…….
“으음.”
소피아가 잠이 깬 모양이다.
내 목소리 때문이리라.
“음, 성훈. 뭐 하세요?”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교수는 이쪽 상황을 모르니,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잠시만요, 교수님.”
“소피아, 더 자.”
그녀의 머리를 베개 쪽으로 살며시 눌렀다.
“아암.”
아직은 잠이 덜 깬 듯 잠투정을 한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장가를 불러줬다.
내일도 이런 강행군이 될 텐데, 체력을 비축해 두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다. 물론 잠을 자고, 내가 운전하는 것도 좋은 방식이지만!
“엄마가 섬 그늘에~”
자장가가 거의 끝날 때 즈음, 그녀의 숨소리가 평안해졌다.
아기처럼 티 없이 평안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모닥불을 더 키웠음에도, 아직은 추운지 모포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교수님, 그래서요?”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끼워 넣으면서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한 교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흐흐흐. 여자랑 같이 있냐?
“앱니다. 애. 자장가 소리 못 들으셨어요?”
-야. 거기는 애도 어른 같아!
“됐구요.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양반이.”
-쳇.
“그래서 교수님 의견은요?”
-아마도 그 가구 장인이라는 독일인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한 교수가 말했다.
-흐흐흐, 성훈아. 건투를 빈다.
차마 고함을 칠 수 없어서 화난 목소리를 쥐어짰다.
“끊습니다, 교수님.”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너머로 선영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수님! 성훈 선배, 거기서 여자 만났대요?
-내 직감으로 볼 때, 백 퍼센트다.
-어머. 짐승?
‘젠장. 오해라구!’
탁.
더 말해봐야 믿지도 않을 거고, 나만 말 안 하면 된다.
얼떨결에 소피아의 허벅지를 만지며 짐승이 되고 말았지만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나는 신사다.
시내에 내려가서 세수를 하고, 코펠에 물을 담아왔다.
사실은 그녀의 자는 얼굴을 계속 보고 싶었지만, 깨어났을 때 시커먼 남자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얼마나 놀라겠는가?
‘잘생긴 미남도 아닌데.’
내 스스로 못생겼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미남이라고 말하기에는 양심에 찔렸다.
‘해장이나 하지 뭐.’
우리 주변으로 빈 와인병 두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뭘 먹을까? 배낭을 뒤지며 고민에 빠졌다.
외국 여행하면서 가장 힘든 것?
먹거리다.
‘해결책은 많고 많겠지만, 나 같은 고학생은 라면이다.’
돈도 많으면서 웬 궁상이냐고?
삶의 수준을 올리는 것은 쉽다. 돈만 있으면 되니까.
그 반대는 지옥의 불구덩이를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짠돌이처럼 살 생각은 없지만, 굳이 외국에서 한국 식당을 찾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과연 그 한국 식당이 이 라면만큼 내 입맛에 맞을지도 알 수 없고.’
돈 쓰고 맘에 안 들면 그건 돈을 버리는 거다.
압둘 정도나 되면 몰라도,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래서 라면을 종류별로 사왔지롱.”
아무리 맛있는 라면도 많이 먹으면 질린다.
물을 끓이면서 들었던 생각은 ‘그냥 모른 척 좀 더 베고 있을 걸’ 하는 거였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사실이었다.
‘바보, 등신!’
천사의 무릎을 베고 자면서 알지도 못 하다니.
그렇게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을 때, 그녀가 일어났다.
내 쪽을 보면서 누운 채 가만히 눈을 떴다.
의도적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코펠에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그녀 쪽으로 엉덩이를 두고 싶지 않아서 그녀와 마주 앉아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음…… 성훈.”
소리가 들려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피아, 잘 잤어요?”
모포를 반쯤 걷어낸 그녀는 인어공주처럼 앉았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지저분하죠?”
그냥 말없이 미소 지었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아침햇살보다 빛나는 얼굴을 앞에 두고 말이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모포를 정리한 그녀는 미간을 짚으며 배를 어루만졌다.
술이 어지간히 약한 모양이다.
어제도 금방 취해서 자버리더니.
나는 스푼으로 스프의 간을 보며 말했다.
“속 쓰리죠?”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와요. 라면 끓여놓을 테니.”
이제 막 국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라면은 그녀가 씻고 올라올 때 넣으면 될 것이다.
개울로 향하던 그녀는 코펠 안을 들여다보고는 말했다.
“이 둥둥 떠다니는 것은 뭔가요?”
“팽이버섯이요.”
“어디서 난 거예요?”
“아까 새벽에 나무 구하러 갔다가 발견했어요.”
그녀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별걸 다 할 줄 아네요.”
‘지난 삶에서 등산 동호회 활동을 좀 했었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소피아, 눈곱 끼었어요.”
“정말요!”
그녀는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부리나케 시내로 뛰어 내려갔다.
“후우.”
그녀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다.
연신 손부채질을 하면서, 분홍색 혓바닥을 날름 내밀었다.
“성훈, 매워요. 엄청!”
“맵기는요. 맛만 좋구만.”
난 코펠을 들고 국물을 들이마셨다.
“밥만 있으면 딱 좋을 텐데.”
그녀가 나의 손을 잡았다.
“내 것도 남겨줘요.”
“맵다면서요.”
“그래도 맛있어요.”
그녀의 말대로 국물은 팽이버섯의 향을 풍기면서 독특한 맛을 내고 있었다.
‘하긴! 여기서 뭘 먹는 들 맛이 없겠어?’
***
지금 우리는 파리로 가고 있다.
“소피아, 파리를 잘 아는 것 같던데.”
“요즘은 연락이 뜸하지만, 외삼촌이 파리에 살아요.”
프랑스 말도 잘하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소피아는 프랑스와 연관이 많은가 봐요.”
“당연하죠. 엄마가 프랑스인이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한국과는 완전히 문화가 달랐다. 국제결혼에 거부감이 없는 곳이었다.
“언제 결혼하셨는데요?”
“대략 19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
“서로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그래도 그 시절이면,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유럽연합의 결성이 1960년대 후반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문에 독일의 이미지가 마냥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요?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고 하시던데요.”
“당신 부모님이 어릴 때는 2차 세계대전 전이라고요.”
“그게 어때서요? 사랑에 국경이 어디 있어요.”
하긴 사랑에 역사는 또 무슨 상관이랴!
“성훈, 졸려요.”
그녀가 나를 보며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에게나 이런 미소를 지어줄까?
“잠 오면 자면 되죠.”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무슨 의미지?
“성훈, 밤에 잘 때 노래 불러줬었죠?”
“들었어요?”
‘잠결이라 기억을 못 할 줄 알았는데.’
소피아는 눈썹을 으쓱이며 제 자랑을 했다.
“제가 잠귀가 얼마나 밝은지 아세요?”
“그렇군요. 다른 건 기억 안 나요?”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잠귀만 밝은가 보군. 들쳐 안은 건 기억도 못 하네.’
“그냥 다른 일이라도 있었나 해서요.”
“저도 첨에는 꿈인 줄 알았어요.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노래였으니까.”
“그런데 왜요?”
“불러줘요. 그거 들으니까 잠이 솔솔 오더라고요.”
그녀는 이미 의자 시트를 뒤로 젖히고 누웠다.
내가 뭘 어찌하랴?
‘운전수도 하는데, 카 오디오 정도야.’
“엄마가 섬 그늘에~”
그녀가 눈을 감고 부드럽게 말했다.
“성훈, 당신 목소리 참 듣기 좋아요.”
내가 노래를 부르는 사이, 그녀는 숨소리가 깊어졌다.
“휴, 천만다행이네.”
빨간 불이 들어오고도 50㎞나 더 달려서 주유소를 발견했다.
“행운이네. 꼼짝없이 히치하이킹을 할 뻔했어.”
그것도 나름 추억이겠지만 추억이라면 지금도 충분했다.
여전히 그녀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잠들어 있다.
“잘 잔다. 어떻게 한 번을 안 깨고 자냐?”
휴게소에 들러서 커피를 사왔다.
“깨면 마시겠지.”
점심이 다 되어서야 파리에 도착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어제의 그녀는 길을 잘못 들어도 한참을 잘못 들었었다.
파리 쪽과는 한참 상관없는 곳에서 야숙을 했으니, 시간이 이렇게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녀를 깨워야 했다.
***
“네? 삼촌. 이사를 갔다고요? 나한테 얘기도 안 하고?”
-야, 녀석아. 아무리 연락이 뜸했다고 해도. 작년 이맘때였나? 네 아빠한테 이야기했었는데?
“작년이면 아빠는 결혼식 때문에…….”
잠시 소피아는 말을 멈추고 성훈을 바라보았다.
성훈은 멀뚱멀뚱 영문을 모른 채 그녀를 응시했다.
“왜요? 나 프랑스어는 몰라요. 전혀.”
“맞다. 그랬죠.”
-그런데 파리는 왜 오는 거니?
소피아는 삼촌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거 파리에서 조르당 서방 찾기네? 포기해라.
“안 돼요. 궁금해 미치겠단 말예요.”
-넌 어떻게 된 녀석이.
‘대화의 내용은 모르겠지만, 어지간히 어리광이 많네.’
성훈과 있을 때는 고상한 모습이었지만, 실제로는 말괄량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성훈은 아까 한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났다.
“소피아. 외삼촌에게 할아버지가 프랑스에서 건축가로 활동한 적이 있는지 물어봐요.”
그녀의 부모가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이고, 외삼촌이 프랑스에 산다. 그렇다면 어릴 때부터 프랑스에 살았을 확률이 컸다.
“할아버지는 왜요?”
“물어봐요. 우리는 사람을 찾는 거예요. 그 시절에 할아버지가 건축계통으로 활동했었다면, 정답에 접근할 방법이 있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건축 일을 했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집을 짓는 건 본 적이 없는데.”
소피아가 외삼촌에게 물었다.
“할아버지가 프랑스에서 건축가로 활동하신 적이 있나요?”
-나 어릴 때 기억으로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왜 물어보는 거니? 그 조르당이 네 할아버지라고? 하하. 그 고집쟁이 아저씨가?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일단 알았어요.”
삼촌과의 통화를 끝낸 그녀가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어떻게 하죠? 너무 대책도 없이 왔네요.”
“일단은 식사를 해야죠.”
“그리고 나서는요?”
“저녁은 당신 할아버지와 함께 먹는 게 어때요?”
‘원래 그런 일정 아니었어요?’라고 말하는 투였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무심하게 말하는 성훈을 보며,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파리의 맛집은 제가 많이 알아요. 안내할게요.”
***
그녀가 추천한 맛집에서 파스타는 맛있었다.
반면, 내 입맛은 씁쓸했다.
‘고집이 강하고 성정이 강직하다고 해서, 지나온 삶도 반드시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게 예측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일도 분명히 있다.
스스로 붓을 꺾는 미술가가 얼마나 될 것인가?
인생은 예측할 수 없다. 여행이고 모험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지나간 인생은 되돌릴 수 없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이라는 가정이 붙겠지만.
‘나는 지금 피어나지 못한 거장을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