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축의 신-100화 (100/427)

건축의 신 100화

발판을 다지다.(09)

집사의 안내를 받아 알리의 개인 응접실로 향하고 있었다.

‘보기보다 교활하군, 곽 이사. 아주 대단해.’

분명히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빠져나오기 어려운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걸 내가 구해줬고 말이다.

물론 그의 치하를 받는다거나 그에게 뭔가를 얻을 계획은 아니었다.

그저 내 계획의 일환으로 그를 구했을 뿐이다.

그런데 역으로 나를 속일 생각을 할 줄이야.

‘상당히 기회를 잘 포착하는데, 동물적인 감각이라 칭찬할 만해.’

화가 났냐고?

나중에 알았다면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아주 쓸 만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중동의 부자들을 상대로 거래를 하지 않겠어!’

곽 이사는 곤경에서 헤어 나오자마자, 나를 미끼로 이용하여 알리를 구워삶을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알리에게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이용당했을까?’

지금까지 생각한 이성적인 판단은 사라지고, 등줄기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지난 삶에서 이용당하는 건 지긋지긋하게 해봤어. 그런데 지금 또 당하라고.’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곽 이사! 있지도 않은 미끼로 대어를 낚는군. 그 미끼가 나만 아니었다면 박수를 쳤을 거야. 분명히.’

그는 기발한 순간 판단으로 상황을 자신의 판으로 만들었다.

무려 사우디의 왕자를 상대로 말이다.

내 승인도 없이 나를 그의 계획에 끌어들였으니, 그건 알리를 농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리는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뭔가 보답을 해주고 싶었을 거고.’

국왕을 만나게도 해준다고 할 정도였으니, 생색을 내기 위한 호의는 아니었으리라.

알리의 진심은 충분히 전해 받았다.

아마도 알리는 내가 건물의 디자인을 다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한국을 잘 모르고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겨우 학생이다.

한국에서 학생이라는 타이틀, 혹은 직장이라는 신분은 굉장히 제약이 많다.

한국 사정을 모르는 그에게 곽 이사는 아주 능수능란하게 장난을 쳤고, 알리는 넘어갔다.

실제로 알리는 거의 다된 밥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곽 이사는 아마도 내 이름만 올리겠지.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이 주된 디자인을 하라고 시킬 것이고.’

그래서 곽 이사가 얻는 것은 뭔가?

원래 곽 이사가 목적했던 것은 분명히 알리 호텔의 시공을 현재에 맡겨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려고 과욕을 부렸다.

‘곽 이사, 욕심을 너무 냈어. 딱 거기까지가 당신의 역량이었어.’

그는 욕심에 눈이 멀어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모험을.

응접실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내 심장은 차가워졌다.

곽 이사의 계획대로 일이 술술 잘 풀려서 설계에 대한 계약까지 이뤄간다면, 그는 현재에서의 위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전무는 물론이고, 부사장의 직위까지 빠른 시일에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내게 디자인에 참여시켜 주겠다고 생색을 냈을 것이고, 나는 고마워하며 참여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날 너무 쉽게 봤어.’

***

곽 이사가 알리의 응접실에 들어서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밤에도 30도가 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으슬으슬한 한기가 느껴졌다.

벽에 걸려 있는 시미타 두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아라비아 왕가의 문양 중 종려나무 아래에 교차되어 있는 그 칼. 시미타(Scimitar)!

‘시미타’는 중세 아랍의 유목민들이 말위를 달리며 휘두르던 신월도(新月刀)로써, 손잡이가 짧고 긴 날이 약간 휜 형태의 도를 말한다.

‘취향 한번 무시무시하군.’

아직도 중동의 여러 왕국에는 참수형이 존재했다.

법 자체가 무의미했다. 왕족의 말이 곧 법이었다.

그런 왕족 중에서도 가장 충성도가 높은 알리 왕자였으니, 이런 응접실의 장식이 이해가 갔다.

예리하게 갈린 두 자루의 칼날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소파에 편히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성훈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성훈이 말했다. 눈도 뜨지 않은 채.

“들어오시죠.”

“네.”

곽 이사는 계속 왕자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해. 저놈이 아무리 왕자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해도, 운이 좋은 애송이일 뿐이야.’

응접실로 들어가며 정신을 다잡았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군.’

부랴부랴 비행기로 사우디를 날아왔고, 압둘을 만났을 때는 머리끝에 소름이 돋았었다.

방금 전까지도 압둘 왕자에게 협박을 받고 돌아왔다.

‘성훈으로 하여금 몰딩을 만들게 하지 못한다면, 네가 쌓은 캐리어 따위는 박살을 내주겠다’는 살벌한 협박이었다.

압둘 왕자는 그럴 힘이 있었다.

회사로 전화해서 ‘현재와 거래를 끊겠다’ 그 단 한마디면 말 그대로 자신이 현재에서 쫓겨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이번 건만 잘 처리하면 전무가 대수냐? 부사장까지는 그냥 올라갈 수 있지.’

눈앞의 어린놈만 구워삶을 수 있다면 말이다.

응접실 한가운데, 작은 사각 탁자 위에는 쟈스민 향이 나는 차가 놓여 있었고, 일인용 소파가 2개 놓여 있었다.

성훈이 눈을 떴다. 그리고 앞으로 몸을 숙이며, 무릎에 양팔을 대고 곽 이사를 마주 봤다.

성훈이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얘기는 잘되셨습니까? 압둘이랑.”

“뭐. 권력자가 말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힘이 있나, 들어줘야지.”

“그렇겠죠.”

“우리처럼 힘없는 소시민이 뭘 할 수 있겠나.”

성훈은 잔을 들어 향을 즐기더니 상상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저는 내일 이 나라를 떠날 겁니다.”

곽 이사가 화들짝 놀랐다.

아직 성훈은 해줘야 할 일이 있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눈앞의 젊은이, 안전모가 꼭 필요했다.

“왜 그러나? 다른 약속이라도 있나?”

성훈이 의아하게 곽 이사를 바라봤다.

“네, 유럽에 가서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압둘 왕자가 부탁한 것이 있는데, 그걸 꼭…….”

성훈은 별 관심이 없는 모습이었다.

‘안 되는데, 이놈이 꼭 있어야 하는데.’

곽 이사가 환하게 웃으며 성훈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성훈은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저는 부탁을 받은 적도, 해준다고 한 적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해달라면 해줘야 하는 겁니까?”

“당연, 아니, 그래도 들어주면 좋지 않은가?”

“훗. 그래서 제가 이득 보는 건 뭔데요?”

이제 성훈이 넘어오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득을 입에 담는 사람치고, 돈에 안 넘어오는 사람은 없다.

“당연히 돈이지 않나? 그 사람은 부자라네. 잘만 사귀어 두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걸세. 압둘도 아마 자네에게 수백만 달러의 이익을 안겨 줄 거야.”

곽 이사의 감언이설은 그럴듯했다.

“훗. 관심 없습니다. 돈 따위는.”

성훈은 코웃음을 치며 손사래를 쳤다.

“자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모양인데.”

“저 돈 많습니다. 어느 정도는 아시는 것 같던데요.”

곽 이사가 뜨끔했던지 목을 움츠렸다.

그런 습관이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알리의 말을 듣고 나니 보였다.

한국에 있을 때, 곽 이사가 그렇게 긴장할 인물이 얼마나 있을까? 당연히 볼 기회가 없었다.

곽 이사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알기는 얼마나 안다고.”

“흠. 그럼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그럼. 내가 자네에 대해서 어떻게 알겠나?”

성훈이 씨익 웃었다.

“전 이사님께서 절 어려워하시길래, 저에 대해 잘 아시나 했습니다.”

“그야…….”

“이사님은 예의 바르신 분이라서 그런가 보죠.”

“그런 거라네.”

“그래서 이사님을 돕고 싶었나 봅니다. 아까의 상황…… 하긴 이사님의 능력에 비하면 곤경도 아니겠죠.”

“아닐세. 아까는 너무 놀라서 식은땀을 흘렸다네. 정말 고마웠네.”

“뭐. 어쨌거나, 너무 안돼 보이셔서 잠깐 끼어들었었습니다.”

아까의 곤경이라면 알리와 압둘의 대치 상황이었으리라.

생각만 해도 절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자네에게 그런 대단한 재치가 있을 줄이야. 하하하.”

“장난 한번 친 거죠. 부자라고, 왕족이라고 잘난 척하는 게 꼴 보기 싫어서요.”

‘나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오금이 저리는데, 장난친 거라고?’

하지만 성훈의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한참 어린 나이 아니던가!

곽 이사는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그게 장난이라고? 자네 배짱이 두둑하구만. 하하하.”

“이사님도 배짱이 두둑하시던데요.”

“자네에 비하면 배짱도 아니지. 하하하.”

성훈도 한쪽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알리를 데리고 장난칠 정도면, 대단한 배짱이라고 할 수 있죠. 거기다 저까지 덤으로…….”

곽 이사는 웃으며 차를 마시다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성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웃는 듯했지만 눈을 갸름하게 뜨고 바라보는 모습이 ‘다 알고 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알리가? 사업상의 기밀을 함부로 말할 사람이 아닌데?’

지은 죄가 있는 곽 이사는 뜨끔했지만 노련하게도 티를 내지 않았다.

성훈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알리나 저 같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농락당하는걸, 아주 싫어합니다. 그게 사소한 거라도요.”

자연스럽게 성훈은 자신과 알리는 동급으로 놓고 있었다.

곽 이사의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돌파구를 찾아야 해.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거야.’

이 위기만 잘 넘기면 승승장구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

“그냥 염려가 되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성훈의 부드러운 미소에 곽 이사는 등줄기가 오싹하게 시렸다.

“성훈 군. 그게 무슨 말인가? 농락이라니.”

“쩝. 인정을 안 하시네. 알리에게 직접 물어봐야 하나. 문제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성훈이 탁자위의 차임벨로 손을 뻗었다.

“대체 무슨…….”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둘러 성훈의 팔을 잡았다.

“혹시 알리에게 제안한 호텔 설계 건 때문에 그러나?”

“그런 일이 있었나요?”

곽 이사의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기세에 눌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말하고 말았다.

‘아닌 건가? 그럼 뭐지? 젠장!’

“아닐세. 말이 헛나온 걸세.”

“이거 놓고 말씀하시죠.”

“어. 미안하네. 경황이 없어서.”

손을 떼며 곽 이사가 말을 이었다.

“그럼 뭘 말하는 건가?”

“방금 말씀하신 그거 맞습니다.”

곽 이사의 얼굴이 당황스러움과 함께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오해십니다.”

“오해라니, 이게 무슨?”

성훈이 비릿하게 웃었다.

“말이 헛나온 겁니다.”

“이익. 이 친구가 지금.”

“곽 이사님도 이 정도인데, 알리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요.”

성훈의 의도를 알게 되자 곽 이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현재 사장이 화를 내는 것과 알리 왕자가 화를 내는 것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성훈 군. 그건 말일세. 오해라네.”

성훈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 좋은 말이죠. 그럼 이해를 시켜야죠.”

“미안하네. 내가 성과를 보려다가 너무 앞서 나갔네.”

하지만 성훈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과연, 내가 몰랐다면 곽 이사는 그 오해를 바로잡으려 노력했을 것인가?’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어이가 없질 않나. 바꿀 생각도 없었으면서, 들키니 오해라고 오리발을 내밀다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여기서 뭔가가 바뀌지 않는다면.

“제 나름대로는 호의로 이사님을 도운 건데, 그게 절 호구처럼 보이게 할 거라곤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오해라고.”

“오해에 또 오해라. 이사님께서는 항상 오해를 불러일으키시는군요.”

성훈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귀찮아졌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도리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그런 사람들에게 호구 취급받는 것도.”

“그래서 어쩔 생각인지?”

“다 때려치우렵니다. 알리 몰딩도 없던 일로 하고요. 그럼 적어도 곽 이사님을 다시 볼 일은 없겠죠.”

“미안하네. 하지만…… 성훈 군.”

“이제 앞으로는 미안할 일도 없을 겁니다.”

심드렁하게 말하며 성훈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곽 이사의 고개도 그를 따라 올라갔다.

“어딜 가려고?”

“제가 직접 알리의 오해를 풀겠습니다.”

“무슨 오해를 푼다는 말인가?”

“알리는 저와 함께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테니, 그렇지 않다고 명확하게 말을 해줘야죠.”

곽 이사도 벌떡 일어섰다.

“그런 오해라면 내가 스스로 풀겠네.”

“훗.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이사님은 오해를 더 만드실 것 같으니 말입니다.”

“뭐!”

곽 이사의 얼굴이 굳었다.

성훈은 그런 곽 이사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저는 곽 이사님 같은 분들을 잘 압니다. 많이도 만나 봤고요.”

‘당연히 당신이 가면 자기 유리한 말만 하겠지.’

성훈을 넣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 것이다.

오해를 하게 해서 죄송하다. 등등의 변명을 늘어놓을 것이다.

‘아직 문서로 작성을 한 것도 아니니, 무슨 말이든 못 하겠어?’

아니면 넣으려고 했는데 성훈이 알리 왕자가 싫어서 같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미 그때는 내게 목을 맬 상태가 아닐 테니, 속이 훤히 보인다. 여우같은 놈아.’

오히려 나와 알리 사이를 이간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다이렉트로 알리와 인연을 맺기 위해.

‘이야기 만들어 붙이는 거야. 일도 아니지.’

곽 이사는 머리가 복잡했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지?’

하지만 성훈은 그가 생각할 시간도 없게끔 상황을 몰아붙였다.

응접실로 들어온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았다.

곽 이사 인생에서 가장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다.

“이사님, 고작 왕자 하나를 능멸했다고 해서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웃으면서 말하는 성훈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곽 이사의 눈에 성훈의 뒤쪽으로 벽 장식으로 걸린 시미타가 보였다.

처음 봤을 때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눈을 어지럽혔다.

그는 쓰러지듯 엎어지며 성훈의 다리를 잡았다.

“성훈 군. 용서해 주게. 내가 죽을죄를 지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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