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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99화 (99/427)

건축의 신 99화

발판을 다지다.(08)

알리가 물었다.

“성훈 군. 며칠 더 묵어줄 수 있겠나!”

“네?”

“이 몰딩을 아버님께 보여드리고 싶네. 그리고 자네를 소개해 드리고 싶어.”

아까 전까지 성훈을 씹어 먹을 듯이 이를 갈던 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곽 이사가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성훈 군. 국왕을 만나 뵌다는 건, 일생에 두 번 다시없을 영광이야.”

성훈을 대신해서 알리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왕자님. 이런 기회를 주셔서.”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군. 하지만 굳이 지금 그의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오히려 빚 지운 채로 놔두는 것이 나았다.

마음속의 이자는 날로 불어날 테니까!

은혜를 모르는 자라면, 지금 당장 빚을 청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국왕까지 소개시키고 싶다는 사람이, 과연 은혜를 모를까?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다른 약속이 있어서 안 되겠습니다. 원래 심포지엄 때문에 온 것이지, 예정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알리는 무척 섭섭해했다.

“이 문양을 다른 곳에도 써도 될까?”

“적어도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왕자님께서 독점하십시오. 제 마음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고마우이. 내 반드시 이 빚은 갚지.”

그러면서 알리는 다시 압둘을 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곽 이사가 알리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다.

갑갑하던 상황이 해결되었으니, 실력 발휘를 해볼 모양이었다.

압둘은 기분이 묘했다.

그는 천생 장사꾼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미 발생한 손해에 대해 고민해 봤자, 메꿔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리를 밟으러 왔는데, 뜻밖의 인물을 만났어.’

아까 현재 부사장의 말을 듣고, 부랴부랴 비행기로 날아왔었다.

역시나 곽 이사라는 여우 같은 놈이 알리를 상대로 뭔가 획책을 하고 있었고 압둘은 분노했었다.

‘죽일 놈! 감히 내 일에 훼방을 놓아?’

하지만 놈은 분명히 나의 경고를 알아들었고, 그 뒤로 곽 이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서 모든 일이 종료되었어야 했다고!’

그렇게 일은 끝났다고 믿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다.

알리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건 뭐지? 왜 이런 상황이 되었나?’

그러나 지금은 화가 나지도 않았다.

눈앞에서 그것도, 방금 생각났다면서 몰딩을 만들어내는 녀석이 눈앞에 있었다.

‘그렇게 실력이 있었기에, 내 맘에 쏙 드는 몰딩을 만들었겠지.’

그 몰딩을 잃고 싶지 않아서 알리와 레이스를 벌이지 않았던가?

그의 눈에 민수와 이야기하고 있는 성훈이 보였다.

‘알리가 성훈을 귀빈 대접하는 한은, 내가 녀석을 잡지 못해. 어떻게든 내 집으로 데려가야겠군.’

압둘은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오늘 알리의 패배를 보러 왔다네.”

“오늘의 승자는 분명히 압둘 왕자님이십니다.”

“정확히는 풀죽은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를 하고 말았지.”

“실패라니요. 당당하게 몰딩의 독점 판매를 고수하셨죠. 축하드립니다.”

상처뿐인 영광을 과연 승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압둘이 피식 웃었다.

“개당 100달러, 1톤만 해도 20만 달러를 손해 봤어! 난 적어도 10톤 물량을 계약할 생각이었다네.”

“왕자님! 저는 왕자님들 간의 문제에 끼어들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의 타박을 받는 성훈은 그 나름대로 억울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올리라고 했어? 지들끼리 레이스 붙어 놓고는 엉뚱한데 화풀이야! 지가 일해서 번 돈도 아니면서!’

“200만 달러를 손해 보고라도 놈을 누르고 싶었다. 단 한순간이라도 저놈의 패배를 확인하고 싶었단 말이지!”

“알리 왕자님은 패배를 선언하셨습니다만.”

“하하. 눈 가리고 아웅 하긴가? 히히덕거리는 놈의 저 모습, 어디가 패배자로 보이나?”

씨익 웃으면서 옆에서 웃고 있는 알리를 가리켰다.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알리는 압둘에게 ‘축하해, 너 가져!’라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알리는 더 이상 기쁠 수는 없다는 표정이었고, 곽 이사는 아랍어로 그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

‘뭘 설명하고 있는 걸까? 이미 몰딩 이야기는 끝났을 텐데.’

귀를 기울여 봐도 내가 아랍어를 알아들을 리는 만무했다.

압둘이 말했다.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별로 큰 손해는 아니지만 손해를 만회는 해야 하지 않겠나? 자네의 잘못은 아니나, 나를 도와줄 능력은 있지.”

어차피 두 마리 호랑이가 붙었으니, 누구 하나 성한 놈은 없을 터였다.

‘한 마리는 잡았으니, 이제 나머지 한 마리만 잡으면 되는 것인가?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눈앞의 압둘은 몇백만 달러에 흔들리지 않는 거물이었다.

화가 난 척을 하지만 내게는 그의 속마음이 보였다.

“성훈 군, 아까는 좋은 말을 하더군!”

“무슨 말씀이신지?”

“몰딩으로 받은 상처는 몰딩으로 치료한다고 했던가?”

그 말을 하며 압둘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몰딩을 만들어 달라는 말이었다.

그의 취향은 알리보다 훨씬 더 복잡할 것이다.

최초의 몰딩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던가?

그가 원하는 것은 그런 수준의 몰딩이 될 것이다.

‘시간이 필요해.’

압둘의 제안을 거절했다.

“왕자님, 지금 당장은 어려운 일입니다.”

“훗! 어려운 일이겠지. 아까는 십 분도 안 돼서 문양이 나오더군!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렇겠어?”

“그건 알리 왕자님의 취향이 명확하셨으니까 가능했던 거죠.”

“이봐. 성훈. 내 취향도 명확해. 그리고 나는 손해 보고 못 사는 성격이라네.”

곽 이사와 대화하던 알리와 내가 눈이 마주쳤다.

압둘 모르게 윙크를 했다.

아까 내 윙크를 알아챈 알리라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

‘압둘, 좀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고.’

압둘의 등 뒤로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왔다.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압둘이 고개를 돌렸다.

알리가 아까의 웃음을 지우고,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알리가 으르렁거렸다.

“압둘. 지금 내 집에 초대한 손님에게 뭐하는 짓인가?”

압둘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

“그냥 사업 얘기 중이라네.”

알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다만 곤란해하는 내 얼굴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감히 자네가 내 집에서 내 손님을 핍박하는 건가!”

분노한 알리가 압둘에게 말을 이어갔다.

“그는 알라께서 내게 보내주신 귀한 손님이야. 설령 알라께 선택받은 자네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어.”

“어허, 알리. 그런 게 아니래도 그러네. 그렇지 않나?”

당황한 압둘이 나를 보며 웃어 보였지만, 알리는 끝내 그의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 무례한 행동은 우리 왕가에 대한 도전인가?”

압둘이 도리어 당황했다.

“내가 그럴 리가 없지 않나!”

“내 집의 먼지 하나도 자네 뜻대로 할 수는 없을 걸세.”

오랜 친구 사이이니만큼, 압둘은 알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알라 혹은 왕가라는 말이 나올 때면,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압둘이었다.

그 방면으로는 융통성이라고 하나도 없는 고집쟁이였다.

“알았네. 알았어. 미안하이.”

압둘의 눈이 나에게서 곽 이사로 옮겨갔다.

“알리. 자네 집에 있으면 모두 자네 손님인가?”

이미 먼지 하나도 멋대로 할 수 없다고 선언을 했음에도 압둘은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알리가 불쾌한 듯 물었다.

“그걸 왜 묻나?”

“곽 이사, 저 사람도 자네의 귀한 손님인가 해서 말일세.”

알리의 눈이 곽 이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거래처 직원일세.”

“훗. 그렇지. 그래야 알리지.”

사막의 여우, 곽 이사는 사막의 왕자들에게 먼지보다 못한 존재였다.

압둘이 곽 이사를 향해 다가갔다.

“알리 왕자님! 드릴 말씀이 아직 남아…….”

곽 이사는 알리를 향해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 앞을 압둘이 막아섰다.

“곽 이사, 나와 먼저 말을 하지. 나도 자네에게 할 말이 많아. 아주.”

알리는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알리에게 물었다.

“왕자님, 아까 곽 이사와 이야기를 길게 하시던데, 아직도 그 몰딩에 미련이 있으십니까?”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이런 몰딩을 선물해 줬는걸.”

“그럼 어떤 것 때문에.”

곽 이사가 몰딩 말고 진행할 것은 그의 말에 따르면 호텔 시공 계약 건이었다.

‘무슨 말로 알리를 구워삶았을까?’

“역시 자네가 내게 온 것은 알라의 뜻이었어.”

의미는 모르지만 웃으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는 내 앞에 곽 이사와 이야기하며 보던 사진첩을 내밀었다.

기숙사 사진의 디테일과 전경 사진, 그리고 이번 구조대전에 나갔던 모형의 사진이었다.

부서졌던 외관을 다시 만들어서 찍었었다.

“자네가 이것들을 디자인하고 만들었다고 하더군. 사실인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설계팀의 일부일 뿐이죠.”

“겸손해할 필요 없다네, 자네가 거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더군.”

“뭐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나는 알리의 칭찬보다 곽 이사의 속셈이 더 궁금했다.

처음에는 몰딩 사진 때문에 알리에게 그 사진첩을 들이 밀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것은 내 작품집이나 거의 비슷했다.

그리고 나에 대한 간단한 신상명세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이건 나를 조사한 보고서 파일 같은걸? 아까도 뭔가 뒷조사를 한 느낌이었어. 급한 김에 들고 온 것인가?’

문 소장과의 대화에서도 곽 이사가 나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보였다고 했었다.

알리에게 물었다.

“곽 이사가 뭐라던가요?”

“자네를 건축 설계팀에 중요 인물로 참여시킬 테니, 내 호텔의 디자인을 현재에 맡기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군.”

“저는 아직 학생입니다. 제가 그럴 능력이 되겠습니까?”

“곽 이사는 그렇게 보는 것 같지 않더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곽 이사를 현재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내가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그를 사막의 여우라고 한다네. 나는 그를 오랫동안 알아 왔어.”

“흠. 그랬군요.”

“곽 이사가 저렇게 사람을 어려워하는 경우는 둘밖에 없어. 고귀한 혈통이거나 혹은 자신이 절대로 못 이길 사람 말이야.”

“하지만 왕자님 둘의 일에 끌어들이려고 절 데려온 것 아닙니까. 어려웠다면 그랬을까요?”

“그건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으니, 경우가 다르지. 저 여우 곽 이사가 자넬 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 자기 자신은 모르겠지만, 자네를 대할 때는 항상 주눅이 들어 있지. 그건 의식한다고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왕자님께서는 곽 이사의 제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난 좋은 제안이라 생각하네. 이 몰딩으로 장식할 건축물을 자네가 설계한다면 나로서는 영광이지.”

알리의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곽 이사가 나를 이용하려 한다는 것. 그것도 내가 모르게 말이다.

‘곽 이사. 이번엔 제대로 날 속일 뻔했어.’

나와 전혀 상의하지 않고도 알리에게 말했다는 것.

그건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 할 자신이 있다는 반증이었다.

거실 반대편에서 압둘에게 굽실거리는 곽 이사가 보였다.

알리에게 물었다.

“왕자님, 곽 이사와 잠시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알리는 순순히 승낙했다. 곽 이사와 구체적인 계획을 짤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게나.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네.”

“조용하게 둘만 이야기할 수 있는 방이 있을까요.”

“내 응접실을 쓰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할 때 쓰는 방일세.”

“감사합니다. 곽 이사를 좀 불러도 될까요.”

“내가 불러다 보내 주지. 지금쯤 압둘에게 압박을 당하고 있을 테니.”

알리는 집사를 불러 나를 안내하라고 하고는 압둘에게 다가갔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집사를 따라 응접실로 걸어갔다.

‘이 여우 같은 인간을 어떻게 해야, 목줄을 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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