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98화
발판을 다지다.(07)
곽 이사는 염려스러웠다.
분명히 몰딩의 가격은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확실한 사실은 둘 중의 하나는 패배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현금 레이스에서 말이다.
“저 둘을 싸움 붙여서 얻으려 하는 것이 뭔가? 압둘이 지든 알 리가 지든 자네는 패자의 분노를 사게 될 거야.”
성훈은 곽 이사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그 분노를 현재가 사지는 않겠죠? 이사님은 보기나 하시죠.”
‘이 친구 정체가 뭔데, 현재를 이렇게 각별하게 생각하는 거지? 진짜로 로열패밀리인가?’
지금까지 애매하여 판단할 수 없었던 문제가 다시금 곽 이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성훈은 옆으로 곁눈질을 하며 곽 이사를 살폈다.
‘저들의 분노를 피한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라고. 쓸데가 있어서 구해주는 거니까.’
성훈을 속인 것은 다른 것으로 보상받을 생각이었다.
이제 곽 이사에게 어떤 일을 맡기든 성훈은 미안하지 않을 것 같았다.
곽 이사가 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었다. 스스로의 양심에 대고 말하는 것이었으니.
‘이제 둘의 싸움이 끝나 가는가 보군!’
곽 이사의 염려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것이었다.
두 호랑이 중 하나는 분명히 타격을 입을 것이고, 그 분노는 성훈을 향하게 될 것이다.
애초에 저작권자인 성훈이 이 자리에 없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레이스였다.
성훈이 고민했던 것은 과연 자신이 그 성난 호랑이를 달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둘 중에 누가 질 것인지를 판단해야 했다.
“곽 이사님.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중동의 사정에 해박한 곽 이사라면 정답에 가까운 결론을 내놓을 것이다.
“아마도 압둘이 이기게 될 걸세.”
“이유는요?”
“아무리 몰딩이 탐난다고 해도, 값을 올릴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할 테고, 그 여유는 압둘이 더 많다네.”
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두 아이가 하나의 장난감을 가지고 다투고 있다. 그 장난감을 가지려고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하나가 더 있다면? 그리고 더 마음에 든다면?’
성훈이 물었다.
“알리 왕자의 취향이나 특징이라 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조심해야 한다거나.”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눈빛이었지만, 곽 이사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알리는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사람이야.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전에 외국 축구 선수들이 연습 시합을 하다가 사우디 왕실기(王室旗)를 실수로 쳐서 떨어뜨린 적이 있었지, 그때 알리 왕자가 불같이 화를 내며 추방시켜 버렸다네.”
그 간단한 이야기 하나로도 알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다는 말이지요?”
슥 둘러보니 교차된 칼과 종려나무를 간소화한 디자인들이 집안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둘 다 사우디 왕실기에 들어가는 문양이며, 왕실기에는 교차된 칼 위에 종려나무가 그려져 있다.
칼은 정의를 상징하고, 종려나무는 번영을 의미했다.
‘취향! 집이야말로 취향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지!’
그 사람이 관심 분야를 알려 한다면 서재를, 음식 취향을 알고 싶다면 냉장고를 보면 된다.
달리 말해, 그 사람의 성품을 알고 싶다면 집을 가보면 된다.
들어가는 순간 알 수 있다.
깔끔한지 지저분한지, 간소한 걸 좋아하는지 허영이 있는지.
한 사람의 인생을 농축시킨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집’일 것이다.
알리가 레이스에게 이기게 된다면 성훈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부사장 팀에서 아무리 몰딩값을 올려서 받는다고 한들, 그동안 쌓아온 압둘과의 관계가 망가진다면 좋아할 것인가?
그건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래서 성훈이 생각하기에도 압둘이 이기는 것이 좋았다.
‘원래 압둘의 것이었잖아. 주인은 같은데, 값만 올라가는 거잖아.’
압둘이 이긴다면, 몰딩 단가가 올라가서 관계가 잠시 소원해질 수는 있지만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신 실적이 두 배로 늘어난다면,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을까?
압둘이라고 기분 좋을 리는 없었지만, 성훈이 시작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레이스의 주체는 알리 왕자였다.
‘압둘이 이긴다면 알리를 탓하겠지!’
이제는 상처 입은 호랑이를 달래야 할 차례였다.
아랍의 두 갑부는 팽팽하게 돈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가격이 200달러까지 치솟았을 때, 알리 왕자가 제동을 걸었다.
“압둘 자네! 그렇게까지 부르고도 팔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그럼 당연하지. 내가 자네보다는 이 업계에서는 선배지. 발도 훨씬 넓고 말이야!”
압둘은 충분히 팔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였다.
같은 건설 계통의 일을 하지만, 압둘이 몇 년 먼저 미국에서 돌아왔고, 그만큼 더 발이 넓었다.
“끄응! 감히 돈으로 내게 승부를 걸다니! 그럼 나도…….”
자신이 먼저 시작했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 알리 왕자였다.
단지 지금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패배감뿐이었을 것이다.
그런 알리에게 압둘이 제동을 걸었다.
“알리! 친구로서 조언하겠네. 자네가 나와 같거나 높은 가격을 불러서 이 몰딩들을 팔 수 있겠나?”
“이익!”
“팔 때마다 손해를 보게 된다면 사람들이 비웃을 거야!”
압둘의 말이 이어졌다.
“얼마 전에 주변의 만류를 제치고 구입했던 프리미어리그의 축구단을 잊었나 보지?”
“흥. 자네 따위가 축구가 뭔지나 알겠어? 조금만 더 기다리면 감독과 선수들의 케미가 폭발할 거라고.”
“그 말한 지가 벌써 일 년 전이다. 이 친구야! 몇 시즌이 지나도 변화가 없다면, 그건 안 되는 거야!”
“구단주와 선수들 간의 신뢰가 없다면, 될 것도 안 되는 법이지.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고.”
“축구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알리 자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흥!”
“하지만 사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건 분명히 자네의 실책이었어!”
정곡을 찌르는 압둘의 말에 알리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성훈은 둘의 치열한 레이스를 담담히 지켜보고 있었다.
곽 이사는 어이가 없었다.
‘이 자식. 뭐지! 호랑이 간이라도 삶아 먹은 건가?’
곽 이사가 귓속말을 속삭였다.
“그런데 자네. 정말 뒷감당할 자신은 있는 건가? 후환이 두렵지 않은가 말이야? 압둘의 보호를 받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말게. 그는 천생 장사꾼이야.”
알리가 이겼다면 압둘에게서 성훈을 지켜주겠지만, 압둘은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알리 왕자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했다는 것은 쉽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성훈은 알리에게 신호를 줬고, 레이스를 시작한 것은 분명 알리 자신이었다.
알리는 성훈의 순간적인 부추김에 레이스를 시작해 버렸지만, 중간에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상대는 앙숙인 압둘이 아니던가!
알리 왕자는 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분을 참고 있었다.
이득의 마지노선까지 불렀다.
설령 자존심 때문에 같은 가격을 부른다고 한들, 압둘을 제압할 수 없다.
선점의 명분은 압둘에게 있었고, 억지로 승리를 한다 한들 그때부터는 손해가 누적될 것이다.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알리 왕자가 분노를 참으며 일어섰다.
“오늘은 내가…….”
성훈의 말이 한발 빨랐다.
***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알리를 불러 세웠다.
“왕자님!”
“왜? 얼마나 더 수치를 주려고!”
알리는 검붉은 얼굴을 돌리며 눈을 희번뜩거렸다.
‘이제는 힐링의 시간이지. 상처를 덮어준 사람은 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척 봐도, 알리와는 앙숙인 압둘이었다.
그의 등장을 보자마자 머릿속으로 계획이 번쩍 떠올랐다.
이 둘을 동시에 엮어서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돈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 인물을 어떻게 제압할 수 있을까?
나 혼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기회를 주었다.
라이벌 압둘을 보내줬으니!
‘알리 혼자만 있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상황이었지.’
그냥 조금 더 높은 가격에 몰딩을 팔아서 알리에게 그저 그런 몰딩제작자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의 조건을 거부했다면, 알리의 분노를 샀을지도 모른다.
바로 한국으로 추방되거나, 혹은 입국금지를 당했을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시작된 바람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주었다.
‘둘 사이에서 내가 균형추 역할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둘 다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지.’
내 계획의 일 단계는 성공적이었다.
그 패배자가 알리가 된 것까지도!
패배를 모르는 인물이 패배를 당했다.
그 상처를 어떻게 아물게 해야 하는가?
‘그 자존심을 어떻게 살려줘야 하는가? 그 방법만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 아닐까?’
이것을 해결할 방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계획은 실행되었다.
곽 이사가 조마조마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 데리고 왔다고 신경이 쓰이기는 하는 건가? 당신 운 좋은 줄 알아! 중동통만 아니었으면 그냥 날려 버리는 건데!’
현재가 고난을 겪든 말든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선봉장인 곽 이사는,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나를 위한 발판이 되어야 할 인물이었다.
적어도 내 계획은 그랬고, 그러자면 계획의 일부가 되어줄 곽 이사가 이들에게 신뢰를 잃어서는 곤란했다.
또한 지금 당장으로서는 곽 이사보다 내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을 찾기 어려웠다.
‘대안이 없으니, 곽 이사라도 쓰는 수밖에. 어느 세월에 중동통을 키우겠어!’
진지한 눈빛으로 알리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받았다.
“혹여 다른 몰딩이 있다면, 구입하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알리도 그렇지만, 압둘 왕자도 눈을 빛냈다.
저들이 보기에 꽤나 마음에 드는 몰딩을 만들어낸 제작자였다.
그래서 현금 레이스까지 하면서 덤벼들지 않았던가!
그런데 다른 몰딩을?
알리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어때? 알리! 이대로 압둘에게 지고 끝낼 건가?’
내가 압둘이라면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뭐? 다른 몰딩이 있다면 그것까지 구입을 해버리자. 승기를 잡았을 때 확실하게 눌러 버려야지!’
같은 가격이라면 압둘은 무조건 알리보다 더 잘 팔 자신이 있을 테니까!
예상대로 압둘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도 입찰하지!”
나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직은 당신 차례가 아니거든. 기다려!’
압둘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왜!”
‘제작자가 팔기 싫으면 안 파는 거지! 왜는 무슨!’
하지만 이렇게 말했다가는 몸이 성치 못할 것이다. 웃으며 압둘을 달랬다.
“이건 알리 왕자님을 위한 디자인입니다. 취향이 다르시니, 압둘 왕자님께는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압둘이 물었다.
“알리의 취향이라고? 알리에 대해서 미리 연구라도 한 것인가?”
상훈이 집안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아뇨. 방금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 생각이 났다고?”
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압둘이 어이없다는 듯 자리에 앉으며 집안 장식을 둘러봤다.
“흥. 그렇다면 제대로 된 디자인이 나올 리 없지. 돈 말고는 취향이랄 게 없는 녀석이니!”
“뭐라고? 너 같은 낙타성애자보다는 백배는 낫다고!”
“어허! 성애자라니, 애호가라고 하게. 어쨌거나 나는 흥미가 뚝 떨어졌어!”
정말 흥미가 없다는 듯 압둘은 고개를 돌렸다.
***
집사를 향해 성훈이 말했다.
“식당에 민수라는 친구를 좀 데리고 와 주십시오.”
집사가 알리 왕자의 의중을 묻듯이 그를 바라봤다.
알리는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지금 당장도 충분히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치욕적인 패배를 인정해야 할 시점에, 제작자라는 녀석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아직은 패배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새로운 몰딩을 보고 나서 승패여부를 결정해도 되겠지.’
알리 왕자는 그 정도 마음의 여유는 있는 인물이었다.
“일단 보도록 하지. 단지 내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서 쇼를 하는 거라면, 난 오히려 더 화가 날지도 몰라.”
성훈은 알리를 달래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직 숙성되지 않은 디자인이라 실망을 드릴 수도 있겠지만, 맘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왕자님께 드리는 제 마음입니다. 무리한 경쟁으로 기분이 상하신데 대한 제 사과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성훈의 사과에 알리의 굳었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옆으로 눈을 돌려보니, 흥미가 없다던 압둘은 이미 그림에 몰두하는 성훈의 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압둘 자신의 취향을 저격이나 한 듯 쏙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만들었던 그 손 말이다.
현재건설 사장이 호언장담을 했었다.
압둘이라면 어떤 가격을 제시해도 살 거라고, 그 예상은 적중했었다.
알리 왕자는 아까 압둘이 자신을 제압하고 승자의 미소를 짓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렇지. 저런 몰딩을 만들었던 녀석이야. 정말 자기 실력이라면, 저것에 버금가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쩌면 알리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압둘의 찌그러진 얼굴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지!’
성훈은 자신이 없었다면 저렇게 말을 하지도 않았으리라.
알리는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며 집사에게 눈짓을 했다.
집사가 민수를 데리고 오기 위해 사라졌다.
새하얀 종이 위에 날카로운 칼이 지나갔다. 그 위로 종려나무가 돋아났다.
알리와 압둘이 보든 말든 성훈은 그림에 집중했다.
때로는 손을 턱에 올리고 지켜보다가, 다시 두 칼과 종려나무를 옮기기도 하면서,
두 왕자는 침묵한 채, 그림의 속도감 있는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명료한 개체가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알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
압둘도 헛바람을 내뱉었다.
“저럴 수가?”
이제는 나무 같기도 칼 같기도 한 문양이 생겨났다.
압둘이 물었다.
“알리. 저게 가능한 거야?”
알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알 리가 없잖아!’
그러나 분명히 그들은 단순한 문양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처음부터 지켜본 장본인들이었다.
점점 복잡해지다가 어느 순간 단순해지면서 명료해져 버렸다.
알리의 마음에 더 쏙 드는 것은 명료한데, 화려하다는 것.
‘왕가의 문장이 심플하기만 해서는 안 되지.’
처음부터 지켜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런 문양이 나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명료했다.
그 문양이 가지는 의미를 못 알아볼 수 없다는 것!
굳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지켜보는 둘의 표정이 상반되었다.
슬며시 웃음이 번져 나가는 알리와 심각한 표정의 압둘.
성훈이 고개를 들었다.
“알리 왕자님, 어떻습니까?”
“디자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잘 지켜보았네. 솔직히 마음에는 들어.”
아까의 분노는 사라진 흐뭇한 표정의 알리였다.
상처 입은 호랑이를 치유하는 작전은 거의 성공적이었다.
그냥 아름다운 몰딩과 왕가의 상징을 아름답게 만든 몰딩은 적어도 알리에게는 가진 바 의미가 다를 것이다.
“그렇습니까? 하긴! 이건 그림일 뿐 몰딩이 아니지요.”
민수가 도착했다.
“형. 부르셨다면서요.”
“응. 네 실력이 필요하다.”
민수에게 완성된 도안을 넘겨주었다.
“그새 또 하나를 만드신 거예요? 허 참.”
“길게 말할 시간이 없어. 시작해.”
성훈의 설명을 들으며, 민수가 조각칼을 들었다.
평면으로 된 저 도안이 입체적인 몰딩으로 재탄생될 때, 이 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림으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이를 민수는 조각해 낼 것이다.
이제는 민수가 활약할 시간이었다.
‘흠. 실력이 더 늘었군.’
민수의 조각칼이 움직일 때마다 알리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알리에게 익숙한 문양이 나무막대 위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되고 있었다.
조각칼이 지나간 자리에 문양이 생겼다. 같은 자리를 두 번 지나가는 법도 없었다.
한 번의 칼질에 칼날이 생겨나고, 이파리가 돋아났다.
손이 지나가길 기다렸다는 듯, 나무가 절로 문양을 빚어내는 것 같았다.
이제 알리와 압둘은 머리를 맞대듯 붙어 앉아 민수의 손놀림에 집중하고 있었다.
알리와 압둘은 서로의 존재를 알아채고,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이래서 나를 위한 몰딩이라고 말을 했던 거로군.’
‘확실히 아름답긴 하지만, 나와 어울린다고 말할 수는 없겠군.’
사우디 왕가에나 어울릴 만한 문양이 세련된 모습으로 재해석되어 있었다.
알리는 환하게 미소 지었고, 압둘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알리 왕자가 거의 완전한 모습을 갖춰가는 몰딩을 보다가 성훈에게 물었다.
“이건 우리 왕가의 문장을 재해석한 것 같던데, 맞는가?”
“네, 그렇습니다. 미리 허락을 받았어야 하는데, 생각이 짧았습니다.”
알리 왕자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어! 허락은 무슨. 알라시여. 감사합니다.”
그는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눈을 감고, 조용히 양손을 모았다.
***
그사이 몰딩의 손질이 끝났고 민수가 ‘후’ 하며 입 바람을 불었다.
“형. 끝났어요. 이걸 원하신 거죠?”
“수고했다. 민수야.”
민수에게서 몰딩을 건네받았다.
전후좌우로 몰딩을 돌리며 품평하듯 바라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완성된 몰딩을 기도를 끝낸 알리의 손에 얹어주었다.
“아직 도색이 되지 않아 초라합니다. 금으로 외부를 입히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알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왕가라면 당연히 금장이지. 오! 위대한 알라시여!”
몰딩을 두 손으로 받아 든 알리가 말을 이었다.
“내가 성훈, 자네를 오해했었군. 내 지금까지 쌓였던 불쾌함은 잊어버리도록 하지!”
그의 기쁨에 화답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몰딩으로 다친 자존심은 몰딩으로 치료해야죠!”
“그렇지! 자네 말이 맞아. 하하하!”
성훈의 말에 알리는 큰 소리로 웃었다.
알리가 성훈의 등을 두드리고는 압둘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압둘에게 보란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몰딩 계약 건은 내가 졌어! 크하하하.”
“인정하는 건가?”
“그럼 인정하네.”
알리가 성훈에게 말했다.
“아까의 패배는 이 몰딩을 얻기 위해 알라께서 주신 시련이라네. 크하하하.”
알리는 스스로 압둘에게 패배했음을 깨끗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가 누구인지 알리 왕자는 웃음으로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