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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97화 (97/427)

건축의 신 97화

발판을 다지다.(06)

거실로 들어갔을 때, 압둘과 알리가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곽 이사가 들어서자 압둘이 눈을 지그시 내리깔며 물었다.

“현재 곽 이사가 아닌가?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압둘 왕자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알리 왕자님의 사업 때문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곽 이사가 허리를 정중하게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하긴 한국 사람들은 항상 바쁘더군.”

“저희야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으니, 열심히 뛰는 수밖에 없지요.”

압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진 게 없어서 열심히 일한다는 데야.

“그래야지. 자네들 덕에 내 호텔이 한층 품위가 살았어.”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압둘이 탁자위의 몰딩을 손으로 집어 들고 이리저리 돌렸다.

“이게 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볼수록 묘하거든.”

곽 이사의 얼굴은 압둘의 말이 길어질수록 굳어갔다.

‘이 인간이 뭔가 알고 온 거야? 아니면 정말 그냥 놀러 온 거야?’

그냥 놀러 오려고 비행기를 타고 온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아까 저택으로 들어올 때, 착륙을 시도하던 비행기가 압둘의 비행기였던 것 같았다.

곽 이사는 보이지 않게 눈을 굴리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알리 왕자가 거물이고 큰 고객이기는 하지만, 압둘 왕자 또한 그에 버금가는 고객이었다.

둘 다 중동의 건설업계의 큰 손이었고, 경쟁관계였다.

이번 몰딩 건은 알리에게 몰아주고, 압둘이 다음 호텔을 지을 때 가서 다른 선물을 하며 화해를 청할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부터 챙기고 볼 일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신경전이 벌어지면 좋지 않은데.’

감정의 앙금은 오래 갈 것이고, 그것은 혹여라도 풀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젠장. 부사장이 발 빠르게 움직였군.’

곽 이사는 웃는 얼굴을 하면서도, 그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 빠져 나갈 구멍이라도 찾는 것인가?

압둘은 1m 남짓의 몰딩을 조명에 비춰 보기도 하며, 그 색의 변화를 즐기는 듯 보였다.

그리고 몰딩의 곧기를 확인하기라도 하듯, 한 눈을 찡긋하며, 몰딩을 눈앞에 곧추세웠다.

그의 눈이 향하는 끝에 안절부절못하는 곽 이사가 보였다.

압둘이 자신을 주시한다는 것을 알고, 머리털이 쭈뼛하게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능구렁이 같으니, 이미 다 알고 왔구나!’

압둘은 그 자세로 곽 이사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네 물건이라고 해도, 남의 일에 훼방을 놓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나?”

비릿하게 웃음 짓는 압둘의 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곽 이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모른 척하고 알리와 이어주고는 사우디를 급히 뜨려고 생각 중이었는데, 그걸 눈치채고 �i아오다니!

뒤통수라는 것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때나 통하는 말이었다.

‘끝났네.’

굳은 얼굴의 알리를 보며,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성훈이 물었다.

“곽 이사님, 지금 압둘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보는 바 대로라네, 모든 게 끝났지.”

성훈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난 이해가 안 되는데. 뭐가 시작되고, 뭐가 끝났다는 거지?’

중동통이라며 자신의 입으로 말했던 곽 이사를 이용해, 인맥을 만들려고 했던 프로젝트가 시작도 해보기 전에 망하게 생겼다.

자신을 이용하여 뭔가를 하려 했다는 것을 알았기에 괘씸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계획까지 무너지게 할 수 없었다.

곽 이사의 공이 있다면, 알리를 만나게 해줬다는 것, 덤으로 압둘까지 만날 수 있었다는 점.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성훈의 계획에는 칼같이 맞아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두 번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야!’

그리고 곽 이사를 중동 고객 관리자로 박아두려면, 지금 곽 이사가 망가져서는 곤란했다.

곽 이사에게 물었다.

“뭐가 끝났다는 건지, 제가 알면 안 되는 겁니까? 저기 있는 몰딩은 제 것 같은데요.”

‘하긴 이미 망가진 계획이니, 말해도 상관없겠지. 괜히 미움을 보탤 이유는 없겠지.’

곽 이사는 성훈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다음 해의 실적을 위해서라는 말도 덧붙였다.

“성훈 군. 그렇게 됐네. 본의가 아니게 미안하게 되었군.”

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업사원이 실적을 위해서 물불을 안 가리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인가?

지난 삶에서 성훈도 그렇게 살았었다.

“이해합니다. 이사님!”

곽 이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해한다고? 뭘? 25살짜리가 어떻게 이걸 이해한다는 거지?’

단지 계획의 실패로 말미암은 실망감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훈의 말에는 더 깊은 울림이 있었다.

‘내 절박함을 이해했다는 건가? 훗! 내 착각이겠지.’

“고맙군. 이해해 줘서.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끝나 버렸으니…….”

곽 이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안 되지. 안 돼. 중동의 저 부자들을 손가락으로 좌지우지해야 할 곽 이사가 여기서 무너지면 곤란해.’

성훈이 말했다.

“곽 이사님, 저 이용하려고 데려온 거 아닙니까?”

씁쓸한 웃음을 띠며 재차 사과했다.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질 않았다. 두 번씩이나 부끄럽…….”

“그 말이 아닙니다. 이용하려고 데리고 왔으니, 이용하시라구요.”

어이가 없었는지 곽 이사가 눈을 번쩍 떴다.

‘보통의 어린놈이라면, 이 상황에서 기분 나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도리어 이용하라고?’

“엉?”

“저 압둘이라는 자가 독점판매 계약을 한다고 했습니까?”

곽 이사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래서 나는 그걸 알리에게 넘기고, 잘 보이려고 했던 거 아닌가?”

“누구 맘대로요?”

“응? 그야…….”

성훈의 눈은 자신이 저 몰딩의 주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100달러 정도겠죠? 현재에서 중간 마진을 얼마나 붙이든, 저는 관심 없습니다.”

‘좀 마진이 많이 붙기는 했지.’

곽 이사가 알기에도 상당한 마진을 붙여서 파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성훈이 거래하는 공방에서 구입한 가격의 3배로 팔고 있다고 들었다.

성훈이 예측한 것처럼, 부사장이 압둘과 계약하려는 가격이 개당 15만 원, 즉 100달러였다.

도둑 마진도 이런 마진이 없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비싸도 좋으니 사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압둘이 독점 판매 계약을 원하는 것은 그걸 더 비싼 값에 팔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래도 팔리니까.

“우리 공방에서 안 만들어도 팔 수 있는 겁니까?”

“그야!”

“제가 현재에다가 만들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현재에서는 만들어 팔 수 있는가 보죠?”

막말로 현재가 만든다고 해도, 그것은 성훈의 제품을 대행 판매하는 것이지, 현재의 제품이 아니다.

지금 상황을 간단하게 풀이하면, 현재는 성훈의 제품을 팔아 마진을 챙기는 판매처에 불과했다.

곽 이사가 성훈의 말을 알아챘다.

그 물건의 주인은 성훈이었다.

오로지 성훈과 그 관계자만이 판매 여부를 결정할 수 있었다.

성훈이 말했다.

“어깨 펴시죠. 현재를 대표해서 오셔 놓고는 이게 뭡니까? 부끄럽게!”

“끄응!”

‘50 평생을 살면서 어린놈에게 훈계를 받을 줄이야!’

“그런데 날더러 뭘 하라는 말인가?”

곽 이사가 중동의 대갑부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알리 왕자의 편을 들었다가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부사장에게 맞아 죽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반드시 6개월 내로 곽 이사 스스로 자진 퇴사하도록 압박할 것이 분명했다.

부사장은 자신의 일을 훼방 놓은 자를 용서해 줄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압둘의 편을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급했어도, 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새삼 황 전무가 원망스러웠다.

그는 몰랐다고 발뺌만 하면 끝나는 일 아닌가!

곽 이사만 독박을 쓰게 생겼다.

‘에휴! 승진은 물 건너갔군!’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힘 빠진 곽 이사가 말을 이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서 깨질 일만 남았는데…….”

성훈이 곽 이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소개부터 시켜주시죠. 어린 제가 먼저 나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소개를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것 외엔 딱히 그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성훈은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압둘에게 다가가는 곽 이사의 등을 보며 빙긋 웃었다.

‘두 호랑이, 싸움 한번 제대로 붙여 볼까?’

“압둘 왕자님. 제 몰딩을 구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압둘이 소파에 기댄 채 씨익 웃었다.

“감사는 무슨!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구입한 거 아니겠나?”

“그냥 궁금해서 그렇습니다만, 제 몰딩을 얼마 정도에 구입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알게 될 테니 말해 주지. 개당 100달러를 주고 구입하기로 했네.”

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께서는 협상을 잘하시는군요.”

압둘이 눈썹을 으쓱이며 웃었다.

“지금 쓰이는 숫자들을 아라비아 숫자라고 하지.”

은근히 아랍인이 숫자에 능통하다며 압둘은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성훈은 실망스러운 표정이었다.

“흠, 아직 제 몰딩은 캐비어 한 통의 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는군요. 좀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압둘의 안색이 변했다.

응당 몰딩 하나의 가격이 100달러라면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뭐야! 지금 이 가격이 맘에 안 든다고 말하는 건가? 이거 하나에 100달러라고. 가치를 제대로 쳐줬다고!”

압둘은 제대로 거래를 했음에도 돈을 깎았다는 오해를 받은 거 때문인지, 몰딩을 쥐고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압둘은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성훈이 압둘에게서 돌아서며 눈을 찡긋했다.

곽 이사는 갑작스런 성훈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짝짝짝-

알리 왕자가 슬그머니 일어서며 박수를 쳤다.

그 신호는 곽 이사를 향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크크크. 협상을 잘했다니, 무슨 말인가 했네. 압둘! 너무 가격을 후려쳤군! 협상을 너무 잘했어!”

“무슨 의미인가?”

압둘은 눈매를 씰룩거리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지만, 알리는 여전히 빈정거렸다.

“이거 원, 압둘이 다 후려치니, 몰딩 만들 맛이 나겠나? 그러고도 자네는 거기에 마진을 곱절로 붙이겠지!”

“당연하지. 그래서 독점 계약을 하려는 건데.”

“500억 달러를 푼돈 취급하는 위인치고는 너무 쩨쩨하군! 제작자 친구, 내가 가격을 제대로 쳐주지. 150달러라면 기분 나쁘지 않겠지?”

압둘을 약 올리듯 바라보며 알리 왕자가 가격을 제시했다.

“이것 봐! 이미 현재와 이야기를 끝낸 거라고. 자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지.”

알리는 비릿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자네야말로 경우가 아니지 않나! 저 친구가 물건의 원주인이라고.”

“그래서 지금 자네가 이 판에 끼어들겠다는 건가?”

“뭐 어떤가? 계약이 된 것도 아니지 않나! 내가 보기엔 결정권은 저 친구에게 있는 것 같은데. 현재는 물건을 대행해서 팔아주는 중간 상인일 뿐이라고.”

압둘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성훈! 자네도 저 말에 찬성을 하는 것인가?”

성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왕자님들의 행사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압둘의 으르렁거림에 성훈이 고개를 숙였다.

“어찌 저 같은 일개 외국인이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전 단지…….”

“단지…… 뭐!”

“제 몰딩이 얼마에 팔리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성훈이 정중하게 압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알리 왕자가 성큼 걸어와서 성훈의 뒤에 섰다.

“그 몰딩의 권리가 이 친구에게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 자네가 불쾌하다고 해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인가?”

성훈이 압둘의 분노를 알리에게 떠넘기며, 곽 이사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곽 이사님?”

“응? 왜 그러나?”

곽 이사는 이제야 성훈이 한 윙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성훈이 압둘에게 이미 알고 있는 가격을 물어봤는지, 그리고 실망하는 척을 했는지.

‘개당 100달러! 나라면 춤을 췄겠지만.’

그리고 타고난 장사꾼인 알리 왕자는 왜 중간에 끼어들어서 가격을 올려 부르는지!

성훈이 어이가 없어 웃는 곽 이사를 보며 미소 지었다.

“여기서 가격을 더 올려서 계약을 하게 되면 부사장이라는 분이 화를 내실까요?”

곽 이사는 대답을 할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그저 이 어린 녀석의 진짜 속셈이 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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