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축의 신-96화 (96/427)

건축의 신 96화

발판을 다지다.(05)

곽 이사가 말했다.

“왕자님, 아까 차에서 저와 말을 하고 있던 사람이 저작권자입니다.”

“상당히 젊어 보이던데?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것인가?”

동양인이 아랍인의 나이를 잘 모르듯이, 그도 동양인의 나이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걸로 보였다.

“아닙니다. 이제 스물다섯 살입니다.”

“그런데 그런 몰딩을 만들었다고?”

“그때 보신 것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곽 이사는 준비해 온 사진첩을 내밀었다.

“여기가 압둘 왕자의 호텔 내부 입니다.”

사진을 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로비의 천정과 허리 몰딩으로 이것이 쓰였고, 각 실에는 다른 것이 사용되었습니다.”

“음. 확실히 은은하면서도 눈에 들어오는군.”

“돈이 되는 물건이지요.”

“돈은 별문제가 아냐! 이걸 낙타 젖이나 먹고 큰, 압둘 놈에게 빼앗긴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야.”

알리와 압둘은 젊은 시절, 미국의 UCLA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곽 이사가 알기로는 둘은 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중간에 관계에 금이 갔다고만 알고 있었다.

둘 다 그 이유를 말하지는 않으니, 알 수는 없었다.

압둘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거무스름한 왕자의 얼굴에 불쾌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왕자님, 제가 분위기를 잡겠습니다.”

“어떻게?”

“압둘 왕자보다는 왕자님께서 더 중동에서 영향력이 있지 않습니까? 판매되는 수량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나를 감히 그런 녀석과…….”

“거기다가 몰딩을 압둘 왕자보다 비싸게 쳐준다고 하면, 제 녀석이 어쩌겠습니까?”

“두 배 정도 부르면 되겠지? 이건 그 정도의 가치가 있어.”

“뜻대로 하시지요. 1.5배만 불러도 아마 하겠다고 할 겁니다. 그만큼 녀석은 돈을 많이 버니 말입니다.”

‘자고로 돈 앞에 장사 없는 법이지.’

***

식사를 끝내고, 프랭크와 함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집사가 내게 다가 왔다.

“김성훈 님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왕자님께서 찾으십니다.”

“저를요?”

“네.”

한 교수가 가보라며 손짓했다.

“나랑 스승님은 내일 아침 일정이 있어서, 먼저 호텔로 돌아간다고 말해 줘.”

프랭크와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지금은 알리 왕자도 중요했다.

‘왜 부르는 걸까? 좀 긴장되는데,’

말로만 듣던 최상급 캐비아를 날치 알 먹듯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니,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에 프랭크에게 물었다.

“프랭크. 다음에 일본 갈 때 한국 들르실 거죠?”

“어찌 될지 모르겠군. 가급적이면 들르는 방향으로 함세. 알리 왕자 확실히 잡으라고!”

후원자를 확실히 잡으라며, 내게 귓속말로 파이팅을 외쳤다.

프랭크와 한 교수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민수는 좀 더 남아 나와 함께 있기로 했다.

“곽 이사님, 왜 부르셨어요?”

그는 기숙사 사진첩을 내게 보여주었다.

“어! 우리 기숙사 사진이네요?”

“그러하네. 알리 왕자님께서 기숙사의 몰딩을 사기를 원하시네.”

“판매하는 과가 따로 있지 않나요? 거기에 말씀을 하시면 되죠. 제가 뭘 안다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판매되는 몰딩인데, 저작권자라고 내 맘대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더구나 곽 이사는 내가 저작권자란 걸 모를 텐데?’

의아했지만, 여기서 끼어들어서 누군가의 일을 훼방 놓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분명히 곽 이사는 뭔가를 알고 있었다.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성훈 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자네 몰딩을 알리 왕자님께 팔게나. 더 좋은 가격을 제시하실 테니.”

나도 모르게 눈썹에 경련이 일었다.

모든 거래는 민수 아버지를 통해서 진행했었다. 몰딩 관계자들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까지 현재에서도 몰딩 건으로 나에게 연락이 온 적은 없었다.

‘그런데 곽 이사가 알고 있다?’

돈이 있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는데, 모두 허사가 된 느낌이었다.

“그건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곽 이사는 내가 그런 질문을 할지는 몰랐든지, 아니면 자신이 성급했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티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내 눈에는 둘러대는 모습이 역력했다.

“어떻게 알기는? 우리 회사에서 판매를 하는 것인데, 내가 모를 리가 있겠나?”

‘영역이 다를 텐데? 건설과에서 해외 판매도 하나? 말이 안 되는 소리지!’

곽 이사는 당연히 안다고 얼버무리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그에게 말했다.

“이 몰딩은 저 혼자 결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한국에 돌아가서 결정해야 합니다.”

곽 이사는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다.

정밀하게 조사를 했다면 알 터인데, 최초의 몰딩은 저작권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르는 듯했다.

“왜? 이유가 뭔가?”

아니면 조사를 하기는 했는데, 정보를 준 사람이 정확하게 알려 주지 않았든지!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들었다는 건가?’

지금 시점에서 떠오르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훗, 누구한테 들으신 겁니까?”

“아닐세. 나는 그저.”

곽 이사의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이사님! 이 정보의 출처를 확실하게 알아야 다음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네요.”

***

성훈이 곽 이사에게 출처를 대라고 말하고 있을 때, 집사가 알리 왕자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알리 왕자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뭐라고! 그 인간이 지금 왜!”

현관문이 열리며 어떤 아랍인이 나타났다.

그 또한 알리 왕자와 비슷한 수준의 왕족인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그를 보던 곽 이사의 얼굴이 파래졌다.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길?”

곽 이사가 황급히 알리에게 다가갔다.

“곽 이사, 어떻게 된 거지? 압둘이 나타나다니, 그가 방문할 경우는 나를 놀릴 때뿐이라네.”

이미 침착함을 되찾은 알리는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일이 틀어진 것 아닌가?”

곽 이사가 얼른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직 계약을 하지는 못 했을 겁니다. 지금 한국 시간으로는 밤 12시입니다. 그전에 계약되었다면, 제가 이렇게 날아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알리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단지 그를 향해 웃으며 다가오는 압둘에게 눈을 고정시킬 뿐이었다.

곽 이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곽 이사가 전화 다이얼을 누르며, 다급하게 밖으로 뛰어 나갔다.

조용히 상황을 보다가 성훈도 그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알리 왕자는 소파에 앉은 채, 압둘을 맞이했다.

“어쩐 일이신가? 바쁘신 분이. 이 먼 곳까지?”

압둘은 그의 빈정 섞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멀기는 뭐가 멀다고 그러나. 친구 집에 오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친구! 친구라는 작자가 협의도 없이, 기름값을 내려서 팔아? 일부러 그런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그다음에 다시 올렸잖아. 왕자씩이나 되면서 좀스럽게 돈 몇 푼에. 쳇!”

혈압이 오른 듯, 알리의 눈매가 붉어졌다.

“돈 몇 푼? 500억 달러가 자네에겐 겨우 몇 푼인가 보지?”

어깨를 으쓱이며 대응하는 압둘에게 알리가 으르렁거렸다.

“우리도 내려 볼까?”

“그런 비생산적인 유치한 짓은 하지 말자고. 이제 애들이 아니잖나.”

“흐흐흐. 유치한 짓?”

압둘은 분노에 치를 떠는 알리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작대기를 들어 올렸다.

성훈이 디자인한 몰딩이었다.

휘휘 돌리더니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알리가 물었다.

“벌써 계약이 된 건가? 아직 안 된 걸로 아는데?”

“여전히 소식은 빠르군 그래! 하지만 거의 된 거나 다름없어. 우리 직원이 내일 아침에 계약하기로 했거든. 여덟 시간 남았나? 이 기쁜 소식을 자네에게 서둘러 전하고 싶었다네. 축하해 주겠지!”

알리 왕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흠. 그래?”

“뭐야? 그 웃음의 의미는?”

“거의 되었다는 거지. 완전히 되었다는 말은 아니군그래.”

“대책이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보아하니 그건 아닌가 보군. 알라신께 기도해 보게.”

“흐흐흐. 이번에는 신께서 내 편을 들어주실 것 같군.”

“왜 그렇게 장담을 하지?”

“알라신께서 너 같은 낙타성애자보다는 내 편을 들어주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쳇. 추잡한 협잡꾼이 되는 것보다는 낙타를 사랑하는 게 나아. 이 비겁자야.”

“흥! 패배자의 말치고는 거창하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지.”

***

“전무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알리 왕자의 저택에 압둘 왕자가 나타났습니다. 이미 상황이 종료되었으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아냐. 내가 아까 말했잖나. 서두르라고. 잠깐만 기다려 봐.

잠시 후 곽 이사의 전화가 울렸다.

-내일 아침에 계약을 한다는군. 어제 쿠웨이트에서 담당자가 출발했다고 하네.

“그럼 아직 계약이 된 것은 아니군요.”

-그러니까, 서두르라고 했잖아!

“네,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안전모랑 알리는 확실히 소개시켜 준거야?

“네, 안전모, 제깟 놈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알리와는 규모가 다르지 않습니까! 감히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이번 건 잘못되면, 내년에는 자네도 나도 실적 때문에 쪼여 죽어. 확실히 해!

“네, 알겠습니다.

-아씨. 부사장 전화 온다. 자네 거기 간 거 알았나 봐. 혹시 부사장 전화 오면 받지 마.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전무님은?”

-뭐 어째. 나도 씹어야지. 성공하면 전화해. 내일 아침에 더럽게 깨지겠네. 젠장!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쩌겠어? 그래도 욕 한 번 먹고 실적 챙기는 게 낫지 뭐.

***

나는 곽 이사의 말소리가 들리는 나무 뒤에 있었다.

‘안전모와 알리를 이어준다고, 안전모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거절을 못 한다고?’

“안전모가 누구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지금 곽 이사가 푸시를 하는 건 나밖에 없었다.

‘안전모가 나라면? 내가 돈이 많은 걸, 곽 이사가 어떻게 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곽 이사와 나 사이에 있는 접점!

전화를 걸었다.

지금 시간이면 한국은 밤 12시가 되었을 것이다.

‘역시!’

문 소장은 자지 않고 있었다.

-워머. 성훈 씨. 워쩐 일이다요! 사우디 심포지엄인가 간담서, 벌써 끝난겨? 재미는 있구?

속사포처럼 근황을 물었다.

한잔 술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뭐. 재미있었어요.”

-간 김에 잘 놀다 오시오? 아라비아 처자들도 만나보고!

그러나 문 소장의 농담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전화한 것도 아니었고.

“소장님이 말씀하셨죠?”

-거시기 뭔 소리다요? 대가리 꼬리 다 잘라 묵고 말을 하믄 우째싸! 그라믄 워떤 눔이 알아듣는다고.

“몰딩 의장권 말이에요?”

-엥! 당최 뭔 소린지 한나도 못 알아듣겠당께!

하지만 그의 당황한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이 인간이 사방팔방에 떠들고 다녔구만. 그렇게 입 조심을 하라고 했는데!’

“저, 지금 곽 이사랑 같이 있습니다.”

-워매! 참말로 그 인간이, 누구 디지는 꼴 볼라고. 거그가 사우디라고 했지라.

“네.”

-그랴서 그란지, 감이 안 좋당께요. 성훈 씨. 성훈 씨! 전화가 잘 안 터쟈불구만. 사우디라서 그런가? 잘…….

‘어디서 발 연기를!’

문 소장의 말을 잘랐다.

“여기서 끊으시면…….”

-…….

“저 정말 화낼 겁니다.”

문 소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아따. 나 전화가 문제였구만이라. 인자 잘 들리니께 말씀하셔유.

“이 이야기, 또 누구한테 했습니까?”

-지는 맹세코 그 인간헌티만 말했당께. 걸리믄 디졌다고 복창하라고 하셔유.

“옆에 있는데, 바꿔 드릴까요?”

-딸꾹!

“곽 이사님!”

문 소장이 비명을 질렀다.

-성훈 씨. 살려주시랑께. 나가 문씨 집안 5대 독잔디. 홀어머니 모시고…….

‘아주 쇼를 하는구마! 돌아가면 보자!’

일단 출처는 확인했다.

그리고 궁금한 점이 남았다.

“소장님, 그런데 안전모, 안전모 하던데, 그게 뭡니까?”

-거시기…… 안 듣는 게 나을 텐디.

“말씀 안 하시면 더 화날 것 같습니다.”

내 으르렁대는 소리에 문 소장이 이실직고를 했다.

-그란디 그 양반이 본사에 올라가서 뒤집어 놓았나 벼. 그 담부터 기숙사로 내려와쌌고 지랄들을 혔잖소. 그랴서 안전모라믄 …… 중략…… 치를 떨더랑께유.

‘최 이사가 날 처음 봤을 때,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이사라는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것에서 느꼈던 어색함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최 이사도, 곽 이사도 저 나름의 이유가 다 있었다.

곽 이사도 안 그런 척하면서 뒤통수치는 전형적인 여우였다.

‘꼬리를 잘라놓든지, 아니면 꼼짝을 못 하게 하든지.’

지금 저 대로만 놔둬도 곽 이사는 피 말라 죽을 것이다.

한국은 자정일 텐데도 전무라는 자와 통화가 되는 것을 보니 사정이 다급한 모양이었다.

영업하는 사람이 다급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실적!

‘그래도 지금까지 적의를 보이지 않은 걸 보면, 최 이사처럼 적대적이진 않다는 건데.’

“문 소장님!”

-말씀허쇼. 워떤 말이라도 들을 랑께.

“안전모가 뭔지, 제가 안다는 사실을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말하면 따지러 갑니다.”

-따지고 자시고 헐 꺼 없당께. 절대로 말 안 헐텡게. 맘 푹 놓으시오.

통화를 끊고, 곽 이사가 있는 거실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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