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94화
발판을 다지다.(03)
거의 끝나갈 때 즈음, 사우디 건축협회 회장이라는 사람이 프랭크를 소개했다.
“프리츠커 수상자이며, 세계 건축가들의 멘토이신 프랭크 베리 교수님을 소개합니다.”
저명한 인물의 등장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원래 예정에 없었던 만큼 의외였던 모양이다.
강단에 선 사람은 연회색 체크무늬 니트에 쥐색 오래된 양복을 입은 하얀 백발의 신사였다.
“프리츠커라는 과분한 상을 받은 프랭크 베리입니다.”
차분하게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려는 거의 모든 것은 이미 과거에 시도되었던 것들입니다. 그 방법이나 형식만 다른 뿐이지요. 전통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명백합니다……. 중략……. 전통에서 배우되, 맹신하지는 말자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사람들은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다.
한 교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저분에게 건축을 배웠어.”
그의 한국 전통에 대한 마음은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았다.
혹시 스승과 같은 길을 걷고 싶지만, 그 방법을 한국 전통에서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
심포지엄이 끝나고, 한 교수의 스승인 프랭크를 만나러 갔다.
그는 이미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3미터 이내에는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프랭크에게 질문을 던지며 답을 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나처럼 얼굴 도장 찍으려는 건가?’
한 교수도 그 사이를 뚫고 지나가기는 난감한 듯, 주변에서 어정거리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프랭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 친구가 나와 통화했던 자네 제자인가?”
“네, 프랭크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는 일일이 나와 민수에게 손을 꼭 쥐어주며 말했다.
“승원이 덜렁덜렁해도, 할 때는 하는 사람이야. 잘 좀 도와주게나.”
정말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한 웃음을 지으며 한 교수를 부탁했다.
“킴. 석사과정은 잘되어 가고 있나?”
한 교수가 나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못 했던 모양이다.
“프랭크. 아직 성훈이는 학생이에요. 2학년.”
프랭크는 놀랬다는 듯 나를 보며 웃었다.
눈가에 접힌 주름이 그의 푸근한 미소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그래? 이해가 빠르고, 잘 알아 듣길래, 전문가 과정을 밟고 있는 줄 알았지.”
“성훈이가 이해력이 좀 빠르지요. 응용력도 좋고.”
잠시 대화를 나누던 프랭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아까 그 사람들한테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겼어.”
“다른 약속이 있으신가 보죠? 프랭크?”
“미안하네, 승원. 같이 얘기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미리 정해 놓은 후원자와의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정말 미안한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죠. 이거 제 수정한 논문입니다. 봐주세요.”
재빨리 한 교수는 프랭크에게 논문을 넘겼다.
프랭크는 논문을 그 자리에서 몇 페이지 넘기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훨씬 나아졌군. 읽어 보고 전화 주겠네.”
그와 인사를 마치고, 한 교수가 돌아섰다.
“미안하다, 얘들아. 기대 많이 했을 텐데.”
“아뇨. 얼굴 도장 찍었으니 됐어요.”
한 교수를 위로하며 심포지엄 회장을 나섰다.
무척이나 기대했던 프랭크와의 만남은 그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꼭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
거장과의 꿀 같은 만남을 이렇게 끝낼 생각은 없었다.
‘다음에 일본에 온다고 했었지. 꼭…….’
***
호텔 밖으로 나가는데, 누군가가 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까 회장에서 사회를 보던 사람이었다.
그가 영어로 물었다.
“혹시 한국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누구지? 이곳에서 우리를 알 만한 사람이 있었던가?’
“네, 맞습니다만.”
“알리 왕자님께서 여러분을 초대하셨습니다. 정중하게 모셔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정중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한 교수님, 이곳에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한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하지만 가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민수도 옆에서 거들었다.
“네, 여기는 왕권이 강해서 웬만하면 응해 줘야 한대요.”
정중한 초대였지만, 거부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초대를 했으니 당연히 응한다고 확신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뭔지 몰라도, 기회가 빨리 오겠는걸.’
나는 호구를 낚으러 왔고, 눈먼 호구가 벌써 입질을 하는 느낌이었다.
다만 내가 의도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찜찜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이 익숙지 못한 한 교수는 불편한 기색이었다.
“교수님, 이건 기회예요. 언제 우리가 왕족을 만나 보겠어요!”
나는 오히려 기분이 좋다면서 한 교수를 설득했다.
그래도 한 교수는 별로 기분 좋아 하지 않았다.
사회자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더니 조용히 말했다.
“한 교수님, 프랭크 교수께서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 교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요? 진작 그렇게 말을 하지.”
‘진작 그렇게 말했으면 이렇게 실랑이하지 않았을 거 아냐.’
우리들의 불만을 짐작했는지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희에겐 왕자님의 명령이 우선이라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시지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며 우리를 안내했다.
복도를 지나 중문을 열자, 사회자는 물러가고 다른 사람이 안내를 이어받았다.
집사로 추정되는 인물이었다. 그 또한 중동인에 새하얀 양복을 입고 있었다.
지금까지 온 복도가 모던한 느낌이 강한데 비해,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고풍스러운 모습이었다.
페르시아산 카펫이 쭉 이어진 아주 고급스러운 로비였다.
복도임에도 폭이 널찍하고 천정이 아주 높았다.
그리고 천정에 조명이 달린 것이 아니라, 벽에 촘촘하게 조명이 있었고, 천정 군데군데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아주 돈으로 발랐구만. 부럽다.’
우리가 신기한 듯 주변을 바라보자 안내자가 말했다.
“아까 거기서부터는 알리 왕자님의 개인 집무실입니다.”
“개, 개인 집무실이라고요?”
우리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니, 로비 양쪽으로 문이 있어야 할 곳에는 문이 없고, 모두 개방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회계사로 보이는 인물들이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조금 더 지나가자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한 교수가 입을 헤벌린 채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아야 이런 사무실을 가질 수 있는 거냐?”
우리 한 교수의 사무실은 아까 지나온 한 칸짜리 개방된 사무실보다도 작았다.
넓은 집무실에 군데군데 둥근 대리석기둥이 있어, 아까 우리가 심포지엄을 하던 곳이 호텔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갑부의 개인 저택도 이보다 화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야, 진짜 부자는 중동에 다 몰려 있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돈에 전혀 욕심이 없는 한 교수가 보기에도 부러운 모양이었다.
‘진짜 진짜 부자구나. 감당할 수 있을까?’
그냥 한 번 만나서 안면이나 트고 나중에 낚시질을 해야겠다는 내 생각이 쪼그라들 정도였다.
아무리 호구라도 이런 스케일이라면 덤비기 어렵지 않을까?
집사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왕자님, 귀빈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왕자를 향해 인사하고, 다시 왔던 곳으로 사라졌다.
응접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왕자가 누구인지는 소개를 받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콧수염을 단정하게 깎고, 사우디 전통의상인 ‘토브’를 입고 ‘구트라’를 쓰고 있었다.
토브는 흔히 TV에서 볼 수 있는 긴 소매의 하얀 의복으로 펑퍼짐해서 편안한 느낌을 주는 옷이며, 구트라는 머리에 쓰는 끈으로 매는 면직물이다.
그런 의상을 입은 사람이 한 명밖에 없었으니, 당연히 그가 왕자일 것이다.
그리고 얼굴에 ‘내가 왕자야’라고 쓰여 있었다.
느긋한 얼굴에 배인 여유는 가지지 않은 자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나이 마흔이 약간 넘은 듯 보이는 그가 우리에게 말했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소. 수하들이 무례를 범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소.”
그의 말에 우리는 불편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손짓으로 우리를 비어 있는 의자로 안내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그는 함께 있던 사람들을 소개했다.
프랭크야 원래 있을 거라 예상했던 사람이고,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도 있었다.
뜻밖에도 현재건설 곽 이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
내가 입을 벌리자 그가 씩 웃으며 목례를 했다.
‘저 사람이 저기 웬일이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데, 알리 왕자가 곽 이사 쪽으로 어깨를 젖히며 뭐라고 아랍어로 물었다.
곽 이사가 우리 쪽을 바라보며 물음에 대답을 하고 있었다.
아마 우리를 소개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곽 이사는 아랍어를 아주 편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왕자가 곽 이사의 말을 들으며, 나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참 답답한 일이었다.
‘저 양반은 영어를 할 줄 모르나? 왕족이면 미국이나 서구 쪽에 유학도 다녀왔을 텐데.’
하지만 대놓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
그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프랭크가 나를 보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얼굴이야 오늘 처음 보는 거지만, 그동안 몇 차례 통화를 해서 그런지, 처음 보는 남 같지 않았다.
프랭크에게 물었다.
“왜요?”
“성훈! 제대로 잡아봐!”
노교수답지 않은 아주 친근한 언어를 구사하며 프랭크가 말을 했다.
“뭘요?”
“건축을 하려면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하지.”
“그럼 아까 후원자를 만난다는 약속이 이거였어요?”
“당연하지. 중동 부자만큼 좋은 후원자가 어디 있나?”
“교수님 얘기는 다 끝나신 거예요?”
“그렇다네. 후원해 주기로 약속을 받았지.”
그의 말은 타당했다. 예로부터 능력 있는 건축가들은 모두 든든한 후원자를 가지고 있었다.
가우디가 만약 구엘 백작이라는 후원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과연 구엘공원이라는 명작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건축가와 후원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가 왜 익살스러운 웃음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런데 교수님이 우리를 부르자고 하신 거예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내 제자가 왔다는 걸 알고 불러도 되겠냐고 묻더군.”
“그래서요?”
“나도 승원에게 소개를 하고 싶었지만, 워낙 폐쇄적인 사람이라서 함부로 말할 수 없더군. 그런데 먼저 부르자는데, 내가 마다할 이유가 있겠나?”
“흠, 그렇군요.”
‘그럼 곽 이사와 뭔가 연관이 있는 것인가? 그런데 왜?’
불러놓고도 계속 곽 이사와 이야기한다는 것이 좀 신경이 쓰였다.
왜일까?
“자네는 승원보다 훨씬 눈치도 빠르고, 상재가 있는 것 같으니, 승원을 도와서 후원을 받도록 하게나.”
“한 교수님께 직접 말씀하시지 그래요?”
“안 돼. 녀석은 돈에 관심이 없어. 옆에서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어려울 거야. 그런 의미에서 잘 부탁하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배우는 처지인데.”
“그럼! 서로 도와야지. 승원도 자네를 신뢰하고 있으니, 좋은 콤비가 될 거야.”
한창 프랭크와 귓속말을 나누고 있을 때, 알리 왕자가 일어서며 영어로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집에 가서 식사나 하면서 얘기합시다.”
곽 이사가 그의 말에 맞장구쳤다.
“영광입니다, 왕자님.”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왕자님께서 개인적으로 초대를 하시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승낙하심이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