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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92화 (92/427)

건축의 신 92화

발판을 다지다.(01)

사장이 아침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장님! 왕 회장님께서 화성 현장에 들르셨답니다.”

“뭐? 갑자기 무슨 일로?”

사장은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건설사업은 현재그룹의 밑바탕이 된 분야였고, 그런 만큼 회장은 현장을 바라보는 눈이 매섭다.

털고자 마음먹으면 먼지 안 나는 것은 없으니, 사장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방금 왕 비서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래? 그분이 뭐라시던가? 혹시 꼬투리 잡힌 거라도.”

왕 비서는 회장의 수석비서를 말한다.

현재그룹의 모든 비서의 우두머리이며, 회장은 그를 통해 그룹의 동향을 알게 되므로, 누구보다 중요한 위치이다.

그룹 사장들 중에서 회장 직계라 해도, 왕 비서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평가를 받을지, 사장의 심장이 바짝바짝 타올랐다.

비서도 사장의 마음을 알기에 바로 결론을 말했다.

“회장님께서 칭찬을 하셨다고 합니다. 현장 분위기가 아주 깔끔하다고 말입니다.”

“휴, 그래. 난 또.”

“직원들의 근무태도도 아주 좋았고, 특히나 안전에 대한 교육은 확실하게 되어 있다면서, 흐뭇해하셨다고 합니다.”

“다행이야. 난 또 불호령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

“이번 계약 건에 대해서도 기대가 크시답니다. 그리고 왕 회장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답니다.”

“뭐야.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이 사람아.”

“‘아주 이사들 군기를 확실하게 잡았구만. 이대로만 해’라고 말입니다.”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사들을 쪼는 게 답이었어.”

“그리고 서 전무는 언제 불러들일 거냐고 물어보셨답니다. 서 전무가 왕 회장님께 전화해서 징징거렸나 봅니다.”

“서 전무, 그 사람이!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아직 멀었다 그래!”

김 비서가 피식 웃었다.

‘이거 아무래도. 서 전무님은 좀 더 알래스카를 즐기셔야 할 것 같은데. 예정보다 조금 더.’

***

“선배님, 신문에 온통 현재건설 이야기뿐임다.”

“그래? 우리 이야기는 없고?”

우리 이야기가 없을 리는 없다.

다만 신문이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우리 설계보다는 현재건설에 맞춰져 있다는 거겠지.

한석을 향해 피식 웃었다.

“왜 심통 나냐?”

“그래도 너무하잖슴까. 설계는 우리가 다했는데, 칭찬은 온통 현재에게 쏠려 있으니 말임다.”

“거기서 기자들 불렀는데, 어련하겠어? 자기들한테 좋은 말만 했겠지. 그래도 모형사진은 나와 있네!”

한석은 아침부터 뚱한 표정이었다.

“쳇! 신문에 나와 있는 이름도 교수님이랑 선배님만 나와 있고 말임다.”

그것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거냐? 이놈아.

한석의 말처럼 아주 작게 우리 모형 사진 밑에 ‘지도교수 한승원, 참가자 김성훈 외 2명’이라고 쓰여 있었다.

“현재건설 이야기 하느라, 우리 이야기를 쓸 정신도 없었나 봄다.”

한석은 지금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

국방부에서는 결국 군 미필이라며 비자를 내어주지 않았고, 생애 처음 해외 여행할 기회를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심포지엄 티켓에 눈길 한번 주고는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쯧쯧. 불쌍한 녀석. 그렇게 기대했는데 말이죠.”

녀석의 뒷모습을 보고, 선영이 혀를 찼다.

어쩌겠나?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인걸?

찾아보면 다른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미안하다. 한석아. 넌 가도 도움이 안 될 거야. 영어를 못해서. 민수는 뭐. 걱정 안 해도 되겠지.’

“티켓이 한 장 남네.”

한 교수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지만, 무시하고 선영을 바라봤다.

“선영이랑 가야 되겠다.”

“야! 김성훈!”

하지만 이내 그의 눈은 선영을 향했고, 선영이 말했다.

“교수님께 양보해 드릴게요.”

“브라보!”

한 교수가 만세를 불렀다.

옆에서 보던 선영이 피식 웃었다.

원래 선영은 안 가기로 했었다.

그녀가 호주로 유학을 가는 것도 사실은 어학연수의 목적이었다.

1998년, 지금은 영어만 잘해도 대기업에 취직이 가능했었다.

선영이 물었다.

“선배, 사우디 가면 뭐 하실 거예요?”

“훗. 사우디 하면 사막과 낙타 아니겠어? 베드윈 족처럼 낙타를 달리며 사막을 횡단해야지!”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으스댔다.

“에휴! 사막에서 실종되는 사람 또 하나 있겠네. 교수님은…….”

그는 사우디를 갈 수 있다는 기쁨에 우리 대화가 들리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이미 한 교수는 낙타 탄 자세로 ‘돌격 앞으로’를 하고 있었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예비 실종자가 둘로 늘었다.

“커흠, 역시 사막 하면 낙타 아니겠어?”

우리 둘 다 중동은 처음으로 가는 것이니, 정보가 없었다.

산유국이라 부자고 왕족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으며, 낙타가 있고, 베두윈족이 있다 정도?

그저 잘 사는 나라이니, 뭐든지 잘 되어 있지 않겠어? 라는 마음이었다.

***

한 교수는 신이 났다.

“이번 심포지엄에 스승님도 오신다네? 오랜만에 얼굴 뵙겠는걸.”

“저번에는 일본으로 가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응. 그 학회가 좀 미뤄져서. 이번 심포지엄에 참가하실 수 있게 됐다더라.”

“그분은 어떤 분이세요?”

“천재시지! 미국에도 몇 안 되는 프리츠커 수상자이시기도 하고.”

한 교수가 자랑스러워하는 걸로 봐서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았다.

프리츠커 상을 탔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거지만.

한 교수가 물었다.

“성훈아. 너 이번 겨울방학 때 뭐할 거냐?”

“아직은 사우디 심포지엄 말고는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시간 되면 유럽 여행이나 다시 한 번 가고 싶네요.”

“하긴. 쉴 때도 됐지. 어지간히 빨빨거리고 돌아다녔잖아.”

‘당신이 뺑뺑이 돌렸거든요. 교수님아.’

쉬지 못하게 한 주범이 그런 소리를 하니 어이가 없었다.

‘내가 이번 학기에 뭐 했더라. 푹 쉬었던 기억이 하나도 없네.’

그럴 만도 했다.

해외여행 다녀와서 다음 날 바로 감리로 현장 투입됐었지!

도산소장이랑 현상설계 작업하느라 며칠 동안 못 잤고,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했었다.

그 뒤엔 바로 에펠탑 만든다고 정신없었구나.

다음엔 기숙사 인테리어한다고 한 달 후딱 지나가고, 그저께까지 구조대전 때문에 개 발에 땀나게 뛰어다녔다.

딱 3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강행군이었네. 미쳤네. 미쳤어. 힐링이 필요해.’

내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하냐? 성훈아?”

“그 와중에 공부를 했다니, 제가 기특해서요.”

“마! 다들 그렇게 공부하는 거야!”

“교수님도 일하면서 공부하셨어요? 안 그러셨을 거 같은데요?”

“나야 뭐, 아버지가 부자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지.”

한 교수가 돈에 별로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미국에서 자수성가 하신 분이신가 보군. 부러운 인생이야.’

그러고도 건축에 재능과 열정까지 있으니 타고났다고 할까?

“여러 가지로 부럽네요. 참, 논문은 끝나셨어요.”

우리가 한창 구조대전 모형을 만들고 있을 때, 한 교수는 가까스로 논문을 끝내고 모형 만들기에 참여를 했었다.

“음, 퇴고까지 해서 예일의 스승님께 보냈어.”

“네? 예일에는 왜?”

“잘못된 게 없는가 해서. 아직 내가 완전히 홀로 설 나이는 아니잖냐.”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좀 더 나은 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논문을 봐주기를 바라는 연구자의 자세이리라. 저것 또한 배울 만한 점이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뭐 보낸 지도 얼마 안 되니까, 못 읽으셨을 거야. 워낙 바쁘신 분이거든.”

“계속 같이 계셨으면 더 좋으셨을 텐데, 아쉽네요.”

“그건 그렇지 않아. 계속 침체되는 느낌이라서, 이리 옮긴 거야. 내 생각엔 잘한 선택인 것 같아.”

한 교수는 밝게 웃었다.

발전을 원하는 자가 가장 답답한 것은 답보하는 상태일 것이다.

전진을 위해 나아가지도 못 하고,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도 못 하는 상태.

하지만 한 교수는 계속 발전하고 있었다.

“이번에 가셔서, 논문에 대해서 여쭤 보면 되겠네요. 건승을 빕니다.”

“훗, 고맙다. 녀석아.”

“뭘요.”

“부탁이 하나 있다. 성훈아.”

한 교수를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나 수업 들어가 있을 때, 스승님한테 전화 오면 네가 좀 받아라.”

“알았어요.”

“혹시 무슨 설명 하시면 이거 보고 옆에다가 받아 적어놔!”

한 교수가 자신의 논문을 내게 건넸다.

구조 관련 논문일까? 한 교수의 고민은 무엇일까?

그동안 내 일이 바빠서 한 번도 물어보지 못했던 한 교수의 학문적 고민이 그 안에 들어 있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그리고 며칠 뒤, 한 교수, 민수, 나!

이렇게 셋은 사우디로 떠났다.

***

곽 이사가 들어왔을 때, 황 전무는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있었다.

“야! 곽 이사. ‘공법 저작권을 반반 나눠 먹자. 그러면 그게 말이 돼냐!’고 사장님께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겨우 허락받아냈으니, 결과 제대로 내!”

“네, 알겠습니다.”

“절대로 현장에서 구조 가지고, 놈이 딴죽 거는 일이 없게! 확실하게 하란 말이야. 놈을 설득하든지, 만족시키든지. 알았어?”

“그런데 전무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방금 전 사장에게 타박을 당한 황 전무는 짜증이 났다.

“또 뭔데?”

“놈이 건축 심포지엄 때문에 사우디로 간답니다.”

“뭐?”

황 전무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당장 결과를 내라고 해도 시원찮은 판에, 그 당사자가 외국을 나간다니!

무슨 꿍꿍이가 생각났는지, 잠시 후 황 전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잘됐네. 따라가 봐!”

“네? 왜 말입니까?”

“자네, 사우디통이지?”

“아니, 전무님! 제가 어린놈 가이드나 하러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 곽 이사가 되받아쳤다.

“이 친구가, 말을 끝까지 들어! 사우디 호텔 공사 거의 마무리된 거 알고 있지?”

“당연히 알고 있지요? 제가 계약 따왔지 않습니까?”

자신의 실적인데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사우디에서 오랜 시간 경력을 쌓은 그이기에 별명이 사막의 여우였고, 사우디에는 그의 인맥이 많았다.

“그 알리 왕자가 다음 해에 또 호텔 짓는 거 알지?”

돈 많은 사우디에서는 원유를 팔아 건물을 짓는다.

그중에서도 알리 왕자는 사우디 건설업의 최강자였다.

곽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 전무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휴. 그런데 윤 이사가 천정 몰딩 마감을 알리 왕자 맘에 들게 못 해서, 다음 계약 어려운 것도 알고 있지?”

모를 리가 없다.

그 건으로 중동 전역을 담당하던 윤 이사는 사장에게 완전히 찍혀 버렸다.

“알고 있죠? 아직 시공사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황 전무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곽 이사에게 말했다.

“그 알리 왕자가 쿠웨이트 압둘 왕자가 푸시하는 몰딩 독점 판매권을 탐내는 것도 알겠네?”

그는 중역용 사내 게시판에 나온 압둘 왕자 건을 말하고 있었다.

“당연히 알지요. 그리고 둘은 앙숙 아닙니까?”

“그럼 답 나오잖아!”

“그러니까! 전무님 말씀은, 안전모랑 알리랑 이어주고, 다음 호텔 계약 건 가져오라는 말씀이시군요!”

“그 정도면 알리도 두말없이 계약할 거야. 우리 입장에서는 판매권이야 누가 가져도 상관없잖아!”

곽 이사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자신이 꽉 쥐고 있었으니까.

“알리 왕자를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반드시 계약해 오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당장 계약 따와! 서 전무 돌아오기 전에 바짝 실적을 올려놔야지!”

“네! 알겠습니다.”

사막의 여우, 곽 이사도 사우디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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