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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91화 (91/427)

건축의 신 91화

여우와 개(09)

황 전무는 문 소장 건에 대한 곽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가장 큰 고민거리가 남았다. 그러나 마땅한 답은 없었다.

“후. 그 건은 그렇게 마무리 짓게. 안전모 녀석은 어떻게 할 텐가?”

“아직 정체를 모르니…….”

현장에 오지 말란다고 안 나올 놈도 아니고, 어떤 놈인지는 알아야 그에 맞는 대응을 할 터였다.

곽 이사라고 마땅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녀석은 폭탄과도 같아. 너무 가까이 하면 좋을 게 없는데 말야!”

“일부러 멀리 하는 모습을 보일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자. 이 말이지?”

자신의 중도(中道)와 맞기는 하나, 놈이 현장에 들어가서 무슨 난리를 칠지 덜컥 겁부터 나는 황 전무였다.

곽 이사 말처럼 가까이 하기엔 위험하고, 멀리 두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네, 언제든지 손이 닿을 거리에 말이지요”

황 전무가 소파에 기댄 채 턱을 괴었다.

“이놈 이거. 생각할수록 보통내기가 아닌데.”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안전모 놈 말이야.”

“뭔가 있는 녀석인 건 확실합니다.”

쥐뿔도 없는 놈이 나댔다면 과연 이런 고민을 할 필요나 있었을까?

황 전무가 감탄하는 말이 이어졌다.

“저작권을 말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고, 사장님의 의중을 알고 있었다라.”

곽 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첨언했다.

“그리고 사장님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건축을 사랑하는 놈입니다.”

“그건 경우가 약간 다르지. 사장님이 분노했던 건, 우리 품질이 더 못해서 그런 거야. 건축인의 정신하고는 상관이 없어.”

사장은 건설이라는 사업에 전문가이지, 진짜로 건축을 알지는 못 한다.

경영을 배웠지, 건축을 배운 것은 아닐 터!

황 전무는 그 차이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그런데 놈은 건축 하나를 알기도 어려운데, 경영자의 의중을 알고 있었어. 아니, 더 나아가 있었지.’

서른도 안 된 젊은이가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윗사람의 의도를 짐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곽 이사가 감탄하듯 말했다.

“그래도 저는 역시 놀랐습니다. 사장님께서는 한국 건축의 미래를 생각하시고…….”

“그것도 아냐. 사장님이 이번 계약으로 얻으려 하셨던 건 우리나라 건축의 미래가 아니야.”

“네? 하지만 이번 계약 건만 보더라도, 신문에서도 대서특필했잖습니까?”

“그거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거고. 내 생각엔 말이야.”

자신보다 더 영민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황 전무다.

그는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을까?

곽 이사가 귀를 기울였다.

“사장님께서는 이번 건으로 왕 회장님께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으시려는 거였어. ‘건설은 제겁니다’ 하고 말이야.”

“그럼 건축의 미래니 뭐니 하는 것은?”

“얻어 걸린 거지.”

설마요? 하는 눈빛으로 황 전무를 바라보았다.

“거의 확실해. 김 비서가 그 부분에서 당황했거든. 알고 있었다면 그런 반응이 아니었을 테지!”

확신하는 전무였다.

상황 판단에 있어서는 곽 이사를 능가하는 그가 아니던가!

“그럼, 처음부터 저작권은?”

“그래. 사장님은 애초부터 저작권에는 관심이 없으셨어. 우리가 계약을 한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했던 거야. 신문에서 크게 말할 정도로 이슈를 만들면서.”

듣고 보니 황 전무의 말이 맞았다.

어제 밤에 체결된 계약이 벌써 조간신문에 실릴 정도면, 일부러 기자들에게 뿌린 것이 아닌 이상 불가능했다.

울산 구석의 마을 회관에서 이뤄진 계약을 기자들이 무슨 수로 알았겠는가?

황 전무가 확신했다.

“김 비서가 일부러 기자들 모아서 기자회견한 거야. 기자들은 신문 많이 팔려고, 건축의 미래라는 말로 장식을 한 것이고, 아니, 어쩌면 김 비서가 일부러 과장한 것일 수도 있지.”

아까 김 비서와 통화하면서 황 전무는 분명히 뭔가 어색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군요. 저는 지금까지…….”

“그게 경영자의 마인드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변의 모든 것을 이용하지. 결과만 좋으면 돼.”

“그렇군요. 사장님께서 기숙사를 견학시킨 건, ‘이게 샘플이다. 이렇게 품질을 만들어라’라는 거였군요.”

“안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고, 모두 사장님의 의도에 귀결되지. 왕 회장님의 눈길을 끌기 위한 것이야.”

곽 이사가 동의했다.

“그런데 녀석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고, 더 나아가 미래를 보고 있지. 그게 말이 되냐는 거야.”

“저도 그래서 그런 의문을 품은 겁니다. 다른 교육을 받은 게 아닐까 하고요. 겨우 스물다섯 살짜리가.”

“무슨 교육?”

“아닙니다. 그냥 추측입니다.”

“뭔데. 거리낌 없이 말해봐!”

말 꺼내기를 머뭇거리던 곽 이사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저 제 개인적인 추측일 뿐입니다만, 사장님의 핏줄일 경우도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인되지 않은 정보로 상관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이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황 전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곽 이사!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사장님을 모신 지가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분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건 없어.”

곽 이사는 의심이 들었다.

‘혹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닌가?’

불여우 같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래 봐야 황 전무가 얻는 것은 없을 터, 오히려 황 전무 라인인 자신과 의논을 해야 맞는 말이었다.

“하하. 그렇지요. 저도 그냥 생각만 해본 겁니다.”

황 전무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확인되지 않은 것에 심력을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알아보라고 시켰다면서,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지.”

“네, 그럼 저녁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현재그룹의 역량을 발휘한다면 사람 신상 하나 터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

“뭐 좀 나온 거 있나?”

“전무님,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인물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뭐!”

화들짝 놀란 전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의 자리가 바뀔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만…….”

곽 이사의 말에 황 전무는 다급하게 물었다.

“뭐든지 좋으니까 말해보게. 지금 상황에서는 뭐라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안전모가 주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건설사 주식으로 말입니다.”

“뭐? 건설사 주식? 벌써부터 돈을 밝힌다는 건가?”

황 전무 자신이 듣기에도 여간 영악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그게…… 몇백, 몇천 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만 주가 넘는다는 말이야!”

만 원짜리 주식이 일만(一萬) 주만 있어도, 그 금액은 쉽사리 일억을 넘어간다.

그것만 해도 학생이 가지기에는 큰돈이었다. 어느 재벌집 자제가 아니라면 말이다.

“몇십만 주 단위로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건설회사 주식임은 확실합니다만, 그 이상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몇십만 주? 그럼 수십억!”

그게 대학생이 가질 수 있는 금액인가?

곽 이사가 이번에 알게 된 정보를 새롭게 내놓았다.

“쿠웨이트 수출 몰딩 말입니다.”

“뜬금없이 그게 왜?”

“의장권의 40%가 안전모의 몫이라고 했습니다.”

“뭐? 그걸 왜 지금 얘기하나?”

“죄송합니다. 문 소장이 했던 말인데, 지금 생각이 났습니다.”

“그걸로 산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벌써 일 년 전부터 가지고 있던 주식이라고 합니다.

황 전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그럼 자네 말처럼 이번 계약으로 얻게 되는 수익은 말 그대로 푼돈이 되는 거야.”

“문 소장의 말대로 저작권을 포기할 이유 자체가 없었던 거군요.”

“이거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겠는걸.”

황 전무가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니, 자신의 예상이 빗나간 것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전무님, 그보다 건설회사 주식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어디 회사 거라고 하던가? 혹시 우리 회사?”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안전모가 스치듯이 말을 뱉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뭔가?”

“이왕이면 현재건설과 계약을 했었으면 한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정말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신문에 대서특필될 줄 알고 급히 주식을 산 것도 아닐 테고.”

“어쩌면 예상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선두주자 운운한 것으로 봐서는 말입니다.

곽전무가 생각하면 할수록, 성훈이 허투루 한 말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렇기는 한데, 아직은 부족해. 다른 정보는 더 없나?”

“그 이상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현재 쪽 증권회사에 맡긴 것이 아니라서, 이것도 겨우 알아낸 겁니다. 이 이상 알아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냐. 아냐! 그 정도만 알아낸 것만 해도 어디야!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야.”

황 전무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그의 고민에 곽 이사가 한 가지 문제를 더 얹었다.

“문제는 그렇게 돈이 많은데도, 성훈 군 어머님께서 평범한 집에 사신다는 겁니다.”

“이거 뭐! 이렇게 아귀가 안 맞냐? 자네 같으면 그렇게 살겠나?”

“절대 아니지요.”

“그럼 이건.”

“뭔가 숨기는 게 많다는 겁니다.”

“우린 그걸 찾지 못한다는 거고.”

곽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알아내면서 곽 이사는 지금의 황 전무보다 얼마나 더 경악했던가!

자기 앞에서 티셔츠를 입고 고기를 구우며 웃던 성훈이었다.

자신에게 말을 놓으라던 그 젊은이가, 사실은 이사인 자신보다 훨씬 더 부자라는 사실에 경악했고, 그것 말고도 지금 벌어들이는 돈 또한 자신의 연봉은 우습다는 사실에 기겁을 했다.

‘전부 연기였다는 건가! 그 앞에서 현재건설 이사라고 건방을 떨었다가는.’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계속 이어지는 행보가 현재건설과 접점이 많다는 것.

단지 울산이라는 지리적 이유만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성훈 자신도 계속 현재건설을 언급하지 않았던가!

그게 그냥 하는 말이었을까? 그렇게 통찰력 있는 사람이?

‘아냐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지금 생각해 보면 한 마디도 허튼소리가 없었어. 모두가 복선이고 암시였어.’

비록 속아 넘어 가기는 했지만 문 소장이 없었다면 그대로 믿었을 정도로 정교한 거짓말이었다.

“왜 숨길까요?”

젊은 나이에 자신의 재력을 숨기고 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보통은 자랑하고 싶고,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시계를 가지고 싶은 법이다.

나이트도 가고, 술도 마시면서, 젊음을 만끽할 나이가 아닌가?

황 전무가 말했다.

“숨겨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겠지.”

“그게 뭡니까?”

“아침에 곽 이사 자네가 한 말이 있었지. 사장님의 핏줄이라는 말.”

“터무니없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터무니없는 소리지. 그런데 말이야. 사장님 동급의 핏줄이라면…… 짐작 가는 데가 있다.”

“그럼 왕 회…….”

“쉿!”

갑자기 황 전무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손가락으로 곽 이사를 불렀다.

둘의 얼굴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가깝게 붙었다.

고개를 좌우로 도리질하면서도, 혹시나 하며 황 전무가 속삭였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거 말고는 짚이는 데가 없어.”

“뭡니까? 전무님.”

“곽 이사, 너 혼자만 알고 있어. 너니까 말해주는 거야. 대신 딴 데 가서 입 벌리면 너부터 죽는 거야.”

“뭔데 그리 심각한 겁니까?”

“예전부터 돌던 소문 말이야.”

“저는 모르는데 말입니다.”

“당연하지. 잠깐 돌다가 말았거든.”

“왕 회장님에 관련된 일이야.”

“그럼. 그 왕 회장님께서 늦…….”

“쉿. 그런 얘기가 아니야. 왕 회장님의 숨겨놓은 자식에 대한 거야.”

말도 안 되는 루머를 거론하는 황 전무를 보고, 곽 이사는 긴장이 풀려버렸다.

“허. 전무님! 말이 안 됩니다. 왕 회장님 연세가 몇이십니까? 안전모 나이를 생각해도!”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숨겨놓은 자식은 얼마 전에 죽었어. 내가 확실히 알아. 남은 건 그 손자지.”

“냉혈한이신 왕 회장님께서 다시 거둘 일이 있겠습니까?”

“회장님도 나이가 드셨으니,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는지는 모르지.”

곽 이사는 황 전무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에이, 전무님도. 그런 루머가 한두 개인 줄 아십니까?”

그러나 황 전무는 지극히 진지했다.

“그렇지. 수도 없이 많고 많지.”

‘이 인간이 없는 소리를 할 위인은 아닌데.’

곽 이사도 진지해졌다.

현재건설의 소식통 하면, 바로 황 전무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루머가 많은지 생각해 봤나?”

“왕 회장님을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왕 회장님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도 방치하시는 이유는 뭐겠나?”

“그야. 당연히 근거 없는 루머다 보니 대응할 가치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다고 해도, 왕 회장님께서 그런 루머를 근절할 능력이 없어서 방치하신 거겠나?”

“그럼 뭡니까?”

“바늘은 솔잎 속에 숨기고, 옥은 구슬 사이에 숨기는 법이라네.”

“헉. 그럼? 그게 사실이라는…….”

곽 이사는 깜짝 놀라 헛숨을 들이켜며 자신의 입을 막았다.

황 전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근거 없는 소문들 중에, 딱 하나 진실인 게 있어.”

‘왕 회장님의 루머는 수백 개를 넘어가지. 이 하나를 위해서 일부러 지우지 않으신 거로군.’

곽 이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야기를 끼워 맞추면, 안전모의 수상한 행적도 아귀가 맞는다.”

황 전무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대리 시절이니까, 벌써 25년 전 이야기다.”

아무도 진위 확인을 못 하는 왕 회장의 비사를 듣는다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황 전무도 긴장했는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할 때, 왕 회장님을 수행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성훈이 숨기고자 하는 사실과 왕 회장이 숨기고자 하는 사실이 만나 오해를 낳았다.

***

볼펜심으로 아무리 후벼도 시원하지가 않았다.

“아. 귀 간지러. 미치겠네.”

“성훈 선배! 더러워요. 나가서 파고 와요. 쫌!”

선영이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게! 여자라서 때리지도 못 하고. 한석이 이놈이 분명히 내 욕하는 거야.’

한 교수가 물었다.

“성훈아. 심포지엄 참가 준비는 잘돼가냐?”

“모르겠어요. 저랑 민수는 별문제 없는데, 한석이 녀석은 입대가 얼마 안 남아서 비자내는 절차가 까다로워요.”

“그래? 한석이 빈자리는 내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한석이는 지금 어떻게든 사우디를 가보려고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다. 좀 어려울 것 같지만.

‘내가 안 도와준다고 나 욕하는 건가? 너 오기만 해봐라. 죽었어.’

“모르죠. 아직 시간은 넉넉하니까요.”

두 번째 인생의 2학년 2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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