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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90화 (90/427)

건축의 신 90화

여우와 개(08)

다음 날 아침, 곽 이사가 목례하며 결재서류를 내밀었다.

“전무님, 다녀왔습니다.”

“오, 곽 이사! 수고했어. 정말 수고했어.”

“전무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입니다.”

곽 이사의 결재 서류를 보다가 ‘1,200만 원 상당’의 특별경비내역이 있었지만, 얼굴 한번 쳐다보고는 결재를 했다.

얻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이번에도 실패를 했었다면 황 전무는 사장에게 신뢰를 잃었을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사장은 알래스카에 있는 서 전무를 불러들일지도 모른다.

“용케 따 왔구만. 별일 없었나?”

“네, 별일은 없었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곽 이사를 보며 황 전무가 눈치를 챘다.

“어제 말했던 신경 쓰인다는 건인가 보구만. 말해보게. 확실하지 않아도 되니까.”

“네, 그저 제 느낌일 뿐입니다만…….”

황 전무는 곽 이사의 보고가 금방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세상에는 서면으로 보고할 것과 서면으로 보고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황 전무가 일어서며 인터폰을 눌렀다.

“차 두 잔 부탁하네. 곽 이사.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하세. 판단은 내가 할 터이니 속 시원히 말해보게.”

곽 이사가 논리정연하면서도 간략하게 말하는데도, 20분의 시간이 걸렸다.

“이상입니다. 전무님.”

“주목할 만한 점이 있는 젊은이군.”

“그에 대한 것은 조사를 시켰습니다.”

“그건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이야기하도록 하고.”

탁자에 찻잔을 놓으며 황 전무는 말을 이었다.

“확실히 평범한 젊은이가 할 수 있는 안목이나 경륜은 아니야.”

“그 친구는 사장님의 생각이 그럴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먼저 사장님의 의중을 알아봐야겠어. 김 비서에게 전화를 해 봐야겠군.”

황 전무가 수화기를 들었다.

황 전무의 통화가 끝나자 곽 이사가 물었다.

“김 비서가 뭐라고 합니까?”

“이거! 괜한 말을 한 거 아닌가 몰라.”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어떻게 그렇게까지 생각했냐고 되묻는군. 정확하다면서 오히려 놀란 눈치던데?”

“그런데 그게 왜 괜한 말인지.”

“상관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말해도, 심기를 거스르는 법이네. 적당히 중간을 가야 하지. 오래 살아남으려면 말이야.”

“그렇군요. 듣고 보니 옳으신 말씀입니다.”

눈앞의 상관은 곽 이사 자신보다 더한 불여우였다.

현장에서는 불같은 성격으로 지휘를 했지만, 본사에 들어온 뒤에는 지극히 몸을 사리며 승진에만 몰입해 온 인물이었다.

크게 공도 없지만, 크게 과실도 없었다.

그러나 주변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폭풍이 불 때는 몸을 사리는 게 맞는 법이지.’

곽 이사에게 있어, 황 전무는 자신과 스타일도 비슷하고, 배울 점이 많은 상관이었다.

너무 잘나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황 전무는 직장 생활에서의 중도를 아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전무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말해보게.”

“이번 공사 건 말입니다.”

황 전무는 기분 좋게 웃으며 곽 이사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아무도 못 채갈 거야. 무조건 자네에게 할당될 테니.”

흔한 아파트 건설이 아니라, 초고층 빌딩이었다.

사장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승진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었다.

이미 계약한 건이므로 누구나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곽 이사가 놓지 않는 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황 전무도 다른 이사들이 노린다는 것을 걱정할까 봐서, 미리 확신을 주는 것이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현장 진행에 관한 겁니다.”

“특채고용? 기숙사 현장에 그 소장 말인가? 왜?”

황 전무는 곽 이사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재건설에는 그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어서? 발에 차이는 게 인재인데!

곽 이사는 안전모, 아니, 성훈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기숙사 현장을 진행하면서 어떤 일을 했는지.

황 전무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학생이라면서? 설계부터 시작해서 몽땅? 이게 말이 돼?”

“기초와 일부 외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간섭했다고 봐도 됩니다.”

“거짓말 아니야? 제대로 확인은 한 거야!”

어제의 곽 이사와 똑같은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며 황 전무는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의심스러워서 넌지시 물어봤습니다. 현장을 모르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 말입니다.”

거짓이었다면 곽 이사가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진짜던가?”

“네, 아쉽게도 진짜배기였습니다.”

“흠…… 우리 현장에 데리고 와서 기사로 쓰고 싶을 정도인데.”

‘저도 어제 그런 생각을 얼핏 했었지요.’

곽 이사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겁니다.”

“뭐가 문젠데?”

“그렇게 현장을 잘 아는 놈이 우리 현장에 와서 감시를 할 거란 말입니다.”

“훗. 못 들어오게 하면 되지!”

곽 이사가 그걸 몰라서 그럴까?

못 들어오게 하는 방법은 수십 가지가 될 것이다.

“문제는 명분이 없다는 겁니다.”

“무슨 명분?”

“놈이 설계에 대한 저작권을 쥐고 있습니다.”

“아! 맞다.”

잊고 있었던 저작권이 튀어나왔다.

저작권을 챙기자니 설계도를 못 챙기고, 결국은 포기하고 신경 쓰지도 않았었다.

“아마 녀석은 설계대로 되는지 분명히 확인하러 올 거고.”

황 전무도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설명이었다.

“제 생각에는 그것 때문에 저작권을 놓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숙사 현장에서도 하나하나 다 간섭했다고 합니다. 설계부터 마무리까지.”

“그럴 테지. 자네 말만 들어도 짐작이 가는군.”

“사장님께 큰 소리를 친 것이야, 몰랐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이야기해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황 전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가 바뀌었다는 말이지?

“자기 설계에 대해서는, 설령 사장님이 하라고 해도 양보를 할 놈이 아닙니다.”

“무슨 말을 했길래?”

곽이사는 어제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황 전무가 곽 이사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뭐? 저작권 하나를 가지고 그런 말을 했다고? 우리나라의 미래? 미친…….”

“사장님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아니, 아마 못 하셨을 거야. 이건 사장님 레벨이 아냐.”

“그럼……. 왕…….”

“됐고. 그냥 젊은 놈이 자기 꿈 이야기한 거야. 넘어가! 굳이 확대해석할 필요 있겠어?”

나중에 문 소장의 말을 듣고, 성훈의 속셈을 알아차렸지만, 그런 말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문 소장이 아니었다면, 전 놈을 순수하게 건축을 생각하는 청년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놈은 분명히 현장을 확인하러 올 것이고, 최악의 경우는 아예 현장에 붙박이로 붙어버리는 상황이다. 이거지!”

“네,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그래도 그놈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문 소장이 꼭 필요합니다.”

“끙. 구관이 명관이긴 하지.”

안전모만 없으면 현장 진행에 차질이 없을 것이다.

그런 공사를 하루 이틀 한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원설계자가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늘어지면, 공사는 절대로 진행될 수 없다.

안전모 녀석의 깐깐한 성정상, 분명히 그럴 거라는 것이 황 전무의 눈에도 선하게 그려졌다.

곽 이사가 넌지시 물었다.

“전무님! 만약에 그런 상황이 오면…… 사장님은 누구 손을 들어줄 것 같습니까?”

기숙사를 보고 배우라며 현장 견학까지 보낸 사장이다.

짝퉁도 아니고, 오리지널이 와서 공사 감시를 하겠다고 하면 사장은 박수를 칠 것이다.

그리고 그 관심은 오로지! 안전모에게 쏠릴 것이다. 공도 녀석이 독차지하겠지.

황 전무는 곽 이사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안전모 녀석이 실수하기만을 바래야겠지.”

“그렇습니다만, 젊은 친구가 실수하는 것은 당연한 거지. 흠이 안 됩니다. 젊은 친구가 의욕적으로 하다가 실수했는데, 누가 탓하겠으며, 흠이 되겠습니까?”

황 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렇게 이사까지 성장했으니까.

“실수했다고 욕을 했다가는 옹졸한 놈이 되겠지.”

“그리고…… 솔직히 그렇게 흠 잡힐 실수를 할 놈도 아닙니다. 봐서 아시잖습니까?”

“우리 애들로는 안 될 것 같나?”

“웬만한 놈으로는 잽도 안 될 겁니다. 최 이사 봐서 아시잖습니까?”

황 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최 이사도 제대로 붙었다고 보기는 어려워. 제대로 승부를 봤다고 보기는 어렵지.”

“그렇긴 합니다만, 전 오히려 제대로 붙었다면…….”

“붙었다면?”

“최 이사 이빨부터 꼬리까지 다 털렸을 겁니다. 젊은 녀석이 그런 안목을 가졌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오히려 저렇게라도 끝난 게 다행이다. 이 말인가?”

“우리라고 그런 일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끙. 그렇다고 최 이사 놈에게 이 현장을 밀어줄 수도 없고?”

가장 주목을 받을 현장이 떫은 감이 되었다.

씹지도 못 하고, 뱉지도 못 하고,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이야 생각이라도 해 봤겠는가?

“최 이사를 완전히 떨구실 생각이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엔 파이가 너무 크지.”

“네, 차라리 녀석의 비위를 맞출 수 있고, 잘못될 경우에는 책임을 전가할 제물(祭物)을 찾는 게 훨씬 이득입니다.”

황 전무의 말처럼 구관이 명관이라고, 이 상황에 문 소장보다 적합한 인물이 있던가!

곽 이사의 한숨이 깊어졌다.

“그놈이 현장에 오면, 오십 다 되가는 소장 놈들 말려죽일 겁니다. 저는 차마 그 꼴 못 보겠습니다.”

“너무 과대 해석 하는 거 아닌가?”

‘직접 안 만나 봤으니, 그런 말을 하실 수 있는 거지요. 전 어제 감쪽같이 속았습니다.’

어제 문 소장이 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대책은커녕 준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 아닌가?

생각만 해도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전무님. 현장에 사장님이랑 똑같은, 아니, 더 독한 놈을 두고 일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고 자네 말처럼 낙하산을 소장으로 떡하니 박을 수는 없잖아? 현장이 장난이야!”

황 전무의 말도 타당했다.

외부인을 소장으로 앉히려면 그만한 명분이 필요했다.

사장도 납득하고, 자기 아래의 소장과 이사들도 납득할 만한 명분!

일개 중소기업 소장을 대기업 현장의 소장으로 앉힌다면, 누가 납득을 하겠는가!

곽 이사는 재빨리 다른 안을 제시했다.

“그러니까. 문 소장 놈을 공사과장으로 박아버리는 겁니다. 소장은 우리 라인으로 앉히고 말입니다.”

제 새끼 당하는 꼴 못 보겠다고, 외부에서 인원을 끌어와야겠다고 항변하는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리고 소장이 아니라, 공사과장 자리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황 전무가 물었다.

“그럼 문 소장에게 우리 쪽으로 오라고 하면 되겠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왜?”

어제 자기 일 아니라고 문 소장이 얼마나 웃어 젖혔던가?

놈이 마지막에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죽이고 자픈 놈 있으믄 그 자리에 앉히시랑께요. 크헤헤.’

문 소장 자신이 곽 이사의 죽이고 싶은 사람 세 손가락에 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바로 오라고 하면, 아무리 높은 연봉을 준 대도 오지 않을 겁니다.”

“설마! 돈이라면 염라대왕도 고개를 숙여. 이 사람아. 하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황 전무가 농을 던졌다.

그러나 곽 이사는 진지했다.

“어제 제가 헤어질 때, 문 소장 놈을 슬쩍 떠봤습니다. 현재건설 소장자리 할 마음 있냐고요.”

“그랬더니? 마음 있다던가?”

눈치 빠른 문 소장은 열변을 토했었다.

‘그 자리유? 일 없으니께, 딴 데 가서 알아보셔유! 나가 성훈 씨허고는 두 번 다시 안 한당께요. 돈을 보따리로 앵겨줘두 안 혀유. 머리 뭉탱이로 빠진다는 거시 빈말이 아녀유. 여그 지 대그빡 보이시쥬. 지는 안 혀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어림도 없는 소리라며 그 자리서 못을 박았었다.

이미 돈이야 몰딩으로 어느 정도 벌었으니 큰 욕심이야 있었겠냐만, 그 사실을 곽 이사는 알 리가 없었다.

“죽어도 안 한답니다.”

“어허! 이 사람아. 그럼 그것도 답이 아니잖나!”

“아닙니다. 어제 술 마시면서 들어보니, 그 회사 사장이랑은 죽고 못 사는 사이랍니다.”

“그래서?”

곽 이사가 비릿하게 웃었다.

“기숙사 비리 건 때문에 한 번 회사가 휘청했답니다. 지금 자금이 바닥이겠지요.”

그의 말을 알아들은 황 전무도 역시 웃었다.

“흐흐흐. 그러니까. 자네 말은 사장한테 현장 하나 던져주고, 놈을 데리고 오자?”

“그렇습니다.”

둘이 유쾌하게 웃었다.

문 소장 머리가 뭉텅이로 빠지든, 명줄이 짧아지든 그건 문 소장의 몫!

황 전무가 말했다.

“크하하. 그건 절대 미리 말하지 말게. 현장 시작하기 직전에 놈이 알게 하라고.”

“이를 말씀입니까? 미리 알면 해외로 도망칠지도 모릅니다. 하하하.”

“확실하게 엮어보라고. 이 현장만 무사히 끝내면, 내 자네에게 이 방을 물려주지!”

“감사합니다. 그때가 되면, 전무님께서도 부사장으로 승진하셨을 테니까 말이지요.”

알래스카의 서 전무가 돌아오지 않는 한, 남아 있는 부사장 자리는 응당 황 전무의 차지일 것이다.

한국 건축계의 주목을 받을 현장의 공사과장은 이렇게 정해졌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문 소장은 대머리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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