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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89화 (89/427)

건축의 신 89화

여우와 개(07)

성훈이 말하는 내내 곽 이사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놈, 도대체 뭐지? 어디서 다른 교육이라도 받은 건가? 어떻게 어린놈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러나 역시 반박할 말은 없었다.

현장의 시간 부족을 말하면 준비가 미흡했다고 할 것이고, 준공허가를 받기 어렵다고 해도 정성이 부족하다고 할 것이다.

무슨 말을 해도 핑계가 된다. 시도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 친구 말에 따르면, 발전이 있기 위해서는 건축가에게 저작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현장의 진행에만 우선권을 두게 되면, 양적 성장은 가능하지만 곧 한계에 부딪힌다.

밀레니엄을 바라보는 지금 한국의 건축계 전반적인 상황이 그러했다.

‘그럼 이 친구는 성장 한계의 돌파구를 기술의 자생력을 키우면서 만들겠다는 것인가?’

곽 이사가 너무 앞서서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곽 이사가 들은 성훈의 말은 그것 외의 다른 의미로는 해석할 수 없었다.

‘최 이사가 상대할 수 없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라.’

곽 이사가 말했다.

“우리 최 이사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군요.”

“그분은 관례라고 하더군요. 제가 차분히 설득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가 가져가니까요. 하하.”

성훈은 단지 자신이 미래에 챙길 수 있을지도 모를, 미지의 소득을 위해 고집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곽 이사는 저작권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황 전무도 관심 없었다.

‘뭐라고 하면 이대로 말해야지 뭐. 안 되면 배 째라고 하고. 그래도 정히 알래스카로 가야 한다면, 최 이사가 가겠지.’

여전히 알래스카의 두려움은 있었지만, 둘 다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곽 이사는 저작권을 가져가지는 못 하지만,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최 이사는……

만약 둘 중에 하나만 가야 한다면?

최 이사가 당첨인 건 정해진 사실이었다.

‘일단 계약도 따냈고, 알래스카에서도 한 발 멀어졌다. 그런데 이 녀석의 정체는 뭐지?’

“혹시 성훈 군은 외국에 유학 다녀온 적이 있으십니까?”

뜬금없는 곽 이사의 질문에 성훈은 당황스러웠다.

“아뇨. 그런 적 없습니다. 왜 그런 걸 여쭈시는지.”

“건축에 대해서도 그렇고, 생각하는 범위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다른 걸 배운 적이 있는지를 물으시는 겁니까?”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군요. 굳이 예를 들자면 전문 경영이라든가 하는 거 말입니다.”

“전문 경영은 사업체를 이을 사람이나 하는 거 아닙니까?”

성훈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니 오히려 되물었다.

곽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대답 속에 뭔가 답이 있지 않을까? 아니면 내가 너무 앞서서 생각하는 것일까? 그냥 생각이 넓은 친구일 수도 있는데.’

“아뇨. 그런 적 없습니다.”

곽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춘부장께서는 어떤 일을 하시는지.”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쩌다가…….”

곽 이사의 눈이 빛났다.

“별일 아닙니다. 곽 이사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집안이 아닙니다.”

성훈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일도 아닌 것을 떠벌릴 이유는 없지 않은가.

‘너무 파고드는 것도 이상해 보이겠지. 조사해 보면 나올 거야.’

현재그룹의 정보력은 어마어마하다. 피하려고 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훈이 아니라고 해도 곽 이사의 머리에는 이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현장학습부터 하는 로열패밀리 같은데…….’

대놓고 ‘나 누구 아들이야!’라고 한다면, 후계자의 현장수업이 제대로 되겠는가?

경영 수업? 현장 다 배우고 나서 해외로 유학가면 된다. 30대가 되어도 늦은 것이 아니다.

왜 군대를 갔냐고? 나중에 정치할 때를 위해서 지금부터 경력관리를 하는 것이 아닐까?

‘정치에 뜻을 두신 왕 회장님이라면, 애초에 뿌리부터 다잡아 키우시는 것일 수도.’

성훈이 스치듯 했던 말도 생각났다.

‘아까 안전모가 분명히 그랬었지. 기왕 할 거라면 현재와 하고 싶었다고. 이게 그냥 나온 말이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 하나의 단서조차도 곽 이사에게는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성훈은 지금까지 만들어둔 현재의 인맥을 좀 더 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의미였다는 것을 곽 이사가 과연 알까?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 이 젊은이가 만약 자신의 추측대로 그 핏줄이라면? 아니라면?

어떤 경우가 되었든지, 곽 이사가 함부로 할 사람은 아니었다.

핏줄이 아니라면 실력으로 치고 올라갈 젊은이였고, 핏줄이라면 그것대로 곽 이사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몰딩으로 벌어들이는 돈만 해도, 곽 이사의 연봉보다 많지 않겠는가?

‘쿠웨이트의 압둘 왕자가 독점 판매권을 달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사내 게시판에 올라왔던데.’

이사 직급이기에 확인할 수 있는 정보였다.

‘누군지 몰라도 운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일 줄이야.’

독점 판매권을 달라는 말은 아직도 팔아먹을 곳이 많으니, 내가 팔게 해달라는 말과 같았다.

그렇다면 곽 이사 눈앞의 젊은이는 아직 얼마나 돈을 더 많이 벌게 될지 모른다.

‘이래도 저래도, 나는 피라미가 되는 것인가?’

술자리가 깊어가는 지금, 곽 이사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이건 코앞에 닥친 현실이야. 생각해 내야만 해. 돌아버리겠네!’

눈앞에 있는 ‘안전모’라는 인간 때문에!

이 현장은 분명히 곽 이사 자신의 소관으로 떨어질 것이다.

전무가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으니 분명했다.

그가 고민하는 것은 현장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

불과 10분 전의 일이었다.

곽 이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훈 군, 공사 진행을 하게 되면 현장을 들를 생각입니까?”

“네, 당연히 들러야지요. 도면대로 공사가 진행되는 확인해야 하니까요.”

이때는 성훈의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학생 신분인데,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현장에 나가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겁니다. 실습보다 더 좋은 공부가 있겠습니까?”

이때는 ‘하하하. 참 열정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현장이 급해져서, 도면대로 안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뜯고 다시 시킬 겁니다.”

곽 이사는 심장이 덜컥 멎는 것 같았다.

‘허걱! 뜯고 다시 시킨다고? 미친! 어디서 헛소리를…….’

어이가 없어서 웃으려고 하는데, 고기를 먹던 문 소장이 끼어들었다.

“우덜 현장에 대리석 맞춘 거 보셨지라.”

“칼같이 잘 맞더군요.”

문 소장이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었다.

“그거 오차가 1㎜랑께요. 대단허지 않어유?”

‘너! 미친놈이냐? 호텔도 그렇게 안 하겠다!’

“대단하기는 하더군요. 석공들 실력이 좋더군요. 소개 좀 시켜주십시오.”

“석공들 실력도 실력이지만서도, 고거이 성훈 씨가 그렇게 시켰당께요. 흐흐흐.”

‘하는 놈도 그렇지만, 저렇게까지 품질이 나올 정도면 석공들한테 욕을 엄청나게 먹었을 텐데, 진짜로 독한 놈이네. 하하하! 성훈이면 이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화들짝 놀라 버렸다.

“정말, 정말로 성훈 군이 그렇게 시킨 겁니까?”

당사자 성훈은 가만히 있는데, 문 소장이 신이 났다.

“그렇당께요. 이번에 설계도 사 가신 거 있쥬?”

“네, 그게 왜요?”

“젤로 미운 놈으루다가 소장 자리 앉혀 놓으셔유.”

“하하하. 그건 또 왜 그래야 합니까?”

소장 자리가 어떤 자린데, 가장 신뢰하고 제일 밀어주고 싶은 부하직원으로 앉힐 생각이었다.

어설픈 아파트 삼천 세대보다 훨씬 더 명성도 얻고 영양가 있는 자리가 될 텐데.

‘제대로 알고나 얘기해라. 이 양반아!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를 하고 있어.’

“크헤헤. 그 사람 누군지는 몰러도, 지 명대로는 못 살거구만유! 성훈 씨가 맨날 가서 쪼아댈 텡게.”

문 소장은 자기 일 아니라고 큰소리로 웃어젖혔고, 성훈은 조용히 고기를 주워 먹었다.

이때만 해도 곽 이사는 농담이라고 생각했었다.

문 소장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우덜 기숙사 설계자가 성훈 씨구만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제 대학 2학년이라던데!”

“곽 이사님. 참말여라. 한 교수랑 조교랑 성훈 씨랑 고로코롬 세 명이 공동설계자구만유.”

“공동설계자?”

“워떤 사람이 맡을지는 몰러도, 그 현장 소장은 디졌시유. 지 같으믄 사표 던진당께요!”

“아직 성훈 군은 학생인데, 그렇게까지야.”

“웜머! 몰르셨는갑네!”

“뭘 말입니까?”

“여그 현장 말여요. 골조랑 일부 외장 빼고는 전부 성훈 씨가 관리감독 했는디!”

“그게 말이 됩니까? 기사라도 공정관리 정도나 하지, 누가 관리감독을 합니까! 그리고 아직 학생인데!”

곽 이사는 도저히 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문 소장의 말에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문 소장은 억울했던 거 같다.

“김 과장아. 일루 와보쇼잉. 퍼뜩!”

김 과장이 고기를 굽다말고 뛰어 왔다.

“왜요? 소장님!”

“거시기 성훈 씨가 우덜 현장 관리감독 혔냐, 안혔냐?”

“에이! 소장님도 그게 무슨 관리감독입니까?”

김과장의 말에 곽 이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거봐! 이 양반아. 뻥을 치려면 제대로…….’

그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성훈 씨 있는데 이런 말하기는 그런데…….”

“언능 말 안 허냐? 나가 지금 거짓말쟁이가 되게 생겼는디!”

“그게 무슨 관리감독입니까! 참나, 온 현장 직원들을 쥐 잡듯이 잡았죠! 으!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네.”

문 소장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보셨쥬? 지 말이 참말여유? 거짓말여유! 대리석 각이 칼 같은 디는 다 이유가 있당게요. 어여 가서 고기나 묵어!”

곽 이사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럼? 저작권을 양보하지 않는 것도!”

“당연허쥬. 현장 지 맴대로 휘젓고 댕길라고 그런 거랑께요. 그쥬 성훈 씨. 뭐라고 말 좀 해보랑께.”

성훈은 묵묵히 젓가락질을 이어갔다.

“나가 성훈 씨 속셈을 모른당가? 말은 건축의 미래니 발전이니 번지르르허니 포장혀도, 그 속맴은 뻔하당께! 기여, 안기여!”

곽 이사는 어이가 없었다.

‘허! 뭐 이런 인간이?’

문 소장이 잠시라도 오해를 받은 것이 억울한 듯 말했다.

“아무리 독한 사람 갖다 놔도, 하루에 머리가 한 뭉텅이씩 빠질 거랑게요. 두고 보셔유. 나 말이 참말인가 아닌가!”

곽 이사는 성훈에 대해서 크게 오판하고 있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잠깐 직원들을 쥐 잡듯이 잡았다는 말은 곧, 현장을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말이잖아!’

문 소장은 성훈이 현장에 간섭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미처 생각을 못 했다. 폭탄을 제거하러 왔다가, 진짜로 똥폭탄을 안게 생겼네.’

문 소장이 저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곽 이사도 알고 있었다.

사장에게도 큰 소리를 치는 놈인데, 현재건설 소장이라고 별다를 바 있으랴!

‘그렇게 간섭을 해대다가는 내 밑에 있는 소장들 다 죽어 나갈 텐데. 다른 이사들에게 돌려야 하나? 그럼 이 황금 동아줄을 놓치는 건데? 혹시 로열패밀리인데, 자기를 싫어한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 아! 돌아버리겠다.’

사장은 ‘안전모’가 공사에 관여를 한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좋아서 춤을 추시겠지. 오리지널이 직접 하겠다고 나서는데. 숨겨놓은 자식이거나…… 아니야. 섣부른 판단이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만,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었다.

곽 이사가 물었다.

“성훈 군, 진짜로 공사 시작하면…….”

성훈은 젓가락질을 계속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거 참! 공사 시작하면 어련히 알게 되실 걸…… 쩝. 고기나 드시죠. 식겠습니다.”

그 말에 곽 이사의 심장도 차갑게 식었다.

저승사자의 방문을 받은 노인처럼.

‘좆 됐다! 젠장!’

***

사장이 한 번씩 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십 년씩 늙는 것 같았다.

이제 맡게 될 새로운 현장은 안전모가 설계한 현장이었다.

‘사장님께 까이고, 저작권자랍시고 안전모한테 쪼이면…….’

안 그래도 고생 많이 해서 머리 벗겨진 소장들이 남은 머리털 쥐어뜯는 모습이 벌써 눈에 선했다.

‘안 되지. 안 되고말고. 그놈들이 나한테 그렇게 충성을 다했는데,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언제나 눈치로 위기를 피해 온 곽 이사가 아니던가!

그에겐 지금의 위기를 모면할 방법이 필요했다.

옆에서 문 소장과 성훈이 기숙사 현장에서 벌어졌던 무용담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아, 글씨! 짱짱하당께요. 워디 현장의 몰딩허고 비교를 혀도, 우덜 기숙사 주먹장 몰딩보다는 못 헐 것이여!”

“민수 선배네 목수 아저씨들이 성훈 선배님이라면 치를 떠신담다. 하하하.”

곽 이사가 오한이 들린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거 이거. 어설픈 놈 붙였다가는 진짜로 명줄 짧아지겠는걸. 나도 그놈도.’

곽 이사의 날카로운 눈이 문 소장과 성훈이 웃으며 대작하는 광경을 캐치했다.

눈앞에 답이 있었다.

‘저 콤비라면…… 뭐. 명줄이 짧아져도, 문 소장 놈이 짧아지겠지. 훗.’

***

서울로 가는 차안이었다.

“전무님. 곽 이사입니다.”

-오! 곽 이사. 수고했네. 언제 도착하나?

“가는 중입니다.”

-고생했어. 덕분에 걱정을 덜었어.

“그런데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뭔가? 말해보게.

“안전모에 관한 겁니다.”

곽 이사는 운전기사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아닙니다. 가서 말씀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흠. 알겠네. 조심스러운 이야긴가 보구만. 출근하자마자 바로 내 방으로 오게나.

“알겠습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시계가 막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스쳐 가는 밤 풍경을 보며 곽 이사는 생각에 잠겼다.

능력 있는 인재를 가지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일이다.

그러나 통제할 수 없는 뛰어남을 가졌다면, 과연 그것을 품는 것이 옳은 일인가?

로열패밀리인가 아닌가는 결론을 유보하기로 했다.

황 전무를 만나서 물어보면 윤곽을 잡을 수 있으리라.

‘불여우 황 전무! 그 사람만큼 소문에 정통한 사람도 별로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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