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86화
여우와 개(04)
나는 왜 해외로 가지 않고, 굳이 이 한국에서 건설을 하려고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이곳 내 나라, 한국의 건설 현장은 다른 나라의 건설 현장보다 몇 배나 밀도가 높다.
다른 나라에서 10년 배워야 할 현장의 일들을 대한민국 현장에서는 3년도 안 되서 배울 수 있다.
건물이 올라가는 속도가 다르다.
외국 사람들이 와서 보면 기절할 정도로 빨리 올라간다.
골조가 다 올라가고 내장이 붙으면, 한국에서는 미쳤다고 욕을 한다. 시간이 돈이라고!
한국인의 ‘빨리 빨리’는 외국의 ‘빨리’와는 차원이 다름을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굳이 비교하고 싶다면 미국과 한국의 인터넷 속도만 비교해도 알 수 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대한민국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외국에 나가는 것은 한국에서 배울 것을 다 배우고 나가도 늦지 않아.’
내가 한국 기업에 들어가려고 하는 이유는 이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럼 반대로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사님! 저에게 저작권이 없는 경우 말이죠.”
“어디 해보게. 날 납득시키지 못하면…….”
옆에 있던 부하가 급히 최 이사의 팔을 잡았다.
“최 이사님, 여기서 이러시면.”
“알고 있어! 이거 놔!”
그는 광대를 씰룩거리면서 불쾌함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내가 억지를 쓰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최 이사의 인상이 험악해짐에 따라 학과장의 인상도 변해갔다.
‘내가 현재건설이라서 일부러 딴죽을 거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인가?’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았다.
“가정입니다. 저는 건물을 짓고 싶은데,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건설사와 협의하에 공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저작권이 건설사에게 있다고 했을 때, 건설사에서 임의적으로 바꾼다고 한다면, 그래서 건물이 지어졌다고 한다면, 그게 제가 생각했던 설계가 제대로 나온 겁니까? 아닌 겁니까?”
“이보게. 현장에는 현장의 원칙이 있어! 어느 천 년에 그걸 다 원설계자랑 협의하나!”
‘나는 뭐 현장을 몰라서 그러냐고요. 나도 안다고요. 만약의 경우를 말하는 거지.’
“만의 하나지만 건설사에서 모종의 이유로 철골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를 콘크리트 구조로 바꾼다고 해도, 설계자인 저는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는 거잖아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그건 억지라고!”
다시 부하가 최 이사를 말리려 했으나, 먼저 최 이사가 그를 밀쳐냈다.
“그런 일이 얼마나 있다고 그러나? 이건 현재를 못 믿는다는 말밖에 안 돼!”
‘그럼 당신은 우리를 믿을 수 있어서 저작권을 달라는 겁니까?’
억지를 쓰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신하는가? 그런 일이 없다고?
전체 구조는 바꾸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장에서 디테일한 부분이 바뀌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그런 것은 이사급까지 결재가 올라가지도 않는다. 모두 현장 소장의 선에서 결재된다.
왜?
구조적으로 안전에는 아무런 결함이 없기 때문이다.
감리?
대기업에서 그렇게 합시다. 라고 하면 승인하기 바쁘다.
그들이 보기에도 구조적으로 결함이 없으니 말이다.
현장 바쁜데, 이사급까지 결재 올라갈 일이 뭐 있는가? 현장은 시간이 곧 돈이다.
더 많은 경우의 수를 들자면, 하루 24시간을 말해도 모자란다.
그럼 내가 설계한 건물의 저작권을 내가 못 가진단 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내가 설계한 건물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는데, 그걸 설계한 사람이 누군지도 나오지 않는다는 말 아닌가?
배경을 그린 사람의 이름도 나오는데, 그 큰 건물의 설계자는 이름이 안 나온다는 말인가?
수년 동안 공들여 설계를 하고, 몇 년에 걸쳐서 신경 써서 만들었는데, 그 이득을 취하는 이는 건축주뿐이란 말인가?
책도 저작권이 있고, 영화도 저작권이 있는데, 건물이라는 창의적 생산물에 대해서 저작권이 없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다른 부분은 양보를 해도, 저작권은 우리 쪽으로 넘겨주십시오. 그다음에 계약에 대해서 말씀하시죠.”
“이거 봐! 그게 건설업계의 관례야. 관례!”
관례라는 말에는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그가 목소리를 높인 만큼 나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 관례. 그쪽에서나 고수하십시오. 이런 식이면, 저는 안 팔 겁니다.”
내 건물을 만드는 것은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설계를 했다.
설계도대로 되지 않은 건물을 과연 나는 내가 설계한 건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도 나의 말에 화를 내며 되받아쳤다.
“이런 식이라니! 내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쓴다는 건가?”
물건 만든 놈이 안 판다는데, 이야기 끝난 거지. 더 무슨 말을 할까?
“네, 안 팝니다. 그렇게 아시고 돌아가십시오.”
최 이사의 뺨이 씰룩거렸다.
학과장이 최 이사의 팔을 끌었다.
“최 이사님. 잠시 진정하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시죠.”
한 교수가 내 팔을 끌었다.
“성훈아. 잠깐 나가서 기분전환 좀 하고 오자.”
흥분한 채 한 교수와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았다.
***
한 교수가 내게 물었다.
“성훈아. 왜 그렇게 저작권에 집착을 하는 거냐?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냐?”
한 교수의 질문은 당연했으리라.
지금의 내가 저작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이렇게 다툴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리라.
저작권, 가진다고 딱히 이득을 볼 것도, 가지지 않는다고 지금 당장 손해를 볼 것도 없어 보이는데, 당연한 의문이 아닐까?
물론 내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유를 한 교수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그건 이전 삶에서의 일이었으니까.
***
이전 삶에서 두 번째 직장이었던 회사에서 나는 가구 몰딩 디자인을 했었다.
물론 나에게 맡겨진 일은 아니었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몰딩을 디자인했었다.
컴퓨터를 만지는 일에 능했고, 맥스나 캐드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으니 가능했던 일이다.
순전히 운이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면서 만들었던 것이 아니기에, 나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사장이 나를 칭찬했다.
“김 주임, 이거 잘 만들었네. 운이 좋은걸. 회사 이름으로 등록해도 되지? 이건 대리 승진에 보너스 감이야!”
한동안 나를 떠받들며 나의 업적을 칭찬했다.
“김 대리가 우리 회사 일등공신이야! 하하하!”
직원 10명도 되지 않는 작은 회사였지만 나는 마치 뭐라도 된 것처럼 뿌듯해했었다.
그 뒤로 1년 동안 회사의 매출은 급성장을 했다.
내가 디자인한 몰딩으로만 순수익 5억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나는 그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지만.
사장은 연말에 내 덕이라며, 연봉의 반을 넘어가는 1,000만 원이라는 거금을 인센티브라며 건넸다.
월급 150만 원을 받을 때였다. 나는 사장에게 충성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사장은 디자인 전문가라며 외부에서 사람을 불러 디자인을 변경하여 계속 몰딩을 팔아먹었고, 매출은 더더욱 올랐었다.
그 일은 그 몰딩 디자인의 단물이 빠질 때까지 반년 동안 계속되었다.
뭐든지 유행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더 이상 팔리지 않게 되자, 사장은 생산 공장에 지급해야 할 돈을 미루기 시작했고, 직원의 임금도 밀리기 시작했다.
사장은 그동안 모아둔 돈을 가지고 잠적했다.
내게 남은 것?
사장에게 칭찬받았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기숙사 몰딩을 디자인하고, 그것이 거금이 되어 돌아왔을 때, 나는 십여 년 전에 당했었던 그 일이 떠올랐다.
이미 지나간 과거이고, 다시 그 사람을 만나지도 않겠지만, 만약 내가 그 디자인에 대한 권리를 정당하게 주장했었다면, 그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올 각오를 하고, 내 권리를 지켰었다면 내 삶은 어땠을까?
미래를 예단하는 것과 흘러간 과거를 후회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짓은 없다.
나는 이전 삶에서 지금으로 되돌아왔고, 지금의 삶에서는 발생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잊고 지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한동안 분해서 잠도 못 잤었다.
내가 키운 열매를 통째로 빼앗겼다는 분함에 말이다.
운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이 나눠먹자고 주장할 수 있는가?
운 좋게 얻었으니, 다 같이 나눠먹어야 한다고?
‘무슨! 개소리를. 내 운을 너랑 왜 나눠?’
왜 당차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까?
나는 멍청하게도 입 발린 소리에 넘어가서 내 권리를 지키지 못했었다. 나는 아주아주 멍청한 놈이었다.
설계자의 권리, 지적재산권은 보전되어야 한다.
그것이 돈이 되고 안 되고는 남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오로지 자신이 판단할 문제다.
돈이 되니 지킬 가치가 있고, 돈이 안 되면 지킬 가치가 없는 것인가?
미래에 돈이 안 된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그건 취사선택의 권리가 아니다.
창의적 노동에 대한, 당연히 지켜져야 할 지적재산에 대한 권리이다.
최 이사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에 대한 이의를 제기 받아본 적이 없었을 테니!
묵묵히 숨을 가다듬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한 교수가 말했다.
“그래, 말할 수 없는 사연도 있겠지. 하지만 나도 저작권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한 교수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별일은 아닙니다. 그저 저작권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시하는 것 같아서요.”
내 사연을 한 교수에게 말하고, 심적 동의를 구할 수 있을까? 또 구해서 뭐할 것인가?
한 교수는 내 눈을 보며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웃었다.
“훗! 이 건은 성훈이, 네가 알아서 해라. 뭘 선택해도 내 의견과 다르지 않을 테니까. 너라면 올바른 선택을 하리라 믿는다.”
“안 팔리면 어떡하죠?”
“팔려고 만든 것도 아닌데 뭘. 안 팔려도 그만이다. 신경 쓰지 마라.”
한 교수는 나에게 결정권을 넘겨주었다.
수억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림에도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돈에 대한 기본 개념이 다른 건가?’
그는 몇 억의 돈을 푼돈 취급하는 아주 특이한 사람이었다.
“좀 더 앉아 있다가 와라. 괜히 들어가 봐야 좋은 소리 못 들을 테니.”
“그렇겠죠.”
“넌 그냥 집에 들어가라. 내가 이야기해 볼게. 되면 부르고, 안 될 것 같으면 돌려보낼 테니, 그렇게 알아.”
“네, 들어갈게요.”
***
“사장님, 최 이사가 빈손으로 돌아왔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계약이 안 됐어? 왜?”
사장이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돈으로 밀어서 안 되는 게 어디 있다고?
“설계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보장해 달라고 했답니다.”
“지적재산권? 저작권을 말하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여기가 미국이야? 유럽이야? 어떤 놈이 그랬대? 한 교수가?”
한 교수라면 그럴 만했다. 건축을 배운 기반 자체가 미국이니, 그러나 엉뚱한 대답이 나왔다.
“아닙니다. 그놈이 직접 그랬답니다.”
“그놈? 이번에는 또 뭐라고 했는데?”
“그거 보장 안 하면 안 판다고 가라고 했답니다.”
“크하하하. 돌아버리겠네. 그래서 최 이사는 뭐라고 했고.”
“뭐. 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물건 가진 놈이 안 판다고 가라는데. 도처에 적을 만드는군요. 녀석!”
“미친개 정도가 적이나 되겠어? 얼마나 일찍 길들이냐의 문제겠지.”
“하긴.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요.”
“녀석에게 연관이 되면, 쉽게 풀려나가는 게 하나도 없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비서도 이번에는 이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별 무리 없이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장님께서는 왜 그 건물에 집착을 하시는 겁니까? 둘째 사장님 때문이십니까?”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좀 다른 문제지.”
“둘째 사장님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건설 쪽에는 관심이 없으신 게 확실합니다.”
둘째 사장이란, 중공업 사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장이 말했다.
“아니. 아직 아버지께서는 내가 확실히 자리를 잡았는지, 미심쩍어하셔. 국제적 성과는 아직 이르다고 해도, 국내에서 일어나는 이슈에 대해서는 확실히 건설 쪽은 내가 휘어잡았다는 걸 보여 드리고 눈도장을 찍어야지.”
비서도 사장의 마음을 이해했다.
아들의 성장을 보여주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말이다.
좋은 일로 신문에 오르내리고 뉴스를 타게 되면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확실히 이번 일은 주가를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야!’
그런 만큼 완벽하게 성공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걸림돌이 되는 것이 바로 안전모였다.
아군이 되면 그보다 든든한 동료가 없겠지만, 적이 되면 속을 문드러지게 하는 대적이었다.
“이번 일로 확실히 주목을 받고, 성공을 시키시면 왕 회장님께서도 사장님을 달리 보실 겁니다.”
“가능할까?”
“네, 기숙사 건과는 확연한 대조를 이룰 겁니다. 그 설계대로 간다면 울산에서는 최고층 건물이 되겠지요.”
“그렇지. 아버님 눈에 안 뜨이려야, 안 뜨일 수 없겠지.”
사장의 행보는 단지 왕 회장의 눈에만 뜨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한국 건축구조의 변화의 기점이 될 수도 있는 결단이었다.
설계와 시공이 거의 분리되었다 싶을 정도로 기형적인 한국의 건축계였다.
아직도 좀 큰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 그 설계는 많은 부분을 외국 건축가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구조대전에 나온 설계를 현재건설에서 진행을 한다?
이것은 그저 1군 업체가 설계안이 필요해서 사간다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었다.
연례행사처럼 치러지는 구조대전, 혹은 건축대전이었다.
무명 건축가들의 등용문인 것은 확실하지만, 도처의 실력 있는 자들은 생계에 치여서 참가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저 그림에 불과한 설계나 상장 하나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질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그것도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건설사가 설계도를 사간다?
무명 건축가들의 입장에서는 로또나 다름없지 않을까?
물론 그 수준 또한 높아야 할 것이다.
어리바리한 결과물을 돈 주고 사갈 기업체는 없으니까.
이 일이 성사되면, 이 다음에 개최되는 구조대전이나 건축대전의 수준은 전년도에 비해, 확연히 높아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 사건은 대한민국 건축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을 주도한 현재건설 사장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 결과물 또한 주목받지 않을 수 없으리라.
왕 회장은 눈을 부릅뜨고 성패 여부를 지켜볼 것이며, 그 일의 성공 귀추에 따라 후계구도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사장님께 이 일은 황금 같은 기회가 될 게 분명해. 성공시켜야만 해.’
김 비서가 뭔가 결심한 듯 말했다.
“사장님, 전화 한 통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