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84화
여우와 개(02)
일장연설을 끝낸 황 전무가 물을 한 잔 들이켜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것들아. 잘 좀 하자.”
“네, 알겠습니다. 전무님!”
이구동성으로 이사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들을 둘러보며 황 전무가 말했다.
“앉아!”
‘휴, 끝났구나. 오늘은 유난히 길었네. 뭔 일이라도 있는 건가?’
어쨌거나 고비를 넘겼다.
이사들이 넘어진 의자를 세워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황 전무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업무보고 하러 들어가기 전에 살짝 들었는데 말야.”
분명히 오늘의 일장 연설에는 지금 하는 말이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예전 안전모 사건 이후로 이렇게 긴 연설은 처음이었다.
‘사모님한테 이혼서류라도 받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규를 했으니 말이다.
이사들의 귀가 한 곳으로 쏠렸다.
‘무슨 말을 들었길래, 저러는 걸까? 분명히 답이 있을 거야.’
황 전무가 말을 시작했다.
“아까 업무보고 들어가기 직전까지 사장님 기분이 좋으셨다. 그래서 오늘은 무사히 넘어가겠구나 하면서 결재서류를 들고 들어갔지. 내가 간과한 게 하나 있다면, 이 말을 무심코 지나쳤다는 거다.”
성질 급한 최 이사가 물었다.
“그게 뭡니까? 전무님!”
“안! 전! 모! 으득!”
“네? 안전모? 으드득!”
최 이사도 덩달아 이빨을 갈았다.
도처에서 끄응 하는 신음 소리와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그 이름!
안. 전. 모!
황 전무가 말했다.
“다들 기억하지? 사장님께서 안전모 이야기를 하신 뒤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럼요. 생생히 기억하고 있죠. 서 전무님이…… 크흑!”
최 이사는 차마 뒷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알래스카에 계신 그분의 평안을 빌 뿐이었다.
곽 이사도 거들었다.
“어찌 그걸 잊겠습니까? 현장에 한 달 동안 피바람이 불었는데. 저희가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이제 잠잠해 지려는데, 또 그 얘기가 나왔단 말입니까?”
황 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자리가 숙연해 졌다.
곽 이사가 신음하듯 말했다.
“이거 또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 같습니다. 끄응!”
듣기만 해도 한 달 전의 악몽이 생각나는지, 아무도 말이 없었다.
현장의 소장들이 이들의 말을 들었다면 목 잡고 뒤로 쓰러졌을 것이다.
그 피바람을 일으킨 원흉들이 ‘고생이네. 피바람이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흥분하고 있는 최 이사는 안전모를 휘두르며, 소장을 잡았었던 ‘미친개’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차분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곽 이사는 ‘사막의 여우’라 불리며 소장의 쪼인트를 까댔던 인물이었다.
이 둘의 위시한 이사들이 현장을 한 번 들를 때마다 현장 안전 점검과 대대적인 청소가 이루어졌다.
시멘트가루가 날리는 현장이 무공해 청정 지역의 공기와 비슷할 정도로 말이다.
이들의 행보 하나하나에 우리나라 건설 현장의 판도가 바뀌었다.
이 모습을 본 타 건설사들, 태림, 태우, 삼송 등등의 1군 건설사들은 가만히 있었겠는가?
너도 나도 앞다투어 이사들을 현장으로 내보냈다.
현장에서 쓰레기가 굴러다닌다?
안전모를 안 쓰고 다닌다?
그날은 소장의 입에서 곡소리가 절로 나오는 날이었고, 그날 밤은 현장의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
‘절대 청결’을 지키지 못한 현장에서는 날마다 신음 소리가 흘렀다.
건설사 사장들의 내리사랑이 범국민적으로 실현되었다.
안! 전! 모!
그놈 하나 때문에!
최 이사가 물었다.
“그런데 그런 말은 어떻게 들으신 겁니까? 전무님.”
“어떻게 듣긴, 문에다 귀 대고 들었다. 왜?”
“에이. 전무님씩이나 되시면서 아직도 그러십니까? 체통 없이!”
“이것들이!”
전무는 ‘니들은 안 그러냐?’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건만 내리눌렀다.
니들이라는 말에 자신의 상관들도 포함됨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너무 그러지 마라. 부사장님도 아직 그러신다더라.”
“정말입니까? 시베리아의 독사라는 그분이요?”
“허참. 이것들아. 사람 사는 게 다를 거 뭐 있냐?”
최 이사의 말마따나 전무씩이나 되어가지고 문 밖에서 엿듣는 것이 모양 빠지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그날그날의 사장 기분에 따라 보고서의 순서도 바꿔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월급쟁이의 비애였다.
비서들이 보면 부끄럽지 않냐고?
부사장도 그러는데, 고작 전무 따위가 사장의 기분도 모르고 나쁜 소식을 먼저 들이밀었다가는 그날로 다른 부서로 강제이동을 당하는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인사이동이 격변하는 시기에는 떨어지는 민들레 씨앗도 피해가야 하는 법!
전무도 알고 있었다.
여기 있는 이사들도 항상 자신의 방에 들어오기 전에 귀부터 갖다 댄다는 것을.
예외는 없었다.
최 이사가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전무님.”
“무작정 간다고 될 일이 아니야. 가서 어쩌려고.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일단 그 안전모. 으득. 놈이 누군지를 알아야지요.”
“이번 일을 끝내고 나면 정체는 드러날 거야. 그 전에 일을 따오는 게 우선이야.”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최 이사는 왜 이렇게 안전모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황 전무는 알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수만 세대의 아파트를 관리하는 이사진들이 울산을 몇 번이나 다녀왔었다.
고작 3층짜리 기숙사 건물을 보러 말이다.
왔다 갔다는 눈도장을 찍지 않으면 사장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졌었다.
불호령의 정보 시작점은 전라도 사투리를 걸쭉하게 쓰는 그 ‘문 소장’이라는 놈이었다.
몇몇의 이사는 벌써 된서리를 맞았다.
김 비서의 말을 빌어보자면 문 소장은 이렇게 말했었다고 한다.
“글씨유! 그분 얼굴은 뵌 것 같기도헌디, 워낙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계셔서리 얼굴이 잘 기억이 안 나는구만유. 긴가민가허요!”
문 소장의 긴가민가 증언에 제일 먼저 희생된 사람이 ‘미친개’ 최 이사였다.
***
부리나케 울산으로 다시 내려가 문 소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협박했다고 한다.
“이 새끼야. 내 별명이 ‘미친개’야. 한 번 더 엄한 소리하면 네놈이랑 네놈 회사는 끝이야. 알아들어? 어디서 감히 말단 소장 새끼가!”
누가 이겼을까?
다음 날, 사장에게 ‘미친개새끼’ 소리를 한 시간이나 듣고 나서, 최 이사는 최고급 한우세트를 사들고 내려갔다.
“아이고, 문 소장님. 약소합니다. 저번에는 제가 멱살을 잡은 것이 아니고…….”
“흥. 됐구만유. 가셔유! 물리믄 저 디져유!”
자칭 타칭 미친개 최 이사는 문 소장 앞에서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채, 그의 옷깃을 두 손으로 곱게 펴며 말했었다.
“문 소장님, 그날은 제가 미쳐서.”
“됐대니께, 자꾸 이러시네잉. 미친개헌티 물리믄 약도 없다는디. 지는 어차피 말단이라…….”
“말단이라뇨. 어떤 놈이 그런 싸가지 없는 말을…… 소장님.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술값이라도.”
“참말로 거시기허네. 배우신 양반이 왜 이렇게 땡깡을 부리신데? 우덜은 청탁 그런 거 모른대니께.”
그때, 최 이사는 밀어내는 문 소장의 손을 꼭 붙들고, 순간적으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청탁! 이 내가? 이걸 엎어치기로 내다 꽂아버려?’ 하고 갈등하면서.
“청탁이라뇨. 제가 이런 회사에 청탁할 일이 뭐가 있다고……. 헉!”
“그러니께 말여유!”
하며 돌아서는 문 소장의 바짓가랭이를 붙들고 한 시간 동안 싹싹 빌었다고 한다.
집에 계신 노모가 어쩌고저쩌고, 하늘나라에 있는 아버지가 어쩌고저쩌고.
그날 현장에 전체 회식을 해주고 나서야 얼굴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하이고. 참말로. 안 이러셔도 된당께유. 아그들아. 더 먹고자븐 건 �졌�? 뭐시여? 한우 30인 분!”
문 소장이 최 이사를 바라볼 때, 그는 턱을 꾹 다문 채, 미친개마냥 웃고 있었다.
“흐흐흐.”
“아따! 기분이랑께. 먹고자픈 만큼 먹으랑께. 시켜잉!”
‘빌어먹을…… 어쩌다가…….’
최 이사는 먼 훗날, 그날이 자기 인생 최고로 굴욕적인 날이었다고 나중에 회고하게 된다.
문 소장은 이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담에는 이러지 마시고, 저만 만나고 가시믄 된당께요. 번잡시럽게 해드려서 송구하구만이라!”
최 이사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 외에도 한 성질 한다는 이사들은 모두 문 소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감히!
현장에서는 얼굴조차 들지 못할 을 중의 을인 작은 건설회사의 소장에게.
“죄송해서 우째쓰까잉! 지가 머리가 쪼까 나빠서리.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 한당께요.”
그 한마디에 이사들은 서로 얼굴을 들이대며 명함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역시 소장님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 그런지, 온 건물에 광채가 번뜩입니다.”
라는 입 발린 말을 서슴지 않았었다.
이 모든 일이 ‘안전모’라는 인물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
***
최 이사의 심정이야 알고 있었지만, 황 전무는 일을 먼저 생각해야 했다.
‘당한 것이 있으니, 그 성격에 오죽하랴마는…… 쯧쯧’
전무든 이사들이든 비슷한 나이 또래에 전쟁 같은 건설 현장을 함께한 그들이었다.
다른 부하직원들이 있을 때는 서로의 격을 차리지만, 이사들끼리만 있을 때는 달랐다. 동창회 분위기랄까?
물론 그럼에도 분명히 상하의 구분은 확실했으며, 공사의 구분 또한 확실했다.
직장 생활 30년 차가 넘는 베테랑들이 아니던가!
황 전무도 안전모라는 존재에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었다.
사장이 그렇게 분노한 것도 거의 10년 만이었으니…….
그 분노의 직격탄을 받은 이들의 정신적 타격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 이사, 저거 보냈다가는 사고나 칠 것 같은데?’
괜히 미친개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었다.
그의 면모는 그 누구보다 잘 알지 않던가?
주인과 상관에게는 절대적으로 충성하지만, 그 외의 인물들, 부하와 적에 대해서는 관대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물이었다.
최 이사가 말했다.
“전무님! 이 건 제가 맡겠습니다.”
황 전무는 최 이사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이사들에게 물었다.
“누가 갈 거야?”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잘되면 수고했어. 한마디로 듣고 말겠지만, 잘못되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것이다.
이사라는 위치!
창업보다는 수성에 집중해야 할 자리가 아니던가!
공격적으로 충성해 봤자 이제는 올라갈 자리가 한정되어 있었다.
실수 없이 자리만 잘 지켜도 퇴직할 때까지 걱정이 없는 자리인데, 괜히 나서서 사고를 칠 인물을 아무도 없었다.
최 이사가 침묵을 깼다.
‘어떤 놈인지 얼굴이라도 봐야겠어. 으드득! 이거라도 해결하고, 서 전무님께 힘을 실어야지.’
알래스카 출장 중인 서 전무 라인을 타고 있던 최 이사는 그의 부재로 인해 입지가 줄어들었다.
그런 만큼 다른 이사들에 비해, 안전모에 대한 원망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아, 전무님! 제가 간다니까요!”
“가만있어 봐. 다른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
“왜 이렇게 과민반응하시는 겁니까? 그래 봤자 대학교수나 학생 나부랭이 아닙니까? 제가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안전모 하나에서 나온 파급효과에 현재건설 전체가 흔들거렸는데, 이게 과민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최 이사는 오히려 그것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황 전무가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구, 그렇게 대단한 놈이 문 소장한테는 님님하면서 빌빌거렸냐! 이놈아.’
그가 보기에는 ‘안전모’라는 폭탄을 처리하기에는 최 이사는 영 못 미더웠다.
아니, 오히려 폭탄 심지에 불을 붙이지 않을까 몰라!
황 전무의 시선이 ‘사막의 여우’라 불리는 곽 이사를 향했다.
‘저놈은 약아서 잘 처리할 거야.’
“곽 이사, 어때! 이럴 때 공 한번 세워야지. 그 현장은 자네 쪽으로 밀어주지!”
황 전무가 곽 이사에게 딜을 걸었다.
누가 치워도 치워야 하는 폭탄이라면, 그나마 눈치 있는 자가 나서 주는 게 이득 아니던가?
이사들에게 힘이란, 얼마나 많은 현장을 지휘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만큼 지휘 능력을 인정받으니 많은 현장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곽 이사는 생각이 달랐다.
‘전무님! 내가 미쳤습니까? 내 무덤을 내가 파게. 이건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느냐는 거니까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그럴 능력이 되겠습니까? 어디. 그런 일은 화끈한 최 이사가 해야지요. 안 그래? 최 이사.”
최 이사가 비릿하게 웃었다.
‘자식! 드디어 나를 인정하는군.’
“당연하지요. 영업은 화끈하게 해야지요. 맡겨만 주십시오.”
곽 이사가 최 이사를 향해 활짝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잘 가라. 전우야. 퇴직금은 내가 챙겨줄게.’
“최 이사. 역시 터프가이! 자넬 따라 잡을 수가 없어.”
곽 이사는 적극적으로 최 이사를 추천했다.
황 전무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이사들의 어깨가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눈길이 말하고 있었다.
‘전무님,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습니까? 왜 저를…….’
황 전무의 한숨이 커졌다.
“에휴!”
어차피 가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도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
‘그래, 최 이사 말처럼 과민반응인지도 모르지. 니가 가라.’
한 번에 성공을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 인물에 대한 정보는 얻어낼 것이다.
“최 이사! 부탁한다.”
“맡겨만 주십시오. 전무님!”
오랜만에 최 이사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
오랜만에 문 소장과 통화를 했다.
“문 소장님, 요즘도 그분들 자주 오세요?”
-누구? 거시기 이사라는 양반덜?
“네, 요즘도 오시나 해서.”
-그 양반들 와서 한동안 울 아그들 고기 좀 뜯었제. 봉 잡았다고 좋아라했는디! 요새는 도통 뜸허네? 왜 그려요?
“왜는요. 저도 애들 데리고 가서 고기나 뜯을까 해서 그러죠.”
-또 왔으믄 좋겠는디. 우덜 봉들은 언제쯤 올랑가.
문 소장에게 고기 잘 사주고 용돈 두둑이 주는 이사들은 봉이었다.
“또 온다고 하면, 저희도 불러 주세요. 한우나 실컷 먹어보게요. 꼭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