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83화
여우과 개(01)
“김 비서, 저거 봤어?”
사장이 탁자에 놓인 신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봤습니다. 이번 경남구조대전에서 대상을 탄 작품이 반응이 좋더군요.”
“그래? 이미 알고 있었네? 이건 모를 줄 알았는데.”
“건축에 관련된 일이니까요.”
“에이, 모를 거라 생각하고 물었던 건데. 김빠지게.”
사장이 투덜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여비서가 가져온 차를 마시며 사장이 말을 꺼냈다.
“어제 H대 노교수님이 전화를 하셨어.”
“그렇습니까? 그 대전에 특별심사위원으로 초대받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장이 김 비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대체 모르는 게 뭐야?”
“준비가 철저할 따름입니다.”
“좋은 자세야. 어쨌거나 그분 말씀을 듣고 신문을 봤지. 생각보다 멋있던데.”
비서는 들고 있던 파일 철을 뒤적이더니, 사장에게 대상 수상작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 철을 펼쳐보였다.
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이래서 김 비서를 좋아한다니까!”
신문보다 훨씬 잘 나와 있는 사진을 보며 사장이 감탄을 발했다.
“이거 누가 만든 거야? 어떤 미친놈이 모형에다가 크롬 도금할 생각을 했지? 그럼 철로 만들었다는 거네?”
사장의 입장에서는 크롬으로 입힌 모형을 보는 것도 처음이려니와, 어떤 사람이 이런 아이디어를 낸 것인지 궁금했다.
사장의 눈이 김 비서를 향했다. 정확히는 그의 입이겠지만.
이 정도로 준비를 했는데, 그에 대한 정보도 어련히 알아서 준비했을까?
얼마나 준비성이 좋은 김 비서이던가!
김 비서의 얼굴이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찌그러들었다.
그래도 사장의 질문에는 답변을 했다.
“예상하신 것처럼 철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만든 미친 사람은…… 그놈입니다.”
“그놈?”
평소 언행을 조심하는 김 비서의 입에서 나올 단어는 아니었다.
“네, 그놈!”
사장의 입에서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김 비서가 그놈이라 칭할 사람은 사장이 아는 한, 한 사람뿐이었다.
“그놈? 안전모?”
“네, 안전모, 그놈입니다.”
“어째, 그놈은 안 끼어드는 데가 없네. 진짜 그놈 맞아?”
믿기지가 않는지 사장은 재차 물었다.
“네, 확실합니다. 저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교수님께도 확인했습니다.”
“그럼! 어제 노교수님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던 그 팀이 그놈 팀이라고?”
“기숙사 설계도 그놈과 지도교수가 공동 설계했다고 합니다.”
“뭐! 정말이야? 아직 학생이잖아. 2학년이라고 하지 않았어?”
사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비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자신도 이번 건을 조사하면서 속속들이 드러나는 놈의 면모에 얼마나 흥미로웠던가?
“기숙사 전면에 그려져 있던 조감도 사진도 그놈이 직접 그렸다고 합니다.”
사장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거참! 신통방통한 놈일세. 그런데 자네는 그 사실을 왜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야?”
“안 물어보셨습니다.”
“엥? 뭐라고?”
“사장님께서 안 물어보셨습니다.”
“사실은 그놈이라서 말하기 싫었던 거 아니고?”
사장은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내뱉었다.
김 비서와 하루 이틀 사이였던가!
“사장님께서 안 물어보신 것도 사실입니다.”
딱딱하게 기계적으로 말하며, 더 말하기 싫다는 티를 슬쩍 내비치는 김 비서였다.
김 비서의 내키지 않는 대답을 들으며 사장이 피식 웃었다.
차를 마시면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더니 비서에게 물었다.
“안전모 그 녀석. 데리고 와서 뺑뺑이 돌리겠다더니, 준비는 잘돼가?”
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김 비서를 놀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김 비서의 입에서 답이 나왔다.
“네, 순조롭습니다.”
“어떻게?”
“다음 학기 실습할 때, 그 팀 중에 한 명을 요청하겠다고 했습니다. 디자인을 핑계로 말입니다.”
“그래서 어쩌려고?”
“제일 골치 아픈 설계팀에 넣어버릴 겁니다.”
“방법은 있고?”
“인사부장이 제 대학 후배입니다.”
“어허! 사장인 내 앞에서 대놓고 청탁하겠다고 말하는 거야? 지금!”
김 비서의 심술이 어디까지 가는지 볼 심산인지 사장이 놀려댔다.
“청탁 안 합니다.”
“청탁 안 하고 어떻게 하려고.”
사장을 바라보는 김 비서의 얼굴에 얄미운 미소가 어렸다.
“사장님, 놈에게 특혜를 주시고 싶으십니까?”
“엥? 특혜? 왜 녀석에게 특혜를 줘야 하지?”
비서의 물음에 의아해진 사장이 물었다.
‘능력 있는 놈이니 특혜를 주라는 말인가? 김 비서 성격대로라면 특혜를 빼앗아도 시원찮을 판에?’
“특혜를 안 주실 겁니까?”
“당연하지! 누군 주고 누군 안 주고, 그래서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겠어? 난 그 꼴 못 봐!”
비서가 사장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인사부장에게도 그렇게 말할 겁니다. 특혜를 주지 말라고. 그러니 청탁이 아닙니다.”
“특혜를 받을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지. 하지만 그걸로 되겠어? 김 비서 원한은 그 정도가 아닐 텐데?”
그런 사소한 일로 원한까지야 갖겠냐마는, 사장은 놀림이 계속되었다.
비서가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안전모의 고난이 상상이 되는 모양이었다.
“흐흐흐. 절대로! 절대로 특혜를 주지 말라고. 그럼 그 친구가 알아서 이해할 겁니다.”
“호오! 그런 묘수가?”
사장이 손뼉을 짝 쳤다.
특혜를 주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청탁이다.
하지만 특혜를 주지 말라는 것은 청탁에 포함되는 것인가?
사장이 듣기에도 아리송했다.
그럼에도 그 효과는 확실하리라. 촌철살인이 별건가?
김 비서의 세 치 혀로 안전모의 험난한 미래는 결정되었다.
적어도 현재건설 안에서는 말이다.
‘나도 나중에 한번 써먹어 봐야겠군. 하하하. 절대로, 절대로 특혜를 주지 말라고?’
미운 놈 갈구는 방법으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흠. 묘하지만 확실히 청탁은 아니군. 김 비서, 자네! 무서운 사람이었군!”
“거기에 사장님 지시사항이라는 말만 슬쩍 넣어도…… 흐흐.”
김 비서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을 이었다.
“다음 학기에도 부를 겁니다. 그다음 학기에도 계속!”
김 비서의 단호한 의지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장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사람이 한을 품으면 어디까지 무서워질 수 있는지.
어깨를 뒤로 슬쩍 빼며 김 비서에게서 멀어졌다.
“뭐, 그런 건 김 비서가 알아서 하게나!”
사장이 말을 이었다.
“대신 도망가게 하면 그땐 알아서 해!”
“그건 그놈 팔자지. 그걸 제가 어떻게 합니까?”
“허허허. 야! 김 비서!”
사장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헛!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권력의 절대량은 지존과 가까울수록 커지는 법이다.
똑. 똑.
“황 전무입니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황 전무가 탁자 앞에 똑바른 자세로 앉았다.
“업무보고 시작하겠습니다.”
“잠깐!”
황 전무가 흠칫 놀랐다.
사장은 탁자 위의 신문을 황 전무 앞으로 툭 밀었다.
“황 이사, 이거 봤어?”
비서가 사장에게 귓속말을 했다.
“사장님, 황 전무입니다. 서 전무가 알래스카로 가고 나서, 총괄 업무를 대신하면서 승진했습니다.”
“그래? 아차! 미안허이. 내가 깜빡했네. 일이 힘들지는 않고?”
사장의 위로에 황 전무는 황송해질 지경이었다.
“괜찮습니다. 사장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에 열…….”
위로는 위로, 일은 일! 위로의 시간은 극히 짧았다.
사장의 질문이 재차 이어졌다.
“그래서, 황 전무! 이거 봤냐고?”
“네?”
뜬금없는 질문에 황 전무가 어리둥절하다.
‘대가리, 꼬리 다 자르고 말씀을 하시면…… 이럴 때는…….’
황 전무의 눈이 자연히 김 비서에게로 향했다.
김 비서가 입을 뻥끗거렸다.
‘경남구조대전?’
“경남고추대전?”
비서의 인상은 구겨졌고, 사장은 눈치를 챘다.
“에잉! 이 친구들이 지금.”
김 비서와 황 전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고추는 무슨!”
비서가 엄한 벽을 향해 눈을 돌렸다.
“경남구조대전에 이런 게 올라왔는데, 아직도 안 봤어?”
신문 볼 틈도 없이 업무보고를 준비한 황 전무가 알 리가 없었다.
사장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황 전무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젠장. 어제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셔서, 몸조심하라시더니.’
“우리나라 건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관심 없지?”
“저. 그게…… 사장님…….”
“잠자코 들어! 이러니까 우리나라가 맨날 외국 건축가들이 설계해 놓은 거 하청만 받잖아.”
사장의 일장 연설이 이어졌다.
“언제까지 우리 현재가 외국 건설사 하청 노릇만 할 거야? 엉? 고작 하청이나 하려고 이렇게 주구장창 노력하는 거야? 제대로 된 건축가가 하나도 없어! 이래 가지고 무슨 발전이 있고, 비전이 있겠어? 해외 유수건축물들을 우리 손으로 지으면서, 우리 이름으로 설계된 게 몇 개나 있는지는 알아? 왜 우리는 맨날 시다바리만 해야 돼? 자존심 상하지도 않아! 이사라는 인간들이 이 모양인데, 무슨 발전이 있겠어? 에휴!”
10분간 계속된 사장의 질타에 황 전무가 말했다.
꽉 다문 턱에 진지함이 배어 있었다.
“시정하겠습니다, 사장님!”
사장이 숨을 고르고 말했다.
“이거 지어 보고 싶지 않아?”
“네?”
왜 계속 어리바리한 모습만 보이게 되는지, 황 전무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지난번의 사우디 공사 수주를 실패하면서, 사장에게 미운 털 박힌 것이 심대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계속 미운 털 박히다가 서 전무처럼 알래스카로 가는 거 아냐?’
황 전무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알래스카!
생각만 해도 위기감이 몰려들었다.
“딱 봐도 지어 보고 싶은 도전의식을 일으키지 않냐고?”
사장이 보여주는 사진에는 크롬으로 번쩍이는 철골구조의 모형이 있었다.
누구라도 보게 되면,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황 전무가 웃으며 말했다.
사장이 ‘하늘이 노랗다’라고 하면 무조건 동의하는 것이 보신(保身)의 첫 번째 덕목이 아니던가!
“네, 네. 맞습니다. 도전의식이 마구마구 생겨나는군요.”
“만들어 봐!”
“네? 무슨 말씀을…….”
“딱 좋잖아. 위치도 우리 땅이야.”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설계도 가져와서 만들라고. 그 위치에 들어가면, 그 지역 상권은 우리 독점이야. 돈 되는 걸 왜 안 해! 무슨 말인지 몰라?”
“네? 네. 알아들었습니다.”
“책임지고, 이 건물 설계도 받아와. 무슨 수를 쓰든지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서 전무가 좋아하겠군.”
‘알래스카의 서 전무가 거기서 왜 나오지?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
“서 전무 심심할 거야. 서 전무가 자네 1기수 선배였지. 아마?”
“네, 맞습니다.”
“쫄다구 하나 보내 주면, 고맙다고 나한테 절할지도 몰라.”
황 전무 등으로 소름이 쫘악 돋았다.
서 전무는 그의 1년 선배이자 직속사수였다. 직속사수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스승이나 마찬가지다.
처음 건설 회사를 들어왔을 때, 엄청 맞으면서 일을 배웠다.
그래서인지 이사가 된 이후에도 감히 그의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사가 되기까지 그가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제는 안 만났으면 하는 인물 중에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기도 했다.
50살이 넘어서 쪼인트 까여보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된다.
‘서 전무가 없어져서 지금의 자리에 올랐지! 다시 서 전무 밑으로 들어가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서 전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착실하게 국내에서의 기반을 다져야 할 것이다.
자신의 직속사수, 서 전무는 지금 알래스카에서 혼자서 집을 팔고 있다.
한 집 건너 한 집을 가려면 10㎞가 넘는 그곳에서 말이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실패하면……?
직장 생활 30년 만에 대위기가 닥쳤다.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 사장님!”
그의 불타는 의지가 사장에게 전해졌다.
***
“전무님, 업무보고 하겠습니다.”
“잠깐!”
이사들의 앞에 조간신문이 던져졌다.
“이거 봤어?”
“네?”
이사들에겐 답을 줄 김 비서가 없으니, 서로의 눈만 멀뚱거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황 전무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휴…… 이거 봐. 이거 봐!”
점점 올라가는 황 전무의 목소리에 이사들이 바짝 긴장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지. 전체 차렷!”
벌떡 일어나는 통에 중역의자들이 뒤로 나뒹굴었지만 아무도 눈 돌리지 않았다.
황 전무의 일장 연설이 이어졌다.
“건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관심 없지? 눈 돌아간다. 지금? 왜 우리나라가 맨날 남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줄 알아? 그게 다…….”
피를 토하듯 절규하던 황 전무의 연설은 장장 30분이나 이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