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79화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09)
진 교수가 정명호팀의 작품을 보며, 박 교수와 이야기 중이었다.
“역시 돈 들인 보람이 있구만.”
“선배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진 교수와 박 교수, 둘 다 서울 K대 출신으로 10년 전 동문회에서 처음 만났다.
진 교수가 박 교수의 7년 선배로, 박 교수가 현장기사로 일하고 있을 때, 그를 불러와 교수로 앉혔다.
박 교수에게 진 교수의 존재는 하늘같은 선배에다가, 그의 미래를 이끌어줄 든든한 배경이었다.
진 교수의 배려로 교수가 된 지 5년. 든든한 배경 덕에 실력이 출중하지 않아도, 목에 힘을 줄 수 있었다.
“한 교수네는 어떻게 되고 있어?”
“어찌어찌 완성은 했습니다만, 철로 만들었으니 일부분은 벌써 녹이 슬기 시작했답니다.”
박 교수는 그 사건 이후로, 한 교수사무실의 출입금지 인물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심복들을 통해서 정보를 모을 수밖에 없었다.
“쯧쯧. 염탐이나 하라고 보냈더니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죄송합니다. 선배님.”
박 교수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저녁이라서 석고 물을 뒤집어쓰고 가는 모습을 본 사람은 많이 없었지만, 소문이라는 것이 감추려 한다고 퍼지지 않던가!
다음 날, 진 교수에게 불려가서 호되게 욕을 먹었었다.
나이 마흔이나 먹어서 선배에게 손찌검을 당했지만,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한 교수와 그 삼인방에게 이빨을 갈고 있었다.
“대자보 올린 건 어떻게 됐어?”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현명하게 처신한 거지. 쯧쯧. 기회를 줘도 이렇게 말아먹나.”
한심하다는 듯 박 교수를 쳐다봤지만, 박 교수의 머리는 점점 숙여질 뿐이었다.
“그건 넘어가기로 했으니, 잊어버려. 그나저나 이번에 지면 개망신인거 알지.”
“네, 선배님. 이길 수 있습니다.”
“말로만 자신하지 말고, 결과로 보이라고. 거기 들어간 돈이 얼만지나 알아. 연간 연구비의 절반이 들어갔다고.”
“네, 알고 있습니다.”
“좋은 결과를 내면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곤란해.”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중립파 교수들이 무슨 생각인지 한 교수에게 자주 드나들어. 심상치 않아.”
“제깟 것들이 뭘 어쩌겠습니까? 송사리들이 모여 봐야 송사리지요.”
“그렇지 않아. 그럴 리야 없겠지만 하여간 조심해.”
이번에도 실패를 하게 되면, 진 교수에게 향하는 교수들의 신망이 흔들릴 것이다.
그 여파의 시작은 자신이 쫓겨나는 것이 아닐까? 박 교수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 자리에 잘만 붙어 있으면 학과장까지 바라볼 수 있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한 교수와 삼인방에 대한 분노로 박 교수의 눈이 불타올랐다.
“그쪽 모형을 보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래? 뭐라고 하던가?”
“오밀조밀 섬세하게 잘 만들기는 했지만, 우리 것이 더 화려합니다.”
그의 말처럼 눈앞에 있는 30층짜리 주차장은 화려했다.
가용성이 좋은 나무로 만들었지만 도색전문가를 불러서 은색으로 도색했다.
번쩍거리면서 금속처럼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또한 각 층의 펜스들은 일일이 주문 제작하여 붙였다.
1.5m가 넘는 건물의 두 쪽 벽을 개폐식으로 만들어 건물기둥의 골조가 보이게 만들었다.
사람이 주된 하중이 아니라 차량이 올라가는 것이므로, 그 기둥 또한 굵고 힘 있어 보였다.
진 교수가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아름다운 구조물이었다.
“잘 만들었군. 역시 구조는 강해 보여야지! 돈 쓴 보람이 있어.”
진 교수가 기분 좋아 보이자 잽싸게 말을 이었다.
“또한 그 팀에는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방심할 수 없어. 뭔가 대응책을 찾았을 거야. 분명해. 일부러 숨기고 있을 뿐이야.”
“대응책을 찾았다고 해도,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여차하면 보 중간에 기둥이라도 하나씩 박아버리면 끝나는 문제야. 방심하지 마.”
“그런 땜빵 공사가 된다면 저희가 이기는 것이 당연하지요. 흐흐흐.”
처음부터 계획된 것과 나중에 억지로 끼워 넣는 것은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한 교수 성격에 그런 짓은 안 할 겁니다. 예일을 나왔다는 자존심밖에 없는 건방진 놈 아닙니까?”
“그래도 실력이 있으니 저리 버티고 있는 거야.”
“흥. 그까짓 실력! 힘으로 눌러 버리면 될 일입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 저번처럼 실수하면 쫓겨날 줄 알아. 알았어?”
진 교수의 호통에 박 교수가 습관처럼 머리를 감쌌다.
며칠 전에 두터운 구조공학 책으로 맞은 자리가 아려오는 듯했다.
“애들 시켜서 잘하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무사히 구조대전을 마치지 못할 겁니다. 흐흐.”
또 뭔가를 준비해 놓은 것인가?
‘이놈이 날이 갈수록 꼼수만 늘어나네. 이번에 실패하면 잘라야겠어. 나마저도 덤탱이를 쓸 수 있으니.’
진 교수가 몇 년에 걸쳐서 키운 오른팔이지만, 아부와 간계만 잘 부릴 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충성 하나는 철저하기에 아직 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앞길에 방해가 될 소지가 있다면 제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진 교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 교수는 한 교수팀을 골탕 먹일 생각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
구조대전이 열리는 부산.
부산하게 전시물들을 배치하고 있었다.
진 교수가 물었다.
“박 교수, 한 교수팀은 아직인가?”
“아마 시간에 맞춰올 수는 없을 겁니다.”
“하긴 와도 걱정이야. 그 꼴로는 학교 망신이니 말일세.”
“걱정 마십시오, 선배님. 제대로 배치나 할 수 있을지. 흐흐흐.”
“저기 심사위원들이 오는군. 우리 자리로 가세.”
머리가 희끗희끗한 정장 차림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들어왔다.
그 주변으로 여럿의 중년남자가 그를 안내하고 있었다.
“교수님, 부산은 오랜만이시죠?”
“그렇지. 예전에 용두산 공원에 타워 설계할 때 오고는 처음인 것 같은데.”
“후진 양성 하시느라 많이 바쁘실 텐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안내하는 50대 신사가 허리를 꾸벅 숙이는 것으로 보아 사제 관계인 듯했다.
팸플릿의 사진으로 보건데, 그 50대 남성이 구조대전의 주최자이며, 심사위원장이 분명했다.
“에잉, 우리나라 건축은 아직 멀었어. 언제나 미국이나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겠나. 자네들이 분발해야 할 거야.”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 발전하고자 이런 것도 준비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노교수의 등장에 진 교수의 얼굴이 굳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지팡이를 든 사람은 위원장의 소개대로, 서울에 있는 H대학의 교수였다.
건축설계 경력 50년의 거목으로, 한국의 철골구조로 설계된 건축물은 모두 그의 손을 거치고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 분야에서는 단연 독보적 일인자였다.
그런 만큼 다른 구조는 몰라도 철골구조에 대한 애착이 가득하여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맘에 들지 않으면 독설을 퍼붓는 것으로 유명했다.
진 교수도 학생 시절에 구조대전에 참가를 했다가 그에게 신랄하게 비판을 당한 적이 있었다.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지만 그에 대한 기억이 좋을 수가 없었다.
다른 전시작들을 둘러보고, 심사위원들이 진 교수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오, 진 교수. 오랜만이네.”
진 교수의 허리가 꾸벅 숙여졌다.
맘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그보다 한참 연배가 위이며, 건축계의 선배였으니 당연하리라.
“교수님,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진 교수, 울산으로 내려왔다는 소리를 들었네. 실력은 많이 좋아졌나?”
“하하. 아직 교수님에 비하면 멀었지 말입니다.”
“그런 소리를 할 정도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거야.”
진 교수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젠장. 이 늙은이는 무슨 소리를 해도 좋게 대답하는 적이 없어.’
노교수가 빈정거림의 탄성을 토했다.
“오호. 그 대학에서는 두 작품이나 출품을 했어. 꽤나 자신이 있나 보지! 어디 봄세. 그런데 하나는 어디 있나?”
“그게 아직…… 오는 도중에 문제가 생겼나 봅니다. 신경 쓰지 마시지요.”
“쯧쯧. 아직도 이렇게 준비성이 부족해서야.”
노교수의 눈이 은색으로 치장한 주차장 건물로 향했다.
진 교수가 겸손하게 말했다.
“교수님께 보여드리기 부끄러운 작품입니다.”
“알긴 아는구만. 그래도 많이 겸손해졌어.”
진 교수의 이마에 식은땀이 고였다.
노교수의 평이 시작되었다.
“주차장 건물이군. 어라! 울산이네? 울산이 그렇게 발전을 했었나? 30층짜리 주차타워를 세울 정도로?”
진 교수보다 심사위원장의 얼굴이 더 노래졌다.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진 교수님.”
“하하. 그렇습니다.”
“쯧쯧. 사용빈도가 떨어지는 건물은 도시 공해야. 공해! 이게 뭔 짓이야. 시간 버리고, 돈 버리고, 공간 버리고.”
‘구조를 보러 왔으면, 구조 이야기나 하시죠. 예나 지금이나 꼬장꼬장하기는.’
진 교수의 입이 댓 발이나 나왔지만,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의 품평을 듣는 모두가 몇 마디씩 쓴 소리를 듣고 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 교수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며 수군거렸다.
“쯧쯧. 뭔 배짱으로 두 개나 들고 왔대? 노인네 잔소리를 두 배로 듣겠구만.”
“그래도 하나는 안 왔다니 다행이구만. 나는 빨리나 끝났으면 좋겠어.”
심사위원장과 진 교수의 매서운 눈길이 그들을 훑어봤다.
‘다 기억했어! 두고 봐!’라는…….
“흠. 기둥이 아주 튼실해. 뭐로 만들었나?”
“예? 예.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좋은 선택이야. 고작 구조모형 하나 만드는데, 힘들게 철로 만들 필요가 뭐 있겠어. 잘했어.”
정말 잘했다는 말인지, 성의가 부족하다는 말인지 알쏭달쏭한 말로 진 교수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노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앞으로 30층 건물 만들 때, 나무로 쌓아 올리면 되겠네. 좋은 생각이야. 불만 안 나면 뭔 문제가 있겠나?”
‘젠장. 이노무 노인네가.’
진 교수의 얼굴이 화르륵 붉게 달아올랐다.
“뭐. 그래도 준비는 열심히 한 것 같구만. 기둥도 튼실하고. 은색으로 도색을 해서 아주 화려하구만.”
‘그래도 성질은 많이 죽었네. 쌍소리는 안 하는군.’
“자네가 건축주라면 이 건물 짓겠나?”
진 교수가 말문이 막혔다.
“기둥을 저렇게 굵게 할 거냐는 말이지! 돈이 썩을 정도로 남아도나 보지?”
지팡이로 보를 가리키며 물었다.
“보는 또 왜 저렇게 두꺼워? 기둥은 뭐 하러 저리 촘촘하게 박았어? 자네 저기다가 덤프트럭만 주차할 거야? 100대가 올라가도 안 무너지겠군. 그게 아니라면 기둥을 반으로 줄이든지, 보를 반으로 줄여! 돈 낭비야 돈 낭비. 우리나라 자원이 남아도나?”
‘말은 쉽지. 그게 맘대로 됩니까!’
“층고는 또 왜 이렇게 높아? 건물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차가 바람에 날려가겠어! 대단해!”
‘박 교수는 대체 어딜 간 거야?’
박 교수는 저 멀리서 한 교수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놈의 인간이! 저걸 오른팔이라고.’
“진 교수! 자네는 구조가 장난으로 보이나? 구조가 뭔가?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찾는 학문이야! 이런 설계는 초등학생한테 맡겨도 나온다네!”
‘내가 이런 원론적인 지도까지 받아야 하는 거야!’
박 교수가 받아야 할 독설을 온전히 혼자 받아야 했다.
지금 와서 ‘나는 지도교수가 아닙니다’라고 발을 빼기엔 이미 늦었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쌍욕은 안 한다는 것이었다.
진 교수 학생 시절에는 ‘개도 안 물어갈 이런 쓰레기를 무슨 용기로 출품했느냐’며 쌍소리를 들었었다.
그 기억에 한동안 구조라고 하면 헛구역질이 나지 않았던가?
지금은 욕은 안 하는 대신 독설에서 깊이가 느껴졌다.
예전에는 기분만 나빴다면 지금은 뭐랄까 가슴을 푹푹 찌른다고나 할까.
그 트라우마가 오늘 또 재현되려 하고 있었다.
그런 진 교수를 곤경에서 구해준 사람은 심사위원장이었다.
“교수님, 저기 마지막 작품이 도착한 모양입니다. 마저 보셔야지요.”
회장 안으로 몇 명의 사람이 작품을 캐리어에 싣고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노교수는 아직도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여기까지 자신을 초대한 위원장을 봐서 독설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