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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76화 (76/427)

건축의 신 76화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06)

“아! 바쁘다. 바빠.”

한 교수가 눈썹이 휘날리게 뛰어다니고 있다.

“이 녀석아, 내가 논문을 빨리 끝내야 도와줄 거 아니냐?”

“교수님,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겠습니다.”

“매몰찬 녀석. 스승의 배려를 무시하다니.”

우리 중 아무도 한 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한 교수 혼자서 모형 제작에 끼어들기 위해 설레발을 치고 있는 것뿐이었다.

“바쁘다. 열라 바쁘다. 끝이 보이는구나!”

그의 말을 뒤로하고 우리는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등 뒤로 한 교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ㅇㅇ표 에폭시가 제일 좋아. 그걸로 사와야 돼. 꼭! 알았지!”

***

화방에 들르기 위해 교문을 지나치고 있었다.

“형. 교수님께서 기대가 크신 모양인데요.”

“그러게 말임다. 에펠 만들고 나서도 한참 타박을 받았잖슴까. 왜 안 불렀냐고.”

민수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아마 우리 제작 동영상이라도 안 드렸으면 한동안 시달렸을 거예요. 하하.”

“뭐. 집 만드는 건 누구나 좋아하니까. 특히나 한 교수님은 더하시겠지.”

“그런데 한 교수님 쓰시는 논문은 언제 발표하시는 거예요?”

“그거? 이번 서울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 참석할 거고…… 좀 더 보완해서 일본 심포지엄에도 가실 것 같던데?”

“와! 그런 곳을 아무나 갈 수 있슴까?”

“한 교수님이 우리가 보기엔 동네 형 같아도, 미국에선 꽤나 알아주던 사람이야.”

“정말임까?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 말임다.”

사실 한 교수가 교내에서나 찬밥 취급일 뿐, 미국 쪽에서는 저명한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은 데다, 나름 미국 건축계에서도 평판이 좋은 엘리트였다.

“그나저나 이번 일본 심포지엄에서는 한 교수님 담당교수였던 분도 오신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더 논문에 신경 쓰시는 거지. 가르쳐 주신 분과 같은 위치에 서서 발표하는 거니까. 얼굴은 부끄럽게 말아야지 하시던데.”

“아, 그렇구나.”

“왠지 다른 물에서 노는 분 같슴다. 갑자기 멀어지는데 말임다.”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라고.”

“앗! 그럼 대싸부님을 뵐 수 있는 검까? 무슨 말을 하지?”

한 교수의 스승이니, 대싸부가 되는 것인가? 잘도 이어 붙인다. 녀석!

한석은 벌써 유명 건축가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눈빛이 몽롱해졌다.

“한석이. 영어는 잘하냐? 그분이 한국말을 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영어 그까짓 거 금방임다.”

“열심히 해봐.”

“그런데 민수 선배한테는 왜 안 물어 보심까?”

“민수? 얘는 원서로 된 책을 들고 다니는 걸 많이 봤는데?”

“엑. 정말이심까?”

민수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냥. 좀 관심이 있어서. 잘은 못해.”

“헤헤헤. 그럼 그렇지 말임다.”

“이번에 토익 쳤는데, 800밖에 못 받았어.”

나와 한석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끄윽. 토익 800 말임까?”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정도까지 할 줄은…….

부끄럽지만 나는 지극히 실전 영어일 뿐이었다.

토익에서 점수를 잘 받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해봤는데, 대단한 녀석!

***

만드는 것은 준비가 반이다. 그 말은 즐거움도 반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만들까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우리는 재료들을 사서 교수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재료를 늘어놓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교수실은 시장 바닥이 되었다.

그리고 오면서 공업사에 주문해 두었던, H 형강도 받아서 왔다. 딱 1 : 100 스케일로 된 것 말이다.

“야! 진짜 똑같이 만들었네.”

어느새 논문을 집어 던지고, H 형강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장난감을 눈앞에 둔 소년 같았다.

“건드리지 마시죠. 교수님.”

“야, 건드리는 것도 안 되냐?”

“논문 끝내기 전에는 손도 댈 생각하지 마세요.”

전에 한 교수와 약속했다시피 만들 때는 내가 대장이었다.

각자의 포지션은 이미 정해졌다.

에펠탑을 만들면서 호흡을 맞춘 우리가 아니던가.

나는 부동의 감독관, 손재주 좋은 민수는 장인, 시키면 잘하는 한석은 심부름꾼.

“쳇. 왜 저만 심부름꾼임까? 선배님.”

“심부름이라도 잘하면 장인보조로 승격시켜 주지.”

“알겠슴다.”

“어허, 빨리 재료 준비 안 하지?”

“네네, 감독관님. 헉. 한다니까 말임다.”

***

“그건 뭐냐?”

“거푸집 만들 겁니다.”

“무슨 거푸집?”

“똑같이 만든다고 했잖아요. 중공슬래브를 만들려고 하다가, 너무 멋이 없는 거 같아서 와플슬래브로 바꿨어요.”

슬래브란 골조의 바닥을 말하며, 그 종류에는 1방향 슬래브, 2방향 슬래브, 와플, 중공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중공슬래브란, 슬래브 내부가 비어 있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슬래브의 상부는 압축력을 담당하고, 하부는 인장력을 담당하게 된다.

그런 힘의 전달에 있어서 중앙의 부분은 이론적으로는 ‘+’, ‘-’ 해서 ‘0’가 되게 된다.

그 부분을 비워서 콘크리트가 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바닥판 자체의 하중이 가볍게 되어 하중부담을 덜 주면서도 그 하중은 모두 분산하는 구조이다.

와플슬라브는 아래쪽에서 보면 와플처럼 생겼다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용도에 따라서 사용하는 것일 뿐 구조계산만 정확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무래도 밋밋한 바닥보다는 올록볼록하면 멋있잖아요.”

물론 실제로 건물을 짓게 된다면 천정 마감 때문에 보이지 않겠지만, 우리는 거기까지 마감할 생각이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던가!

지금 한석이 낑낑거리면서 거푸집을 만들고 있다. 보다 못한 민수가 거들었다.

나는 뭐하냐고?

바닥 거푸집에 들어갈 철근을 배근하고 있다. 실처럼 가는 철사로 말이다.

‘뭐 그래도 몇 개는 빼야겠지. 너무 많다. 크흑. 욕심이 과했어.’

결국 임의적으로 반 정도만 배근을 하기로 했다. 사람이 모든 것에 완벽할 수는 없지 않나!

***

“성훈아. 내가 도와줄까?”

“필요 없습니다.”

“야!”

“논문이나 마무리 지으시죠.”

민수에게로 타깃을 바꿨다.

“민수야. 이 부분은 말이야.”

“…….”

민수는 말없이 나만 바라볼 뿐이다.

“교수님, 민수가 거치적거린답니다.”

“그러냐. 쩝.”

한 교수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한석이 넌, 거푸집 끝내 놔!”

“네, 소장님!”

녀석이 일어나면 경례를 했다. 귀여운 녀석.

***

성훈이 사라진 지 10분 후.

“한석아. 좀 도와줄까?”

한 교수는 타깃을 만만한 한석으로 바꿨다.

“일 없슴다. 논문이나 마무…… 컥.”

“지금 성훈이하고 똑같이 노냐? 네가 그 녀석 주니어냐?”

한석은 한 교수의 공격에 찍소리도 못 하고,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호랑이가 없으니 여우가 왕이네! 아이고.’

문을 보던 한석이 말했다.

“교수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헤헤.”

“뭔 소리냐? 뭐 도울지나 말해.”

“저기 선배님 오셨슴다.”

“억! 진짜?”

한 교수의 목이 홱 돌아갔다.

성훈이 말했다.

“논문 끝나셨습니까?”

“아니. 아직…….”

***

여전히 한 교수는 우리 작업 현장을 얼쩡거리고 있다.

“민수야. 거기는 말이야…….”

“…….”

한 교수가 민수에게 몇 마디 말을 걸더니 나에게로 말꼬리를 돌렸다.

“성훈아. 거긴…….”

“논문 쓰시죠.”

“다 썼어.”

“퇴고하셔야죠. 논문이 장난입니까?”

“이…… 자식이…….”

어제부터 한 교수는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의 말로는 일주일 고민하던 문제가 순식간에 풀렸단다. 집중의 효과라나 뭐라나 하면서.

“야! 이놈들아. 내가 지도교수야!”

“네, 알고 있습니다.”

“이익…….”

“나. 모형 잘 만들어. 믿어 봐.”

“알고 있습니다. 예일이 보통 대학입니까. 어련하시려고요.”

“이익…… 나 퇴고 거의 끝났다.”

“네, 거의…….”

우리는 시공에만 집중했다. 한석이가 교수에게 잠시 눈을 돌렸지만 내 헛기침에 곧바로 작업에 열중했다.

“교수님은 논문 마무리 지으셔야지 말임다. 흠흠.”

한 교수는 잠시 논문을 쥐고 있다가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여섯 손보다는 여덟 손이 낫지 않겠냐?”

“필요 없습니다. 여섯 손으로도 충분합니다.”

***

여지없이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어이, 한 교수. 잘되고 있나?”

“잘 안 되고 있습니다. 논문 퇴고중입니다. 누구 때문에요.”

“훗. 느긋하구먼! 한 교수는 좋겠어. 믿을 만한 학생들이 있어서.”

한 교수가 우리 쪽을 힐끗 쳐다보며 투정 섞인 소리를 한다.

“저 정도야! 쳇. 애들 장난이죠.”

이제 막 기둥이 자리를 잡고, 보를 순차적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이제 5층 정도를 올라갔으니, 시작한 시간에 비해서 대단한 속도였다.

물론 조립담당은 민수였다.

교수실 구석에서 섬세한 손놀림으로 본드 묻힌 보를 핀셋으로 기둥의 정확한 위치에 부착하고 있었다.

민수는 박 교수가 온 것도 모르고,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석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간신배 같은 놈.”

“어허, 집중 안 하지?”

“선배님, 저 팀은 거의 다 끝났담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끝났는지 아심까?”

눈썹을 으쓱하며 말해보라고 했다.

“사람 불러서요. 자기네 세미나 학생들 몽땅 불러 모아서 며칠 밤을 샜담다. 너무하지 않슴까?”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안타깝게도 한 교수 세미나는 학생들이 없다. 다음 해가 되면 좀 생기려나.

“일단 우리는 우리 일만 하면 돼!”

‘건드리지만 마라. 제발!’

우리 모형을 보던 박 교수가 틱틱거리며 말했다.

“한 교수, 무슨 보가 저렇게 가늘어? 아직 보 문제는 해결 못 한 거야?”

“저야 알 수 있습니까? 당장 논문이 급한데.”

우리에게 들으라는 듯 한 교수의 투덜거림이 심해졌다.

박 교수가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쯧쯧. 예일도 별것 없구만. 하중 하나 제대로 계산 못 하고 말이야.”

잠시 후, 한 무리의 교수가 들어왔다.

“어이구, 한 교수님. 잘되고 있나요?”

학과장과 진 교수, 그 둘의 파벌에 속하지 않은 중립파 교수들이었다.

그들의 양손에는 만두와 햄버거, 음료수가 잔뜩 들려 있었다.

박 교수가 있는 것을 보고, 인상들이 굳었다.

“어! 박 교수도 있었소?”

“왜요. 난 오면 안 됩니까?”

심술이 가득한 얼굴의 박 교수가 기분 나쁘다는 티를 냈다.

하지만 교수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면서 손사래 쳤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냥 있는 줄 몰랐다는 거지. 우린 그냥 애들 배고플까 봐 들른 거요.”

“쳇. 우리 명호한테는 오지도 않으면서.”

“그 팀은 진 교수가 자금 빵빵하게 대 줘서 세미나 애들이랑 매일 회식하는 것 같은데요. 뭘.”

이미 학교 내에서 소문이 다 난 모양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그럼 학교 일 하는데, 사람 불러놓고 굶깁니까?”

무리의 교수 중 하나가 말했다.

“그럼! 그쪽은 학교 일이고, 여기는 뭐 학교 외적 일이오?”

“지금 시비 거는 거요. 뭐요?”

“사실이 그렇지 않소.”

분위기가 험해질 것 같자 한 교수가 끼어들어 말렸다.

“괜찮습니다. 교수님. 우리는 우리대로 하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시죠.”

탁자 위에 음식을 내어놓으며 한 교수가 말했다.

“얘들아. 교수님들이 사오셨다. 좀 먹고 해라.”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들.”

여전히 민수는 모형에 집중하고 있었다.

“민수 선배. 먹고 하시지 말임다.”

“조금만 더 하고. 먼저 드시고 계세요.”

한 교수가 말했다.

“허허. 민수가 집중을 하면, 시간 가는 줄 몰라서요. 남겨놓고 우리끼리 드시지요. 식겠습니다.”

박 교수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했다.

어색해진 그는 하이에나처럼 교수실을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민수가 만드는 모형 앞으로 다가갔다.

“쯧쯧. 저번에 볼 때도 보가 문제인 것 같더니. 아직도 보강이 안 된 모양이네. 이래서 되겠어?”

걱정하는 듯 말하며, 그는 보의 중심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모형의 흔들림에 잠시 시선을 돌린 민수는 그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를 하고는 다시 집중했다.

아마도 인사를 안 해서 그렇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식사 중인 우리도, 시공 중인 민수도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빈정이 상해서 그랬을까?

박 교수는 모형의 가는 보를 손으로 지그시 찍어 눌렀다. 그가 지적했던 그 부분이었다.

우리가 와이어로 보강하려고 했던 곳 말이다.

와이어는 마지막에 보강할 계획이었다.

꾸욱.

그의 손에 가해진 무게를 보가 버틸 수 있겠는가? 한계 하중 이상의 무게를!

소리 없이 보가 휘어졌다.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민수였다.

“엇!”

민수가 박 교수를 봤다. 그의 행동을 보고는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장인의 분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 교수는 메기 같은 입을 벌리며 말했다.

“아이쿠. 이런. 미안해서 어쩌나.”

박 교수의 눈가에는 ‘거 봐. 내가 뭐랬냐? 약하다고 하지 않았냐?’라는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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