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54화
도산 건축 소장(3)
소장과 약속을 하고 사무소를 들렀다.
저번에 왔을 때는 소장에게 모든 신경이 맞춰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신정동 상가건물 2층에 있는 사무실은 출입문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사무실 내부가 훤히 보였다.
‘깔끔하네. 역시 빈틈이 없어 보여.’
한쪽 벽에는 예전에 만들었던 건물들의 모형들이 선반에 얹혀져 있었고, 사이사이에 수작업 투시도가 액자로 표구되어 걸려 있었다.
한눈에 건축사 사무소라는 것을 알도록 심플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각각의 책상을 파티션으로 나누고, 파티션 벽에는 온갖 서류가 핀으로 꽂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전까지 서류 보내주기로 했잖습니까? 지금 시간이 몇 시인 줄 알아요?”
“과장님, 제가 시청에 가기 싫어서 이러는 거 아니잖아요. 사정 좀 봐주세요. 네!”
거래처에 서류를 독촉하는 자와 시청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자, 사무실이 일하는 소리로 북적거렸다.
바쁘게 돌아가는 분위기였다.
사무실을 지나 소장의 방으로 향했다.
소장이 나를 반겼다.
“오, 성훈이. 기다리고 있었어.”
‘언제 봤다고 벌써 말을 놓냐?’
소장은 그러는 게 당연한 듯 의자를 권하며 계약서를 꺼냈다.
보통은 신뢰와 믿음으로 도장을 찍겠지만 나는 그가 내민 계약서의 조항을 모두 읽었다.
“허허, 뭘 다 읽고 그러나. 내가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봐. 자넨 도장만 찍으면 돼!”
‘예전이었다면 당신 얼굴을 보고 덥석 도장을 찍었겠지.’
서류를 주욱 읽어 내려가며 드는 생각은 이거였다.
‘역시나! 처음부터 작정을 했네.’
계약서의 날짜는 오늘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나와 협의를 거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계약서를 읽기만 하고, 소장에게 말을 건넸다.
“소장님, 도면 완성됐습니까?”
“응. 이제 거의 다 됐어. 바로 시작하면 돼. 일찍 시작할수록 더 좋아. 배우는 게 많을 거 아냐!”
‘그건 지극히 당신 입장이고!’
그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바로 시작해야만 된다면 여기다가 추가 조항 넣겠습니다.”
“뭐라고? 추가조항? 달라는 대로 돈 주기로 했잖아.”
소장은 감히 어디서 추가조항을 얘기 하냐는 듯 기분 나쁘다는 티를 여지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쥐어짜는 목소리로 보아 그는 화를 참는 듯했다. 나는 침착함으로 대응했다.
일 얘기 하는데 감정을 섞으면 바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도면 변경 없는 걸로요. 합의 없는 변경 시에는 추가 정산 또는 계약 파기로요!”
내 말에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소장은 결국 언성을 높였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나? 하다 보면 변경될 수도 있는 거지! 자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현상설계는 다 그런 거야.”
‘그런 건 잘 알죠. 시도 때도 없이 바꾸니 하는 말이지.’
“그럼 조건을 바꾸죠. 소장님 조건 다 들어드리는 대신, 상주하는 조건을 빼는 걸로요. 저도 그게 편합니다.”
조건에는 조건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노예 계약을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 사람아. 자네가 아직 젊어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군! 나처럼 이렇게 잘해주는 사람이 흔한 줄 알아?”
‘당신 눈에는 내가 일개 학생으로 보일지 몰라도. 착각하신 겁니다.’
액면가 25살의 나를, 45살의 그는 완전히 애송이 취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몰아붙이면 좋은 결과를 얻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소장님. 저는 좋은 마음으로 왔습니다. 잘해서 저도 소장님도 좋은 결과를 내고 싶구요.”
기분이 상한 그를 달래며 내가 변경된 조건을 제시했다.
“계약일자는 마감 3일 전으로 하시죠. 상주해서 작업하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완전히 납득하지는 않았지만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냈겠지.’
서울의 업체와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빠른 변경이나 결과물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서울 업체와 작업을 할 경우는 돈을 주고도 그들의 상황에 따라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거리가 멀고, 작업의 진행 상황을 확인할 수 없으며, 그쪽에서 식사 중이라 전화라도 받지 않으면 건축사 사무소에서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재제할 방법은 전무했다.
한층 누그러진 소장이 말했다.
그도 겨우 줄이 닿은 투시도 디자이너를 놓치기 싫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흘이면 너무 촉박하지 않겠나?”
“아닙니다. 작업 시간은 충분합니다. 일을 시작하게 되면 밤낮없이 작업을 할 겁니다. 시작하고 나서 중간에 호흡 끊어지면 오히려 더 안 좋습니다.”
소장에게도 어느 정도의 여유를 주었다.
“한 번 정도는 수정할 수 있는 시간도 포함시킨 겁니다.”
“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너무 타이트해 보이네만.”
소장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넉넉하면 분명히 다른 생각이 끼어들 것이다.
‘이것도 괜찮지 않을까? 저것도 좋은 아이디어 같은데.’
결국엔 적용하지도 않을 쓸모없는 생각들이었고, 그것은 나의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다.
수시로 바뀌는 그의 변덕에 맞춰서 춤춰줄 생각이 없었던 것뿐이다.
“차라리 정해진 시간에 집중도를 최고조로 올리는 게, 훨씬 결과물이 좋습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내가 탁탁 잘라 답을 해버리니 소장은 답답한 모양이었다.
소장은 내가 걱정된다는 투로 물었다.
“힘들지 않겠나? 잠 안 자고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한 번에 못 끝내고, 두 번 세 번에 나눠서 하면 오히려 머릿속에 입력된 정보들이 뒤섞여서 엉망이 됩니다.”
그리고 주의사항을 덧붙였다.
“그리고 중간에 도면 변경되는 것도, 한 번 정도로 최소화해 주십시오. 몇 번 정보가 바뀌면 모델링 순서가 꼬이거든요. 그게 반복되면 나중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요.”
나도 사람이다.
아무리 목적이 있어서 하는 거래이고 돈을 받으면서 일을 해주는 거라지만, 했던 일을 모두 무효화시키고, 다시 똑같은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은 시간을 버리는 것에 불과했다.
‘18년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살았던 나다. 시간 낭비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자의든 타의든!’
스탠바이가 끝난 상태로 일사천리로 달려야 최상의 결과를 뽑을 수 있었다.
언제든지 변경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시간을 루즈하게 사용하게 된다.
소장을 설득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3D프로그램이 완벽하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가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했다.
“소장님, 컴퓨터는 만능이 아닙니다.”
“그야. 그렇겠지만서도…….”
“그냥 조그마한 건물 만드는 거면 저도 별로 걱정을 안 하겠지만, 이건 단위가 다릅니다.”
뭐가 다르냐는 듯 그가 미간을 모았다.
“보통 개체수 10,000개가 넘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소장이 잘 안다면 무슨 말이라도 하겠지만 그는 MAX를 몰랐다. 그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이런 대규모 공사를 모델링할 때는 저도 신경이 곤두섭니다. 순서가 약간만 뒤엉켜도 수정하기 어렵거든요.”
소장도 그럴 것이다.
“소장님, 어떤 일을 할 때 중간중간에 매듭을 짓지 않습니까?”
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누가 소장님께 골조 공사 다 끝나고, 인테리어 공사 들어가는데, 골조 고치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미친놈이 어디 있어?”
내가 그를 보며 웃었다.
“네, 이것도 똑같습니다. 앞의 공정 하나가 바뀌면 그 뒤로는 얼마나 변경해야 되는지 상상도 못 해요.”
“그런가?”
“네, 개체수가 많으니 헷갈리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중간중간 매듭을 확실하게 지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중구난방 두서없이 하게 되면 시간 낭비가 됩니다.”
소장이 납득을 했다.
“알겠네. 가급적이면 그런 경우는 최소화해 보지.”
그에게 말했다.
“대신 확실하게 끝내 드리겠습니다. 그건 믿으셔도 됩니다.”
확신에 찬 내 말에 소장이 만족스러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와 조건을 수정한 후,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일어섰다.
“그럼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도면 거의 다 됐는데, 한 번 보고 가지 그러나?”
소장이 슬쩍 내 앞으로 도면을 내밀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사흘이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고 전면 수정되는 것이 도면이고, 마감 전날까지도 변경될 수 있는 것이 현상설계였다.
“아뇨. 완전히 픽스되면 보겠습니다. 지금 본 거랑 나중에 본 게 다르면 저는 더 헷갈리더라고요.”
“쩝. 그럴 수도 있겠지. 그 전에라도 완성되면 연락 주겠네. 괜찮겠지?”
소장은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네, 저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특별한 일이 생길 겁니다.’
시작부터 페이스에 말리면 끝까지 휘둘리게 된다.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음 날부터 ‘지금부터 시작하면 안 되겠냐?’는 소장의 부탁을 가장한 독촉 전화를 받았다.
‘사정이 있어서 안 되겠습니다’라며 친절히 거절을 했다.
공적인 일에 시시콜콜한 개인적인 사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실례가 될 것이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
컴공과에서 컴퓨터를 가지고 왔다.
애초에 컴공과 교수와 그렇게 약속을 했었다.
베를린에서는 한 교수가 그 교수에게 양해를 구해서 CD를 미리 빌려놨던 것이고.
‘나 모르게 준비하느라, 한 교수도 고생이 많았지. 얘기하면 안 해줄까 봐서. 사람 참!’
정희와 함께 그녀의 차로 컴퓨터 2대와 모니터 2개를 옮겼다.
본체는 그녀가, 19인치 모니터는 내가 들었다.
무게가 20㎏은 족히 나갈 것 같았다.
‘LCD 모니터는 언제 나오지? 겁나 무겁네!’
정희는 컴공과 교수와 같이 있던 조교다.
이름이 ‘이정희’였다.
내 조수가 되어 프로그램을 익히기로 했던 그 여자 조교였다.
그녀의 애마 ‘아벨라’에 물건들을 집어넣었다.
3도어 해치백 타입이었다.
차에 컴퓨터를 싣고 조수석에 앉았다.
“희야. 운전은 잘하지?”
“흥. 염려 놓으시죠.”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한 모양이었다.
“그냥. 오빠라고 불러. 선배는 아니니까.”
“흥! 그냥 성훈 씨라고 부르면 되거든요.”
“그러던가?”
‘누가 뭐랬냐? 콩알만 한 게 틱틱거리기는.’
정희는 굉장히 어리게 생겼다.
체구도 작고, 여리여리해서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지금처럼 옅은 화장이라도 하지 않으면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
우리를 위해 책상이 비워져 있었다.
가장 구석진 자리, 보안이 제일 잘되는 곳이었다.
정희가 컴퓨터를 설치하는 사이에 나는 소장과 도면을 검토했다.
그 와중에도 소장은 불평불만을 해댔다.
‘사흘 내내 전화를 했는데, 한 번도 안 들르냐. 어째 사람이 그렇게 매정하냐!’면서.
검토가 끝난 후, 소장에게 말했다.
“소장님, 저는 사흘내로 끝내겠다고 소장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응. 그랬지. 난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되는데. 큼, 자넬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야!”
‘흥. 못 미더워서 중간중간에 계속 체크하면서 닦달을 할 거면서.’
그런 상황을 미연에 막을 방도를 생각해 뒀었다.
“소장님, 이것 좀 봐주시죠?”
“이게 뭔데? 엉? 공정표잖아!”
소장에게 내가 짜온 스케줄 표를 내밀었다.
“네, 투시도 공정표입니다. 이 스케줄대로만 가면 아무 문제 없이 끝납니다.”
잠자는 시간 없이 짜여진 66시간의 공정표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대로만 간다면 문제될 것은 없겠구만. 그런데 이 뒤의 빈 공간은 뭔가?”
비어 있는 여섯 시간에 대한 물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요. 수정이 생길 수도 있고요.”
“흠, 생각보다 꼼꼼하네.”
내 얼굴과 스케줄 표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소장이 말을 이었다.
“이대로만 가면 나도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 그럼 이렇게 가는 걸로 알고 있겠네.”
스스로 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스케줄표를 그에게 내놓는 것은 확인을 시키는 것이었다.
‘나를 믿으라는 확신과 내 스케줄에 함부로 뭔가를 끼워 넣지 말라는 경고!’
이것 외에 당신의 변덕으로 발생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당신이 져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
그리고 ‘나는 이 스케줄대로 갈 거니까, 잘 생각해 보시고 변경하십시오’라는 의미!
눈치 백단 소장이라면 알아들었을 것이다.
믿음이 약한 자에게 아무리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해도 그건 공염불과 다를 바가 없다.
눈으로 확인 가능한 숫자와 그래프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강력한 믿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