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52화
도산 건축 소장(1)
사무실에 들어서니 진표가 물었다.
“성훈아, 네가 우리 현장 조감도 그렸다면서?”
“네.”
“와! 난 감쪽같이 몰랐다. 야, 그런 기술이 있었냐?”
“헤헤헤.”
나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과거 진표와의 첫 인연도 투시도로 이어졌었다.
그때만 해도 나름 새로운 기술이었으니 나를 꽤나 대우해 줬었다.
사실 정신연령으로 따지자면 지금의 내가 훨씬 많아 이런 행동이 어색한 게 마땅하지만 진표 형은 그때도 형이었고, 지금도 형이었다.
“뭐, 이것저것 공부 좀 했었어요. 먹고살아야죠.”
“아우지만 존경스럽다.”
진표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시는 거예요?”
“우리 사무실에서 초등학교 현상설계를 하거든. 거기 네가 좀 도와줬으면 해서.”
“그래요?”
IMF가 지나고 경기가 많이 죽자 경기부양책의 하나였는지는 몰라도 초등학교를 많이 지었다.
실제로 많이 낡기도 했었고, 마침 좋은 기회가 왔으니 일거리를 늘리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울산의 초등학교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많이 지어졌고, 디자인 또한 많이 좋아졌다.
사각의 박스로 지을 것 같으면 뭐하러 현상설계를 하겠는가?
현상설계를 하는데, 누가 사각박스를 들고 등장할 텐가?
당연히 설계의 수준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장이…….”
“네가 뭐 상주감리도 아니고, 고문대리로 와 있는 건데 어때. 그리고 문과…… 아니, 문 소장님이 또 공사는 한칼 하시잖냐?”
그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 문 소장은 일을 잘했다.
말하는 거, 생긴 거는 덜렁덜렁 해도, 일머리를 잘 알았고, 마무리는 자신이 꼭 확인을 하는 타입이었다.
“그런 사람 앞에 놓고 농땡이를 부리다가는 작살이 나겠죠.”
“그래, 소장이 빠꼼인데, 직원들이 대충하겠니? 현장 분위기 많이 바뀌었다. 걱정 안 해도 돼.”
“그럴까요?”
“그럴래? 그럼 우리 소장님한테 말해 놓는다.”
아! 생각났다. 누군지?
도산 건축사 사무소! 말빨 좋은 그 소장!
급히 전화기를 드는 진표의 팔목을 잡았다.
“형. 잠깐만요!”
“응? 왜?”
“일단 계약서부터 쓰고요.”
“그거야 당연한 거지.”
‘당연한 거죠. 금액과 마감일자만 적겠죠. 날 맘대로 부릴 수 있도록!’
도산 소장은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사람을 잘 후려친다는 것이다.
물론 진짜로 친다는 것이 아니라, 말발로 사람을 부린다는 것!
어설프게 계약서를 작성했다가는 사람이 폐인이 되어서 나온다.
물론 돈으로 장난치지는 않지만 일로 사람을 말려 죽인다. 절대로 손해를 안 본다는 것이다.
만약 500만 원을 지급했으면 그 금액 이상 혹은 더블로 사람을 부려 먹었었다.
***
전생에서 소장과 처음 일했을 때가 기억났다.
“성훈 학생, 투시도 좀 할 줄 안다면서.”
“예, 소장님.”
“이번에 우리 사무실에서 초등학교 현상설계에 참가한다네. 같이 일해 봤으면 하는데. 생각 있나?”
그때 내가 좀 머뭇거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현상설계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어린 나를 격려하며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었다.
“현상설계, 그거 막상 해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일도 배우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아.”
“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괜히 폐만 끼칠까 걱정됩니다.”
그는 내가 망설임을 끝내게끔 큰 액수를 불렀었다.
“300만 원 줄게. 우리 한번 멋지게 해보자.”
‘억!’
그 당시 학생에게 300만 원이라는 돈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한 학기 등록금보다도 더 큰 액수였으니까.
눈이 동그래서 쳐다보자 그가 넉넉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었다.
“처음이니까 그래. 자넨 그럴 정도 실력이 있어. 다음에는 좀 더 줄 정도로 실력을 키워봐!”
내 마음을 다독거리며 나를 치켜세워줬다.
계약을 한 다음 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직 현상설계 마감 날이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다.
-설계안이 거의 나왔는데, 한 번 보지 그래. 내용을 알아야 그리기 편하지 않겠어?
“네, 알겠습니다. 소장님!”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고객이었고, 나는 초짜 투시도 디자이너였다.
설계안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이 오갔다.
-어떤 건지 이해했지. 한 번 그려봐. 그래야 뭐가 잘못 되었는지 알 거 아니겠어?
사람들이 퇴근하고, 소장도 퇴근하고, 텅 빈 사무실에서 나 혼자서 열심히 그렸었다. 밤을 새가면서.
그 시절의 나는 순진했었다.
다음 날 아침, 모니터에 모델링한 것들을 뛰워 놓고, 실제 도면과 다른 곳이 없는지 소장과 함께 점검했다.
“역시 잘하네. 믿고 맡긴 보람이 있네.”
칭찬을 받은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소장처럼 경력 있는 사람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이 학생에게 가능한 일이던가?
밤샘의 피곤함이 순식간에 날아갔고, 다시 다른 부분의 작업에 몰두했다.
다음 날 오후.
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한 옥타브가 높았다.
“야! 이거 꼭 변경해야 되는 거야?”
“네, 설계규준에 맞추려면 꼭 해야 되는 겁니다. 소장님.”
진표의 주눅 든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나를 찾아내서 이 일을 하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당시 진표에게 호감이 있었다.
“미친놈아! 그 중요한 걸 지금 말하면 어떻게 해? 네가 가서 말해, 병신 새끼야.”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진표가 내게 와서 말했다.
“성훈아, 이거하고 이거 좀 변경됐는데, 수정 가능하겠냐?”
사실 짜증이 났다.
일 중에 가장 하기 싫은 것은 한 번 했던 일을 또 하는 거다.
기껏 만들어 놓은 것을 변경한다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지만, 이제는 모델링 하는 개체수가 많아져서 내가 만들면서도 헷갈리는 지경이었다.
잠시만 정신을 놓으면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니.
‘아씨, 피곤해 죽겠네. 이틀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 부탁을 하는데, 마냥 거절을 할 수가 없어서 그러겠다고 했었다.
작업이 길어지자 도저히 피곤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흘 동안 잠잔 거라고는 책상에 엎드려서 잠깐 쪽잠 잔 것밖에 없었다.
“소장님, 저 잠 좀 자고 올게요. 도저히 안 되겠어요.”
소장은 내 말에 인상을 썼지만 나의 피폐한 모습을 보고는 그도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 미안하다. 그래도 어쩌냐? 일인데 끝내야지. 조금만 더 고생하자.”
그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했었다.
그의 격려를 받으며 나는 집으로 돌아갔고, 잠시나마 단잠을 잘 수가 있었다.
곤히 잠들었던 나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다급한 목소리에 제대로 씻지도 못 하고 사무실로 갔더니 분위기가 험악했다.
자리로 가는 동안 소장의 매서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진표에게 슬며시 다가가서 물었다.
“서 대리님. 사무실 분위기 왜 이래요? 누가 사고 쳤어요?”
그때 진표의 원망스러운 눈빛이란…….
나에게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아?”
‘그럼 사흘 밤새우고, 멀쩡한 사람이 어디 있겠냐?’
한마디 받아치고 싶었지만 워낙 살벌한 분위기라 아무 말 못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 뒤의 일들은 지금까지 한 일들의 연장이었다.
열심히 투시도 모델링을 한다. 그리고 소장에게 혹은 진표에게 보여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또 무언가를 핑계로 설계 변경이 이뤄진다.
그 이유 또한 명확하다.
사실 건축을 정확히 모르는 학생의 입장에서 명확하다고 생각할 뿐이었지만.
설계의 규정이 그렇다. 라고 하면 그런 것이다.
‘그럼! 처음부터 제대로 할 것이지. 사람 골탕 먹이듯이 이게 뭐냐!’
항의를 할 법하지만 현상설계란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매번 새로운 발주처에서 다른 요구사항을 들고 나와서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이런 건물을 원하고, 이런 조건이 있으니까, 이 기준에 맞는 것을 만들어 오시오!”
관청이 원하는 바가 다르고, 공장이 원하는 건물도 다르고, 사옥, 학교 등등.
동일한 기준을 가진 현상설계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때부터 거금이 걸린 레이스가 시작되고, 건축설계 사무소들의 경합에 불이 붙는다.
소장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었다.
직원들에게는 폭언을 일삼지만 나에게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성훈아, 현상설계가 원래 이렇게 힘든 거야.”
‘밤새우는 게? 아니면 매번 수정 작업을 하는 게?’
욱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내 느낌엔 나에게만 그런 것 같았다.
사무소의 직원들도 오늘부터 밤을 새우며 작업을 하고 있다.
이제 마감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밤을 낮처럼 사용하며 토론에 열을 올리고, 도면 변경하는 키보드 소리가 요란하다.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일을 하고 있었다.
‘젠장. 난 이걸 닷새 전부터 하고 있었다고!’
지금 내 옆에는 간이침대가 놓여져 있다.
피곤할 때는 언제나 누워 자라는 소장의 ‘작은 배려’였다.
물론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진표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면 그가 하는 말은 항상 한가지였다.
“성훈아. 진짜 진짜 미안한데…….”
‘진짜 진짜 미안하면 한 시간이라도 제대로 자게 해주든가요! 제대로 한숨을 못 자게 하네. 젠장.’
“왜요. 또 뭔데요?”
짜증을 꾹 누르면서 말하면 그는 매번 같은 말을 했다.
“이거 좀 수정하자. 좀 있다가 소장님 들어올 때까지 해 놓으란다.”
‘아오! 씨발. 진짜.’
욕이 절로 나왔다.
밥 먹으러 나가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났다.
내 밥은 항상 도시락이었다.
자기네들 식사하면서 내 거라고 챙겨온 도시락!
사무실 식구들의 배려였다. 배곯으면서 일하지는 말라는.
배려가 지나치면 감금이 된다. 사람을 말려 죽인다.
화장실 갈 때도 은연중에 눈치를 봐야만 했다.
‘왜! 아예 요강이라도 갖다놓지! 씨발!’
난 항상 책상에 붙어서 투시도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도산 소장은 나를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내가 무슨 기계도 아니고! 나는 잠도 안 잡니까?”
정말 이렇게 말하기 직전까지.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건드리기만 해 봐라. 돈이고 뭐고. 컴퓨터 때려 부숴 버린다. 다 때려칠란다!’
이 생각밖에 없었다.
인상을 빡 쓰고 일하고 있을 때, 소장이 정말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했었다.
“성훈아, 조금만 더 참자. 이거 당선되면, 내가 100만 원 더 줄게. 네가 고생한 거 뻔히 아는데 내가 그냥 넘어갈 사람이냐? 응. 조금만 더 참자.”
생각해 보라.
이틀만 더 고생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면 100만 원을 더 받는데!
없는 힘이라도 짜내야 될 타이밍이 아닌가?
그렇게 남은 이틀 동안, 나는 기계처럼 투시도를 뽑아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면 하라는 대로.
사실 저항할 의지도 없었다.
그냥 빨리 끝내고 잠을 자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를 하얗게 불태웠을 때는 이미 패널 작업이 끝나 있었고, 소장과 진표는 그 파일을 들고 인쇄소를 향해 달렸다.
그 뒤의 기억이 나는 없다. 완전히 필름이 끊어졌으니까.
결과만 말하자면 도산 소장은 자신의 임무를 충분히 해냈다.
당당하게 당선을 거머쥐었고, 나에게도 100만 원의 상여금을 포함한 400만 원을 건넸다.
그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고, 사람의 마음을 적절하게 잘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현상설계 당선상금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금액임이 분명하지만, 내게는 아주 큰돈이었다.
그 시절 나는 그 일을 하면서 학생 신분으로 돈을 좀 벌었었다.
물론 지금과는 달리 3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며, 일 년마다 약 대여섯 건 정도의 현상설계를 했었다.
그리고 나는 년 삼천 정도의 돈을 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으로 생각했었고, 돈을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부모님이 진 빚은 부모님이 갚는 것이었고, 나는 내가 벌어서 쓴다고 생각하는 아주 나쁜 놈이었다.
그리고 소장이 어떤 사람인지는 나중에 알았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 진표와 술 한잔하면서 물었었다.
지나간 일들은 추억거리가 될 뿐이니까.
“형. 일 좀 제대로 하시죠. 형 때문에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그땐 형이 미워 죽는 줄 알았어요. 하하.”
“아, 그거. 많이 섭섭했지? 사실은 소장님이 시킨 거야.”
“네? 왜요?”
“이제 우리 일 안 하니까 말하는 거지만. 다 소장님이 시킨 거다. 설계 변경한 것들.”
“형이 잘못한 거 아니에요? 그럼 그때, 변경 안 해도 됐었던 거네요.
“그래, 몇 차례 변경했다가 다시 원안대로 돌아갔었잖아. 사실 변경할 필요도 없었던 거지. 우린들 그렇게 하고 싶었겠냐?”
일이 늘어나는 것을 좋아하는 직원들은 없으니까.
“네, 내 말이 그 말이에요. 그냥 처음 안으로 갈 걸 뭐하러 그렇게 사람을 고생시켰는지?”
“저러다가 애 과로사하겠다고 말려도, 소장이 말을 들어야 말이지. 우리가 무슨 힘 있냐? 말단 직원이?”
“왜 그랬대요?”
“모르지. 돈이 아까웠던 건지, 이왕 돈은 주기로 약속했으니 본전이나 다 빼먹자. 뭐 이런 거?”
“그런데 왜 맨날 형이 와서 이야기한 거예요?”
“소장 자기는 나쁜 사람 되기 싫으니까. 자기 직원 아닌 사람들한테는 욕도 안 한다. 그 인간!”
“하지만 그때 형 엄청 욕먹었었잖아요.”
“너 보라고 일부러 갈구는 척했던 거지. 물론 나도 기분은 나빴지만 어쩌겠냐?”
“왜 하필 형한테만 그랬는데요?”
“난 너랑 좀 친하니까, 내가 힘들어진다 싶으면 니가 웬만하면 참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고.”
돌이켜 보니 듣기 좋은 말은 항상 소장이 했었다. 당선되면 돈을 더 주겠다는 말도 그랬고.
그리고 어려운 부탁은 항상 진표가 맡았었다.
나는 진표가 좋은 사람이란 것을 알기에 그의 부탁이 힘들어도 참았던 건데, 그게 사실은 소장의 작전이었다니.
‘나한테 주는 돈이 그렇게 아까웠냐! 그래서 일부러 고생시킨 거고?’
현상설계 건으로 계약을 했었으니, 그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투시도를 만들어 주는 것이 맞다.
그리고 더 좋은 결과물을 위해 노력하는 소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딱히 시시비비를 가릴 것은 아니지만, 심정적으로 골수를 빼 먹힌 느낌이랄까?
사람이 지쳐 나가떨어지기 직전까지 일로 몰아붙이는 것이 과연 옳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형도 참 고생이 많겠네요. 얼른 벗어 나셔야죠?”
“글쎄다. 내 이름으로 건축사무소 차리기 전까지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건축사 시험에는 경력 조건이 필요하다.
그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 진표는 자신의 ‘열정페이’를 지불하고 있었다.
지독시리 짠 월급에 열악한 근무조건, 소장의 폭언!
그것을 견디는 단 하나의 이유는 자신이 직접 건축사사무소를 열기 위해서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풍운의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왔을 때,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큰 서울 땅에 얼마나 많은 경쟁자가 있었던지.
피 말리며 고군분투를 하는 사이, 일 년이 지났다.
울산으로 내려갈까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다른 투시도 업체들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내 첫 번째 사업은 용두사미로 마감되었다.
그리고 나는 가구회사에 취직을 했었다.
투시도 일은 엄밀히 말하면 건축 설계가 아니다.
그저 설계안을 눈으로 보기 편하게 영상으로 구현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 시절에는 이것을 업으로 삼으려 했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내가 지나왔던 길이기에,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자부심 또한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현실과 그 대우는 조금 다르다.
스스로 주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내는 것뿐이다.
설계자의 시간을 단축시켜 주는 많은 손 중의 하나였고, 그나마도 그 손을 대체하려는 자는 많았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많은 사람이 뛰어들어 각축을 벌일 작은 파이일 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축의 길과는 거리가 먼…….
지금 나는 그 소장을 만나러 간다.
전생의 나와는 조금 달라진 상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