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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47화 (47/427)

건축의 신 47화

일인 필립(2)

‘…….’

내 귀염둥이 예진이는 어디 있을까?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왜 난 한 번도 그 아이를 떠올리지 않았던 걸까?

고작 내게 그 정도였던가? 그렇게 사랑했었는데…….

내 생각의 ‘일시정지’에도, 필립은 딸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자네도 딸을 낳으면 알게 될 거야.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그렇죠. 딸 귀엽죠.”

지금 누가 내 얼굴을 본다면.

이렇게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본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나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울고 있었다.

코끝은 쓰릴 정도로 찡했고, 눈 아래쪽 눈물샘이 아파왔다.

그리고…… 내 얼굴은 필립을 보며 웃고 있었다.

“흐읍”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내가 감정에 빠져 있을 타이밍은 아니었다.

‘나는 일을 하러 왔다.’

마음을 다잡으며 필립에게 물었다.

“이제 따님도 나이가 좀 있으시겠는데요?”

부인의 얼굴이 발개졌다.

‘왜? 내가 뭘 잘못 말한 건가?’

“허허, 늦도록 아이가 없다가 이 사람 나이 마흔 다섯이 넘어서야 겨우 비키를 만났다네.”

“그럼 지금 나이가…….”

끼익-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품에는 제 덩치만 한 곰 인형을 껴안고 있었다.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황금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찰랑거렸다.

설거지를 마친 부인이 꼬마에게 다가가 팔을 벌렸다.

“어머, 비키! 벌써 일어났니? 좀 더 자지.”

“콜록. 아냐. 엄마. 다 잤어. 밥…….”

꼬마아이는 작은 손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했다. 몸이 많이 약한 것처럼 보였다.

한여름이 지났다고 해도, 아직 감기가 걸릴 기후는 아니었다.

그리고 꼬마는 낯선 손님을 발견했다.

화들짝 놀란 아이가 엄마 뒤로 숨었다. 곰인형 뒤로 숨어버렸다.

부인이 여자아이에게 말했다.

“비키, 아빠 손님인데, 인사해야지.”

비키가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콜록, 안녕하세요.”

금발머리, 순백의 새하얀 피부, 그리고 울긋불긋한 홍조.

필립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토피라네.”

그의 말 한마디로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내 딸이 말했다. 아니, 내가 물었다.

“예진 공주는 아빠가 좋아?”

“응.”

“왜 좋은데?”

“아빠랑 있으면 재밌어. 그래서 목이 가려워도 참을 수 있어.”

아토피 때문에 천식이 심했던 예진이는 내 옆에서 자는 것을 좋아했다.

항상…….

그날 밤, 나는 내 딸, 예진이를 재워주지 못했다.

***

“비키가 많이 힘들겠네요.”

“많이 나아진 거라네. 이제 여름이 끝나가는 마당이니.”

“그렇죠. 여름에는 더 심해지죠. 많이 간지러웠을 텐데.”

열을 발산하는 아토피는 여름이 되면 더 간지러워지고, 심한 경우에는 불면증에 걸리기도 한다.

“허, 저래 뵈도 잘 참고 있다네. 그나마 이 나무들 덕이지.”

“나무라뇨?”

그가 손을 들어 사방을 가리켰다.

필립이 말했다.

“가문비나무라네.”

“네?”

“우리 집에 붙어 있는 이것들이, 모두 가문비나무라네.”

“아…… 가문비나무요.”

가문비나무로 짜여진 천정을, 가문비 마루를, 가문비 벽을.

필립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비키를 향해 팔을 벌렸다.

“우리 공주님. 이리 오시오. 허허허.”

비키는 웃음을 짓는 필립에게 수줍은 듯 다가가더니 이내 뛰어들 듯이 안겨들었다.

“어이쿠, 쪽!”

꺼끌꺼끌한 수염에도 비키는 싫어하지 않았다.

간지럽다면 도리도리를 칠 뿐이다. 귀엽게 웃으면서.

이내 그 품에 안겨서 다람쥐처럼 몸을 돌돌 말고는 나를 살며시 훔쳐본다.

그녀의 얼굴이 말했다.

‘이 사람은 내 아빠야. 여기가 내 자리야.’

‘왜 저 얼굴에서 나는 예진이가 떠오르는 걸까.’

갓 태어났을 때의 쪼글한 얼굴과 몸, 그리고 상기된 피부.

조금 더 커서 통통한 팔다리로 바둥거릴 때.

‘아장아장. 귀여웠지.’

걸어 다니며 세상의 궁금증 모두를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첫 번째 소원을 말했었다.

“난 아빠랑 결혼할 거야.”

난 대답을 해주었다.

“아빠도 예진이랑 결혼할 거야.”

목욕을 시키면서 온몸의 울긋불긋 돋아난 홍조를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고, 먹여 보고, 입혀 봤었다.

그 아이의 아토피성 천식이 나로 인해 유전된 거라면 예진이의 천형은 내 잘못이었다.

나도 아토피였으니까.

1㎏에 몇만 원하는 알로에를 아무리 사재기하고, 수십, 수백만 원짜리 원목 가구를 사도 모자랐다.

내 잘못이었으니까!

‘지금쯤 비키와 나이가 같아졌겠네.’

내 가슴이 찢어지듯 아려왔다.

필립이 배웅하면서 말했다.

“성훈, 자네는 아직 애가 없어서 내 맘을 모르겠지만.”

그의 심정은 이해했다. 그러나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자네가 부모가 되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왜 이렇게 고집을 세우는지.”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누고 헤어졌다.

된다, 안 된다는 확답도 줄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확답은 못 드립니다만.”

내가 아는 지식을 가지고,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다.

아토피에 효과가 있다고 하는 방법들을 모두 찾아봤다.

1998년에만 해도 아토피는 그렇게 대중적이지 않은 질병이었다.

아니, 원인과 병명조차도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았다.

그 병이 대중적으로 알려지면서, 수많은 ‘카더라’ 하는 말이 나왔었다.

개중에는 효과가 있는 것들도 있었고, 그저 물건을 팔아먹기 위한 상술도 있었다.

아토피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염증이라고 한다.

의사가 내게 말했었다.

“성훈 씨는 아토피니까, 술, 담배 하시지 마세요.”

정말 아토피가 확실히 낫는다는 보장이 있다면, 끊을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의사에게 물었다.

“술, 담배 안 하면 아토피 낫는 겁니까?”

“아뇨. 좀 완화됩니다.”

“그럼 증상을 많이 완화시키려면 어떤 걸 하면 됩니까?”

의사가 말했다.

“일단 술, 담배 끊으시고, 밀가루 음식 드시지 마시고, 기름진 고기 드시지 마세요.”

“그거면 됩니까?”

“뜨거운 물에 샤워하지 마시고, 옷은 면으로 된 것만 입으시고, 먼지 많은 곳에 가지 마세요.”

그때, 나는 특판 가구 회사에서 현장관리를 하고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 수입 가구로 옮기기 전의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그렇게 하면 나을 수 있습니까?”

“장담은 못 합니다. 좀 완화될 겁니다.”

의사에게 다시 물었다.

“집에다가 분재 같은 거 키우면 좀 좋아진다던데, 도움이 됩니까?”

“성훈 씨는 집에서 안 나오고 살 수 있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아토피 낫기를 포기했었다. 그냥 그렇게 살기로 했다.

그 순간, 나는 결론을 내렸다.

‘아토피는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다.’

나는 의사가 아니라서 알 수 없고, 설명을 해준다고 해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그 증상만은 뚜렷한 것. 그것을 아토피라고 들었다.

그 뒤로 나는 증상이 심해지기 전에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스테로이드 주사.

장점은 확실히 증상을 완화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삶에서는 몸이 가려워진다 싶으면 병원을 꼭 같었다.

그것만으로도 내 생활은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다만 어린 아이에게 그것을 맞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

며칠 후 필립을 다시 만났다.

그에게 병 하나를 건넸다. 편백나무 수액이 들어 있는 병이었다.

“응? 이건 뭐야. 성훈?”

“편백나무 수액이에요. 비키 목욕할 때 한 방울씩 넣어서 써보세요.”

아는 사람이라도 미심쩍을 것이다. 그것도 딸에 관련된 일이라면.

“많이 넣으실 필요는 없고, 한두 방울씩 만요.”

“흠…….”

무뚝뚝한 표정의 필립이 병을 주머니에 넣었다.

돌아서며 네게 말했다.

“고맙네.”

일주일 후.

필립의 전화를 받았다.

-성훈, 저번에 준 그거 수액이라고 했지? 병에 든 그거 말야.

‘효과가 있었던 건가?’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었으면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건넸던 거다.

“효과가 있던 가요?”

-응. 아주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이름이 뭐라고 했지?

“편백나무 수액이에요.”

-오, 그래? 어디서 구하는 건데.

다급한 목소리에서 그의 감정이 전해졌다.

“그 건으로 할 말이 있어요. 좀 만나요.”

내 주변의 전라도 출신은 그때 만난 시공사 과장뿐이었다.

그에게 전화를 했다.

“과장님, 저 김성훈입니다. 전라도 장성 잘 아세요?”

-아이고, 거긴 왜요? 내 고향인디?

“편백나무 있는 곳을 좀 가 봤으면 하는데. 장성에 유명하잖아요.”

-그라죠. 편백하면 장성. 장성하면 편백이지라.

“그 나무를 구하려고 하는데, 구할 수 있나요?”

-아, 편백나무? 제가 구해드릴 텡게 걱정마시오.

그는 큰 소리를 뻥뻥 쳐댔다. 다행히 근거는 있었다.

-우리 사춘 형이 쬐만한 산을 갖구 있지라. 거그다가 편백나무를 키운당께요. 한번 갑시다. 맘에 드는 놈으로다 잘라오면 되니께!

“그럼 우리 자재로 쓸 수 있어요?”

-그람요. 그만큼 나무 덜 구입하면 되는 건디. 울 성님헌티 술 한잔 얻어먹을 껀수가 생겼고만. 크크.

‘복잡하게 꼬일 일이 쉽게 해결되었네.’

***

필립은 부인과 비키를 데리고 나왔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한결 더 얼굴이 밝아 보였고, 기침도 덜 했다.

내게 쪼르르 뛰어와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성훈!”

그리고 바로 말을 잇는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엄마 곁으로 뛰어갔다.

‘한 번 안아보고 싶었는데.’

“가시죠. 과장님이 안내하실 거예요.”

과장의 인솔을 받아 편백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숲에 청량한 향만이 가득 차 있었다.

필립이 비키의 손을 잡고 걸었다.

“비키, 어때? 기분이 좋아졌어?”

“응. 아빠. 훨씬 숨 쉬기 좋고, 가려움도 덜해요.”

바로 나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병이 아니니까.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줄 아는 아이였다.

‘기특한 아이구나.’

필립에게 말했다.

“저번에 말씀하신 독일의 가문비나무는 구하기 어려워요.”

그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구한다고 해도, 공사가 끝날 때까지 들여온다고는 장담할 수 없어요.”

“그렇겠지.”

“대신 여기 있는 편백나무로 대신하면 어떨까 해요? 독일산 가문비나무만큼은 못 하겠지만.”

그가 오솔길에서 엄마와 놀고 있는 비키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닐세. 됐네. 이걸로 충분하네.”

“미안해요. 원했던 걸로 해주지 못해서.”

“고맙네. 자네는 최선을 다했고, 나는 만족을 했어. 이거면 됐어.”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필립.”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길게 하신대요?”

저 멀리서 사촌형이라는 사람과 얘기하던 과장이 우리를 불렀다.

“지금 수액 뽑는 중이라는디, 한 번 보실라우. 볼라믄 언능 오셔.”

필립과 이야기를 끝내고 그곳으로 향했다.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언제 데리고 왔는지 부인과 비키는 벌써 와 있었다.

나무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수액을 보며 신기한지 웃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파인 보조개. 너무 귀여웠다.

비키를 처음 만나고 왔던 날.

밤새도록 울었다. 나는 전생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했었고, 그 인생이 가치 없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의 생으로 되돌아온 이 후, 전생에 대해서 생각했던 적이 없다.

단지 내가 필요한 돈에 관련된 부분. 그리고 미래에의 이득이 될 무언가만 생각했었다.

비키를 만나고 온 날.

다시 생각했었다.

정말 지난 삶에서의 내 인생은 무가치했던가?

전혀 기억할 만한 것은 없었던가?

내 삶은 정말 올바른 것인가?

진정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인가?

아직은 나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지금은 단지 예진이가 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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