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축의 신-46화 (46/427)

건축의 신 46화

일인 필립 (01)

오전에는 설계 수업이 있었다.

첫 수업이니 방학을 잘 보냈냐는 인사와 다음 시간에 해 와야 할 설계에 대한 설명으로 수업 시간이 채워졌다.

수업이 끝나고 교수실로 돌아왔다.

“교수님, 어제는 사무실도 안 들르시고, 바로 회식자리로 가셨습니다.”

“너 바로 안 갔었냐?”

“이제나 오시나 저제나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난 피곤해서 간 줄 알았지. 미안하다. 그래도 학과장이 부르는데, 안 가고 배기냐? 크흠.”

어제 교수를 기다리다가 바로 회식 갔다는 선영의 말을 듣고 얼마나 허탈했던가?

딴 곳을 쳐다보는 한 교수가 그렇게 얄미울 줄이야.

“교수님, 독일인들이 절 왜 만나자고 하는 건데요?”

“모르지. 너만 찾는데 내가 어떻게 아니?”

“가보면 알겠죠. 차 좀 빌려주세요.”

‘지은 죄가 있어 싫다고는 못 할걸!’

한 교수가 잠시 망설이더니 키를 내밀었다.

“성훈아, 곱게 몰아야 돼. 뽑은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다.”

열쇠를 내미는 한 교수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걱정 마세요. 하루 이틀 운전한 것도 아니고.”

“그때 그 똥차랑 다르다고. 임마!”

한 교수의 걱정을 뒤로하고 교수실을 빠져나왔다.

“오우, 잘 나가는데!”

기분 좋게 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어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김성훈 씨지요잉?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였다.

‘누구지? 전라도 사람은 아는 사람이 없는데.’

“네, 맞습니다. 그런데 뉘신지?”

-현재 기숙사 공사과장이지라.

“과장님께서 어쩐 일로?”

-한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필립 씨를 만나러 간다는 말씀을 들었구만유.

“네, 그런데 무슨?”

-오시는 길이시믄, 잠시 저 좀 만나고 가실 수 있으실랑가요?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필립을 만나려면 퇴근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 전에 미리 현장을 둘러보려던 참이었다.

“네, 그러시죠. 아직은 시간이 좀 있네요. 어디서 뵐까요?”

전하동 앞쪽의 번화가였다.

길가에 차를 대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네, 여보세요.”

말을 걸자마자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성훈 씨, 여기요. 여기!”

날 어떻게 알고? 차를 대자마자 알아보는 걸까?

뒤돌아보니 키 170의 유들유들하게 생긴 사내가 날 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이미 한잔을 걸친 것인지,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웃는 얼굴이 참 친근감 있게 생겼다.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여기 마담맹쿠로 이쁘장한 500 하나 더 주쇼잉!”

주방에서 여사장의 말소리가 나왔다.

“아따, 어째 과장님은 말씀을 그러게 하신대. 마담이 뭐다요. 마담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싫지 않은 듯했다.

“거거 동네서는 이쁜 사람보고 마담이라 한다 안 하요. 동향끼리 챙겨야제.”

걸쭉한 입담의 둘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아뇨. 전 운전을 해야 해서요. 담에 마시죠.”

“아이구, 내가 정신머리 좀 보랑께요.…… 그럼 내가 마시믄 되지라.”

가지고 온 생맥주잔을 아무렇게 않게 제 앞을 잡아 당겼다.

말투는 걸쭉하고 간사한데, 밉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이제 한 서른다섯 정도 되었을까?

저 정도 입담이면 어디 가서 엄한 행동만 하지 않으면 미움 받을 사람은 아니리라.

“그런데 절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아따 거시기, 필립인가 하는 독일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야그를 듣고, 내 할 말이 있어서 이리 모셨지라.”

꼬박꼬박 어린 나에게 높임말을 쓴다.

“그냥 말씀 낮추시지요. 나이도 있으신 거 같은데.”

한동안 이 몸으로 살아서 그런지, 이제는 나이에 대한 위화감이 많이 사라진 모양이다.

얼마 전만 해도, 적응이 안 되어 힘들었었는데.

“그럴 수는 없지라. 감리단장님 제자신디. 잘못 보였다가는 지는 끽!”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자기 목 치는 시늉을 한다.

사실 그럴 일이야 없다. 그만큼 친해지고 싶다는 것이리라.

감리라는 게 그렇게 힘있는 자리도 아니었다.

난 그저 한 교수 대리로 가는 것이었고, 마땅한 직책도 없었다.

“에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제가 더 올 일도 없을 것 같은데?”

“그라요? 지가 듣기로는 아니던디?”

그의 눈이 동그레진다.

‘으! 한 교수. 또 무슨 말을 한 것이냐?’

“교수님은 학회 때문에 바쁘시다고, 앞으로는 거시기 성훈 씨가 허벌나게 드나들 거라 그라시든디요?”

“하하하, 그래요?”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밖에 주차한 한 교수의 애마를 발로 한 방 차버리고 싶었다.

‘이 사람이 허락도 없이 어딜 취직시켜?’

건설의 경험을 쌓기는 참 좋다.

감리라는 것이 현장의 진행 상황을 감독하는 것이니 말이다.

감리는 현장관리와는 다르다.

현장관리는 현장의 흐름을 지배해야 한다.

하나의 공정이 끝나면 다음의 공정이 바로 따라오기 때문에 정확한 타이밍을 재고 바로 후속공정을 투입해야 한다.

그 타이밍이란 인력의 수급과 자재의 투입을 말한다. 둘 중 하나라도 미비함이 있다면 공사의 지연으로 이어진다.

거기에서 타이밍을 놓치면 공기가 느슨하게 진행되어 버리기 때문에 시간의 손실이 크다. 공기 지연이란 바로 이득의 손실로 직결된다.

현장관리는 현장의 꽃과 같다. 그리고 가장 바쁘다.

워커에 땀이 마를 날이 없이 뛰어다니는 자들이 그들이다.

반면 감리는 흐름을 감독한다.

현장이 도면대로 진행되는지 감독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약간의 조언을 해주는 정도다.

그러나 이게 보통이고, 어떤 사람이 감리를 맡느냐에 따라서 현장의 흐름이 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장 사람들은 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일에 제동을 걸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지금 나는 감리로 취직이 된 모양이다. 나 참!

자꾸 이 사람 말을 듣고 있으면 얘기가 딴 데로 샌다.

“어쨌거나. 만나 뵙자고 한 용건이.”

“그 필립이라는 사람 만나시믄 말이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라고요. 괜히 말 듣고 있다가는 문제가 생긴당께요.”

‘왜 이 사람은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우덜은 아무 잘못이 없당께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도록 말씀을…….”

“우덜이 설계 기준에 딱 맞도록 시공을 하고 있는데, 거시기 다른 자재를 써달라고 한다지 뭐요.”

“무슨 자재를 써달라고 했는데요?”

“뭐. 독일산 뭐라고 했는디, 까묵어 버렸네 그랴.”

자기 머리를 툭툭 치고는 바로 제 할 말을 이어 붙인다.

“하여간 우덜은 기준대로 하고 있응께. 안 된다고 말씀해 주시랑께요.”

기준에 까다로운 독일인이 기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

“뭐 일단 만나보고 얘기하죠.”

“에이, 얘기하고 말고가 어디 있소. 우덜이 잘못한 게 없는디.”

안주를 덥석 주워 먹고, 빈잔을 흔들었다.

“마담, 여그 한 잔 더 주시오잉.”

“다른 문제는 없구요? 그 필립 씨가 원하는 거요? 아니면 다른 독일인들이라도.”

“그 말고 뭐라뭐라 해싸긴 했는디, 별거는 없었슈. 딴 독일인들이야 그 양반이 꽉 쥐고 있응께.”

“그럼,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필립 씨를 만나 봐야죠.”

“아이구, 벌써 일어나실라구. 하여간 이거는 확실해유. 우덜은 설계도에 나온 대로 시공해요. 환경기준에도 딱딱 맞고 말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걸 자기 맘대로 바꾼다는 게 말이 된다요? 독일 사람이라고 유세하는 거여. 뭐여!”

“그럼 가보겠습니다.”

필립과의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리에서 나왔다.

등 뒤로 마담과 과장의 대화가 들렸다.

“오늘은 또 얼마나 마시고 가실라고.!”

“마담, 오늘은 손님 만난다고 법인카드를 들고 나왔당께. 이걸로 샥!”

필립의 집이다.

여기서 평생을 살 것도 아니니 만세대 중의 한 곳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기숙사가 완전히 지어지면 그곳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누구시오?”

무뚝뚝한 억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성훈입니다. 필립.”

“오, 성훈! 베를린에 갔다 왔다면서. 한 교수에게 들었어. 들어와!”

한동안 기숙사 설계를 할 때, 이들과 교류가 있었다.

요구사항이 한두 개라야 한두 번 만나고 끝이 나지.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허연 백발의 고집 센 독일인.

“석 달 만인가요?”

“얼굴이 많이 그슬렸는걸. 들어오게나.”

들어서자마자 코를 자극하는 은은한 향기.

신발을 벗고 방을 둘러보았다.

원래 이런 구조와 형식일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전면적으로 개조를 한 것 같았다.

좀 사는 사람의 집이라도 벽지로 마감을 하지, 이런 고급 수종으로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벽, 천정, 바닥 할 것 없이 모두 나무로 마감이 되어 있었다.

보통 이 시절, 물론 만세대는 훨씬 더 이전에 지어졌으니 아마도 바닥은 장판이고, 벽은 벽지였을 것이다.

‘참 독특한 취향이구나. 잠시 머물 집에다가 이런 인테리어를 하다니.’

나는 그의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았다.

그의 부인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처럼 부인도 꽤나 나이가 있어 보였다. 50대 초반?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부인.”

“안녕하세요. 그이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역시 독일어가 능숙하시네요.”

그녀도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다.

“흐흐, 독일에 내가 없으니 외롭다나 그러면서 온 지 꽤 됐어.”

“금슬이 좋으십니다. 부럽습니다.”

“뭐 우리야. 걱정이 있나? 들게나.”

감사인사를 하며 식탁에 앉았다.

‘채식주의자들인가?’

토끼들이나 좋아할 만한 반찬이었다.

데친 양배추, 미역, 김, 시금치 등등의 채식식단. 그리고 딱히 양념이 되어 있지도 않았다.

‘원재료 맛을 중시하는가 보군.’

어차피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온 것은 아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독일에서 있었던 이야기, 경제 이야기, 필립이 현재에서 하고 있는 일들.

그는 지극히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억지를 부릴 사람이 아닌데.’

그것이 의아했다.

왜 그는 시공사 측에다가, 그리고 현재 측에다가 그런 요구를 했을까?

시공사에서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그만큼 문제가 없다는 말이고, 필립의 잘못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필립은 그런 무례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처럼 지극히 이성적인 남자가 아무런 이유 없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왜 그랬냐고 묻기가 껄끄러웠다.

뭔가 일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사실 설계 초기 단계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었고.’

필립이 나서서 의견 조율을 해주지 않았었다면, 서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의견을 내가 무슨 수로 통일을 했겠는가?

그나마 필립의 배려와 양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현재에 있는 독일인들의 정신적 우두머리였다.

이야기 거리를 찾으며, 거실을 두리번거리는데, 그림 하나가 눈에 띠었다.

“저 그림, 누가 그린 겁니까?”

‘결국은 꺼낸 게 이런 거냐? 한심한 놈.’

스스로도 한심했다. 어린아이가 그린 게 뻔한데 그런 것을 묻다니!

그런데 항상 진지하던 그의 얼굴이 태양처럼 밝아졌다. 이 무뚝뚝한 독일인도 이렇게 웃을 때가 있구나.

“허허, 내 딸 비키가 그린 그림이야. 잘 그리지 않았나?”

잘 그리기는 삐뚤빼뚤해 가지고, 내 딸이 그려도 저 정도는…….

거기서 내 생각은 멈춰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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