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42+화
그리스 여행(3)
“성훈! 포기하자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자포자기 반 걱정 반인 그에게 물었다.
“설마, 당신은 내가 저들을 상대로 총질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 아니었어?”
“이봐요! 제가 바보예요? 총잡이들과 총으로 싸우게요!”
“뭐로 상대하려고?”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그들이 깔아놓은 판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길 수 없어요.”
“그럼?”
“판을 바꾸어야죠. 내가 지배하는 판으로. 그게 승부의 향방을 결정할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수로!”
“그건 제게 생각이 있어요.”
정정당당!
이에는 이, 총에는 총!
세상에 유행하는 말이다. 인정한다.
다만 내가 가진 총은 그들이 가진 총과 다르다.
건축의 ‘건’ 자도 모르는 인간들과 겨룰 때는 정통으로 부딪혀야 한다.
건축은 때리고 부수는 것이 아니다.
세울 건(建), 쌓을 축(築)!
집을 세우고 성을 쌓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바로 건축이다.
돈질한다고 한발 양보하고, 총질한다고 또 한발 양보하고, 계속 양보하다 보면 영원히 내가 원하는 건축은 할 수 없다.
그렇게 인심 좋게 양보하면서 뒤로뒤로 밀려 나다간 결국 패배자가 된다.
“시장은 왜 갑자기 시청을 신축하려고 하는 거죠?”
“왜긴. 일자리를 늘리려고 하는 거겠지.”
내가 본 시청은 그렇게 낡은 건물이 아니었다.
굳이 왜 지금 이 시점에서 지으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나중에 그리스는 ‘IMF’라는 폭탄을 맞기는 하지만, 지금은 살기 좋은 나라였다. 복지도 잘되어 있는 나라였고.
나라의 윗사람들이 뭔가를 할 때는 그 목적이 있다.
예를 들자면 선거 같은 거!
“시장 선거가 언제죠?”
“아마도 내년 초인가 그럴 건데. 그건 왜?”
“흠…… 지금 시장이 지지율이 낮겠죠?”
“그래, 형편없지. 지난 4년 동안 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거든.”
나는 그리스의 국내사정을 잘 모른다. 그러나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다. IMF를 슬기롭게 극복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른다. 물론 언젠가는 극복할 것이다. 그 기간 동안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가 문제일 뿐.
현재의 그리스는 살기 좋다.
따뜻한 지중해의 기후, 풍부한 관광 자원, 그것에서 나오는 국가 예산을 국민들의 복지로 돌리는 인심 좋은 정치인들. 진정으로 내일 일을 모레로 미루는 정치인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지금은 내 앞에 당면한 장애물이 눈에 거치적거릴 뿐이다.
“그럼 지금 시장의 눈에는 지지율밖에 보이지 않겠네요.”
“네 말을 들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 이것도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서 하는 전시행정이라는 말이로군.”
그는 내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은 암울했다. 나를 말리는 것도 포기했다.
“성훈, 나는 포기할래. 여기서 그만둘 거야.”
“정말이에요? 기껏 여기까지 끌어와 놓고는. 아깝지 않아요?”
“그래도 포기할 때 포기할 줄 알아야 돼. 넌 아직 그들이 누군지 잘 몰라서 그런 거야.”
코펠은 아까 왔던 인물들에 대해서 자신이 아는 바를 털어놓았다.
“이곳 아테네에는 아테네파와 테살로니카파, 이 두 조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계속 말해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암중으로 경계하느라 큰 싸움이 나지는 않았어. 기존의 아테네파가 상황을 주시하고 있거든. 아무래도 신생조직인 테살로니카파가 함부로 덤빌 수 없지.”
“그럼 지금은 아테네파가 더 힘이 있다는 말이네요.”
“그렇지. 아테네파는 전통적인 조직이야. 1820년대에 그리스 독립 전쟁 때 생긴 조직이니, 근 300년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 지금의 시장은 그쪽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코펠이 위스키를 들이켰다. 아까의 긴장이 좀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테살로니카파는 신흥 조직이야. 원래 테살로니카에서 10년 전쯤에 생겨났는데, 아테네로 거점을 옮기는 중이지. 이번 선거에서 시장과 견줄 만한 후보를 거기서 지원을 한다는 소문이 있더군. 지금 시장이 평판이 좋지 않으니까, 기회라고 여긴 거야. 시장이 되면 시의 예산과 정책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말야.”
“이번 공모전의 꼼수는 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 확실하군요. 그렇죠?”
잔의 남은 위스키를 모두 들이켠 그는 단정하듯 말했다.
“뭘 하든 신경을 거스르게 될 거야. 그리고 일이 틀어지면 모두 우리 탓이 될 거고. 나는 손 뗄 거야. 자네도 떼!”
한마디로 너무 위험한 사람들과 경합을 한다는 말이었다.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시청에서 아테네 건설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은 그 회사가 조직의 자금줄 중의 하나임을 의미했다. 그들의 목적은 돈도 챙기고, 지지율도 챙기겠다는 것.
‘과연 공정한 방법으로 이길 수 있을까?’
나 또한 의문이 들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안, 설계비 얼마로 책정했어요?”
“백만 달러.”
“알았어요. 그게 있으면 설계 진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포기했는데 뭐하러 묻느냐는 눈빛이었다.
어디까지나 그가 출품자였다. 코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일단 출품하기 전까지만 날 지켜봐 줘요. 그러고도 당신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면 그때는 포기할게요.”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내가 말을 이었다.
“대신 100만 달러에서 추가되는 설계 비용은 제가 가지겠어요.”
목숨 걸고 일하는데 공짜로 일할 수는 없다.
코펠이 떨떠름하게 얼버무렸다.
“그날 봐서.”
“안 돼요! 하고 안 하고는 그때 가서 결정하는 거지만, 추가 비용에 대한 권리는 지금 결정해요. 얼마가 될지는 제가 결정할 거고, 받아내는 것도 내가 하겠어요. 인정해요?”
일단 그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그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때 가서 안 된다고 하는데 고집 부리기 없기야!”
그도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못을 박았다. 그는 여전히 이것을 할 생각이 없었다.
다음 날.
“아테네에 아는 사람들 좀 있죠?”
“그럼! 내가 여기 자리 잡은 지가 벌써 5년이 넘었어. 왜?”
“그 사람들 좀. 만나고 와요.”
“도움을 청하라고? 그건 안 돼. 불가능해.”
내가 피식 웃었다.
“설마요. 사람들 만나서 우리는 시장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래서 그것대로 설계를 할 거다. 파격적인 설계가 나올 것이다. 이 정도만 얘기하시면 돼요.”
“무슨 꿍꿍이야. 공모전에서는 비밀 엄수가 가장 중요하다고.”
그의 걱정도 이해가 갔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우리는 당선될 수 없어요. 알죠?”
“알아. �e. 하지만 세상에서 상대하기 제일 힘든 게 돈 있고 힘있는 것들이야.”
그의 대답에서 씁쓸함이 배어나왔다.
자신의 원하는 것이 노력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알게 되는 인생의 쓰디쓴 맛 말이다.
“당신은 내가 뭘 설계할지, 어떻게 변경할지 감이 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는 걸 본 적도 없는데.”
“그럼 일단 비밀 엄수는 OK?”
코펠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 그래. 하하하. OK! OK! 그럼 다음은?”
“당신은 능력이 있어요. 단지 상황이 거기에 따르지 못하는 거예요.”
“약자의 변명이야. 다음은 뭘 하려고.”
“멍석을 깔아야죠. 한바탕 춤사위를 펼치려면, 제대로 된 멍석을 깔아야 하거든요.”
“…….”
“준비되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당신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요.“
“굿? 떡? 멍석? 하하. 네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신경 쓰지 마세요. 한국에 그런 말이 있어요. 얼른 다녀와요.”
등을 떠밀다시피 코펠을 밖으로 내보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모든 것의 시작이니까.
실력으로 안 되는 일은 많다. 차마 실력을 보일 기회조차 없을 때는 훨씬 더 많았다.
약자의 변명이라고 그는 말했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변명은 약자가 하는 게 아니라, 패자가 하는 거다.
그리고 약자는 패자가 아니다. 승부가 나기 전까지는.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다. 아니, 시작도 되지 않았다.
‘내가 준비되는 때가 승부의 시간이지.’
나는 설계 변경에 들어갔다.
***
공모전 당일 시장 집무실.
“시장님, 오늘 조간 보셨습니까?”
항상 침착하던 비서관이 호들갑을 떨었다.
시장은 막 출근하던 참이었다.
“왜 또, 어떤 놈들이 내 욕이라도 하는 거야?”
근엄함이 지나쳐서 시민과의 소통이 전혀 없는 시장의 별명은 ‘불통’이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아뇨. 그건 아닙니다.”
거슬리는 말을 했다가는 당장에 불똥이 떨어진다.
“그럼! 농성이라도 하는 거야?”
비서관은 그냥 보여주기로 했다.
말로 설명하는 것도 어차피 그것의 연장선일 테니까.
“이것 좀 보시죠.”
신문을 내밀었다.
시장의 얼굴이 찌그러진다.
신문을 볼 때마다 지지율이 떨어지는 그래프요, 시정을 비난하는 소리이니 신문을 안 본 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나 신문 끊은 거 몰라? 지금 나보고 이걸 보라는 거야? 엉!”
내용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비서관에게 호통을 쳤다.
“그래도…… 시장님. 꼭 보셔야 합니다.”
불통시장은 결국 신문을 집어 들었다.
<조간 아테네>
-공모전에 출품하는 한 건축사무소와의 인터뷰 내용 전문.
(기는 기자, 건은 건축사 사무소, 사무소 측에서 익명을 요청했으므로, 밝히지 못함을 양해해 주십시오.)
기 : 공모전 당선 결과가 취소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건 :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도면의 누락이었으니 우리 측의 잘못이었습니다. 인정합니다.
기 :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건 :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시청을 찾아갔을 때, 직원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당신들이 아테네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고요.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단지 아름다움만을 추구했구나. 우리 생각이 짧았습니다.
기 : 그래서 설계 변경을 하신 겁니까? 저번의 출품작으로 당선을 했고,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만.
……중략…….
기 : 시장이 원하는 바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건 : 안타깝게도, 직접 만나 뵐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본 결과, 아테네 시민들과의 소통을 원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저는 외국인이라서 아테네를 잘 모릅니다.
기 : 하하. 아테네 시장은 불통시장으로 유명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건 : 사람은 직접 만나 봐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굳이 만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인터뷰도 있고, 주변 사람도 있고, 많지 않겠습니까?
기 :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변경이 된 겁니까? 시장의 의도가 뭔지 궁금합니다. 말씀해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건 : 그건 공모전 현장에 오셔서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직접 상세하게 설명드릴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이런 자리를 나가란 말이야?”
“시장님의 의중이라고 대놓고 말하는데, 잘못된 것이 있다면 해명하셔야 합니다. 즉각 해명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시민들과 소통한다는 이미지도 만들 수 있고 말입니다.”
시장이 신문을 책상으로 픽 집어 던졌다.
“알아서 스케줄 맞춰 봐. 오라는 데 가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