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41화
그리스 여행(2)
담당자에게 물었다.
“이유가 뭐죠?”
“지금 당신. 나한테 따지는 건가? 도면이 누락되었다는 말 못 들었어? 잘못은 당신이 해놓고는 누구한테 시비야?”
아주 고압적인 자세였다.
고개를 삐딱하게 젖히고 비웃으며 고함을 지른다.
도면 누락이라…….
참 좋은 핑계다. 도면을 누락시킨 주체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다. 증거가 없잖는가! 증거가.
“그래서 당선 취소만 했잖아. 사흘 후에 또 재공모가 있으니까. 그때 나오라고.”
“뭐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요?”
이번에는 코펠이 화가 났다.
이미 우리 설계안은 들통이 났다. 공모전에서는 상대에게 자신의 안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지피지기 백전불패!
그 반대의 상황이라면 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아마도 아테네 건설에서는 우리 것과 비슷하거나, 혹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안을 들고 나올 것이다.
그리고 담당자는 아테네 건설의 손을 들어주겠지.
‘이건 아무리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심하잖아.’
더럽고 치사하고, 구린 냄새가 풀풀 난다. 아니, 애초에 이걸 노린 것인가?
“흐흐. 아예 참가도 못 하게 해줄까? 그러고 싶어?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담당이라는 놈은 비웃으며 우리를 농락했다.
그러고도 한마디를 더 했다.
“어디서 외국인 따위가 발을 들이밀어.”
열 받은 코펠도 말로는 지지 않았다.
“흥! 누가 이기나 두고 봅시다.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요.”
허! 이런 일은 한국에서 지겹게 당해봤다. 그리고 수없이 밟혀 봤다.
그때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감히 강자에게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것 다음에 쓰나미처럼 밀려올 불이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도전에도 눈치를 봐야 한다.
몇몇의 강자가 눈짓만 해도 우리처럼 작은 회사는 왕따를 당한다.
결재가 몇 달 밀린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그래. 그 정도도 못 기다리면서 우리하고 거래하겠다는 거야. 지금?”
현금에서 어음으로 바뀐다.
“에이, 우리도 어음으로 받았어. 어쩔 수 없잖아. 사정 좀 봐달라고.”
다시 몇 달을 기다리면 그 어음이 종잇조각으로 변한다.
어음을 줬던 회사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우린 이미 결재했어요. 당신네가 받아갔잖아요. 어휴. 가지고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이따위 소리나 지껄이면서 말이다.
그렇게 내가 처음으로 입사했던 가구 회사는 망했다.
사장님은 그 충격으로 중풍에 걸리셨고, 병석에 누워 계시다가 얼마 후에 돌아가셨다.
‘말 한번 잘했다. 그래! 나는 외국인이지. 내가 차후에 불이익당할 일 따위는 없다는 거지.’
“돌아가요.”
“젠장!”
화도 나고 억울하지만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코펠은 운전을 하는 내내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나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내 꿈이 담긴 건축물이었다고, 파르테논을 내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단 말이야.”
얼마나 억울했던지 핸들을 퍽퍽 치면서 울분을 토해냈다.
그 소음 속에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 한판해 보자 그거지.’
무인은 검으로 말하고, 문인은 글로써 해결하며, 건축가는 설계로 승부한다.
승부의 시작은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가 누군지도 몰랐다.
고맙게도 그 상대를 가르쳐 줄 사람이 그날 밤에 우리를 찾아왔다.
탕!
“아무리 그리스가 부패했다고 하지만 이건 경우가 아니잖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아직도 울분이 삭지 않는 듯 애꿎은 책상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만해요. 화를 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의 설계안은 이미 들통이 났다고, 아테네 건설에서는 우리 것을 그대로 카피해 올 것이 뻔하다고. 그다음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나?”
“그럼 더 나은 안을 내놓으면 되죠. 놈들이 아무 말도 못 하게끔 말이죠.”
지금의 나는 충분히 이성적이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에 흥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놈들이 원하는 것도 우리가 흥분해서 일을 포기해 버리거나, 무리수를 둬서 스스로 무너지는 거예요. 그럼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되는 거라고요.”
격앙된 코펠을 달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선장이 돌아버리면 배는 가라앉는다.
“설령 그들이 당선된다고 해도, 제대로 된 시공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럼 부실공사가 되겠죠.”
“당연하지. 뒷돈 빼먹기 바쁜 놈들이 일은 제대로 하겠어.”
“그렇죠. 그럼 당신이 사랑하는 아테네에는 세월에 삭은 파르테논과 부실시공으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쓰레기 파르테논이 남게 되겠죠.”
건축가의 감성에 호소하며 그의 마음을 다잡았다.
“자, 여기 위스키나 한 잔 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혀요.”
코펠에게 잔을 건네고 나도 한 잔을 마셨다. 쓰디쓴 액체가 목구멍으로 흘러내렸다.
그렇게 겨우 그의 흥분을 가라앉혔을 때였다.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밤이었다.
우리 둘이 서로를 바라봤다.
코펠이 나에게 물었다.
“지금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있나?”
허, 나한테 묻는 건가? 지금!
“제가 알 리가 없잖아요.”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미 문은 열리고 있었다.
허락받지 않은 무례한 방문객들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검은 양복을 입은 자들이었다.
속에 입은 새하얀 와이셔츠가 양복과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세 명의 건장한 남자였다.
말없이 걸어 들어와서는 뒷짐을 진 자세로 우리를 마주 보고 섰다.
어안이 벙벙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다시 한 명이 걸어 들어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여유로운 걸음이었다.
170 정도의 다부진 그리스인이었다. 구릿빛의 그을린 피부에 깔끔하지만, 강인한 인상이었다.
뒤에 있는 인물들이 키는 더 컸지만, 느낌상으로는 이 남자가 훨씬 커보였다.
그는 여유 있는 걸음으로 세 명을 지나쳐 코펠의 앞에 섰다.
“코펠?”
다짜고짜 이름을 물었다.
상황을 눈치챈 코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소.”
몇 마디 안 되는 말 속에 많은 의미를 품고 있었다.
거친 말투로 협박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직이 대화하듯 말을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코펠은 굳어버렸다.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내가 저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몰라서 그런지도 모르지.’
그러나 이런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일의 주재자는 코펠이다. 그가 결정권을 쥐고 있다.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지금 상태로 보아서는…… 젠장!
“알아들었으리라 믿겠소.”
제 할 말만 하고 그 남자는 돌아섰다. 병풍처럼 뒤에 있던 남자들도 등을 돌리던 찰나!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며 그의 등에 대고 물었다.
“공모전을 포기하란 말입니까?”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은 듯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돌아섰다.
“누구?”
“관계자요.”
“흠…….”
나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이 분명했다.
그가 말했다.
“그런 말은 한 적 없소.”
“그렇다면 확실히 합시다. 공모전에 참가해도 상관없다는 말이지요?”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눈썹을 으쓱거렸다.
그보다는 뒤에 있던 세 명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어갔다.
‘감히 대장의 말에 토를 달다니.’ 이런 느낌!
그러나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기강이 확실하고, 행동에 절도가 있다.
솔직히 두렵다.
겁주기 위해 문을 박차고 들어오지도 않았고, 쇠파이프를 들지도 않았다.
이 상황에서 예의 바르다는 말은 우습지만, 노크를 하고 들어왔고-허락은 하지 않았지만-조용히 말 몇 마디를 던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의사는 확실히 전해졌다. 코펠의 행동이 입증한다.
그는 말을 전하러 왔다. 우리 행동이 응징의 대상이었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다를 것이다.
이들의 허리춤에는 분명히 권총이 있을 테니까. 총에 맞는다면 치명상이 아니라, 바로 즉사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설 수 있는 것은, 이들이 경고를 하러 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경고에서 응징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겠지만 그 선을 넘지만 않으면 된다.
오히려 상대함에 있어서는 양아치보다 편하다. 기분 나쁘다고 총을 꺼내지는 않는 자들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내가 이들의 마지노선을 확인할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꾹 다물어진 입에서 그의 강직함이 느껴진다. 한입으로 두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당신들이 큰 문제라고 생각할 일만 만들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지요?”
옆에서 코펠이 눈만 데굴데굴 굴리면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그렇소.”
“알겠어요. 우리는 공모전에 참가할 거요.”
“이봐, 성훈!”
코펠이 다급히 내 손목을 잡았다. 그가 생각하는 결론은 이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판은 바뀌었다. 결정권은 나에게로 넘어왔다.
바로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불편해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나의 눈을 응시했다. 나도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남자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럼 그렇게 하시오.”
그가 눈을 돌리고 돌아섰다.
그리고 그들의 구두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즈음, 나는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코펠이 달래며 말했다.
“성훈, 이건 안 돼! 포기하자.”
“그럴 수 없어요.”
“상대가 너무 위험해.”
“들었잖아요.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괜히 그들의 기분을 거스르는 건 스스로 제 무덤 파는 짓이야.”
그는 내가 젊은 오기로 덤벼드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다.
그 혈기로 나 스스로를 망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기회는 또 있다고. 그러니…….”
나도 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한국에서도 설계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이것과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여기나 저기나 돈 모이는 곳에는 벌레가 꼬인다.
편하게 가는 방법도 안다. 돈 좀 갖다 바치면 된다. 발바닥 한 번 핥아주면 된다.
내 자존심 까짓것! 생존보다 중요하지 않다. 내 가족보다 귀하지 않다. 나 하나 희생하면 온 가족이 배부르다.
사람들은 코웃음 칠 것이다.
‘딴 놈들이 정당하게 플레이하지 않는데, 넌 무슨 성인군자라고 그러는 거냐? 네가 그렇게 잘났냐?’
나도 그렇게 말하며 살았었다.
나는 내가 죽은 이후를 보지 못했다.
내 장례식장에는 누가 왔을까? 몇몇의 친지가 와서 아쉬워하겠지.
그리고 바쁘니까, 예의상 할 일은 했으니까 얼른 집으로 돌아가겠지.
나를, 나의 흔적을 기억하며,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사람은 몇이나 있었을까?
‘이렇게 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그처럼 올곧고 성실한 놈은 없었는데.’
‘내가 녀석 대신 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살면서 그런 녀석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우리의 자랑이었는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아니!
나는 없었다고 확신한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그처럼 살지 못했다. 나는 그럴 배짱도 포부도 없었다.
직업상 수많은 사람의 장례식장을 들렀었지만,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분들은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면서 자신의 뜻대로 고고하게 살 수 있었을까! 질투가 생기는 사람들이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따지자면 그분들은 대단함과 거리가 멀다.
돈으로 순위로, 숫자화되는 어떤 가치로 따질 수 없는 위대함이다. 사람의 마음에 작용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나는 그것을 한 단어로 정의하지 못한다.
다시 시작하는 삶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