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40화
그리스 여행(1)
지금 나는 그리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고 있다.
“내 부탁 하나 들어줘.”
일만 마르크를 내놓으면서 마이어가 한 말이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사실 그 돈만큼의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마이어의 부탁이니 웬만하면 들어주고 싶었다.
“뭔데요? 말해봐요.”
“내 친구가 그리스에 있어. 가서 좀 도와줘.”
간단한 부탁이었다.
한 교수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그리스에 볼 것도 많아. 좋은 경험이 될 거다.”
그걸로 내 생애 첫 여행지는 그리스로 결정이 되었다. 그것도 신화의 중심지인 아테네로.
약간은 기대를 했었다. 아프로디테 같은 여성을 만나기를…….
헛된 꿈이었음을 깨닫는 것은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이거 못 뜨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구의 아주머니들과 아저씨들이 몸을 싣고 있었으니 말이다.
창가 옆자리에서 거구의 아저씨 틈에 꼽사리 끼어서 아테네로 날아갔다.
엘프는 없었다.
드디어 도착한 따뜻한 남쪽 나라. 그리스!
사방이 문화재로 가득한 도시를 한 바퀴 빙 돌아 간 보듯이 보여주고는 비행기가 내려앉았다.
비행기 위에서 보는데도 웅장함이 느껴지는 파르테논 신전과 언덕 위의 도시 아크로폴리스.
서양 역사를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예전에 사진으로 알던 곳들이 사방에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아테네공항은 인천공항과는 비교도 안 되게 아담했다.
공항을 빠져나와서 들이쉬는 첫 호흡이 얼마나 뜨거운지, 허파가 후욱 달아올랐다.
다행이라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더구나 아테네는 전형적인 관광도시라서 영어가 통하지 않을 거라 걱정할 필요가 별로 없었다.
“역시. 지중해는 다르구나.”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로 달렸다.
도로 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오렌지 나무들.
우리나라의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와는 또 다른 운치가 있었다.
그 뒤로는 대리석으로 지어져 올망졸망 줄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상점들이 보인다.
한국과 다르고, 독일과도 다르다. 각각의 기후에 맞게, 그들의 풍습에 맞게 지어진 건물들이었다.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문화와 건물이 있을까? 죽기 전에 다 볼 수 있을까?’
그렇게 잠시 감상에 빠져 있다가, 기억이 리플레이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 나를 태운 택시가 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었다. 아까 봤던 은행 건물이 또 보였거든.
‘이 사람이. 어디서 장난질을…….’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거기까지 10분 내로 가면 요금에 5달러 더 드리죠.”
굳이 옥신각신 돈으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지리를 모르는 내가 싸워봐야 이길 수도 없다.
그런데…… 10분이 뭐야! 컵라면이 반쯤 익었을까 하는 시간에 기사는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다.
구릿빛 얼굴의 운전수는 느끼한 미소를 날리면서 엄지를 들었다.
약이 올라서 한 마디 하려다가 조용히 5달러를 주고 내렸다.
다음부턴 버스를 타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뿐이다.
여기서 드잡이질을 하다가는 저 운전기사는 방금 전까지 잘만 알아듣던 영어를 못 알아듣는 기억상실증에 걸릴 것이며, 나는 더 열을 받을 것이고, 시간은 땅바닥에 버려질 것이다. 젠장!
상점을 들러서, 음료 하나를 사면서 주소를 물어보았다.
골목길을 지나치는 활기찬 사람들의 모습에서 지중해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었다.
길가인데도 비키니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어떤 사람은 거실인 양 의자를 펴놓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축제가 아닐까? 싶은 분위기였다.
‘흥이 많고, 축제를 즐긴다더니. 이런 따뜻한 분위기이니, 그리스 문화가 꽃을 피우기에 적당했겠지.’
“오! 마이어가 보낸 친구구만. 어서 오게나.”
마이어의 친구 역시 독일인이었다. 이름은 코펠이라고 했다. 얇고 흰 반팔 티에 녹색 반바지를 입은 중년인이었다.
그리스에 여행을 왔다가 아예 자리를 잡아버린 낭만적인 건축가였다.
여장을 풀자마자 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게 이번에 아테네 시청 신축을 하는데 공개 입찰로 진행을 한다네. 이게 설계안이야.”
아테네 시청답게 파르테논 신전을 모티브로 해서 웅장하면서도 아테네의 상징성을 잘 나타내었다.
“설계가 깔끔하네요. 정체성이 확실하고, 멋있어요.”
그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그리스가 좋아서 이곳에 뿌리를 박은 사람이다. 그 문화에 대한 깊은 사랑이 드러나는 도면이었다.
“당연하지. 난 이걸로 낙찰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럴 거면 내가 왜 필요하냐? 그냥 하면 되지.’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상대가 만만치 않아. 아테네에서 가장 큰 건설회사에서 뛰어들었거든. 뭔가 특출 나게 눈에 띄지 않으면 그쪽 손을 들어줄 거야.”
“아하! 그래서 이 건물을 더 돋보이게 할 투시도가 필요하다. 이 말씀이죠.”
“그렇지. 마이어가 이번 박람회 컨셉 영상으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더군. 그래서 꼭 좀 도와달라고 했어. 자네 일정에 방해가 되었다면 내 사과하지.”
‘내가 잠든 사이에 별의별 일이 다 있었구만.’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마이어의 얼굴이 생각나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그리스 여행도 하고 싶었거든요. 일정이 약간 당겨진 것뿐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번 낙찰을 받고 나면 두둑하게 챙겨줌세.”
그럼 공으로 부려 먹으려고 했더냐. 안 주면 뜯어서라도 갈 테니, 그건 염려하지 마시고. 일 얘기합시다. 얼른 끝내고 나도 여행다운 여행을 해 봐야죠.
하지만 이 독일인은 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참, 그리스는 어디 어디 둘러봤나. 역시 일단은 파르테논을 봐야…….”
주저리주저리 이어지는 그의 그리스 사랑을 끊었다.
당신의 사랑이지, 나와는 하등 상관없다.
나는 르 꼬르뷔제의 롱샹을 보고 싶었다.
그 외에도 보고 싶은 곳은 많았다.
“코펠. 그래서 제가 해야 할 일은 뭐죠?”
“뭐 그리 급해. 아직 살날이 창창한 젊은 친구가 말야.”
가볍게 투정을 부리며 그는 나에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파르테논 신전은 서양건축사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건축물이다.
단지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웅장함이란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구조물이다.
아테네의 수호자로 여겨지던 아테네 여신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그러나 건립된 후 수많은 침공과 포격으로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다.
코펠이 말했다.
“난 파르테논 신전을 내 방식대로 재건하고 싶었어. 그보다 웅장하고 신비로울 수는 없겠지만…….”
별로 어려울 것은 없었다.
그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순백의 대리석과 도리스양식으로 만들어진 기둥일 것이다.
이오니아식이나 코린트식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심플하면서도 쭉쭉 뻗는 힘찬 느낌을 주는 기둥 말이다.
공부한 지 십수 년이 지난 거지만, 얼마 전 한 교수의 노트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공부했었다.
“알겠어요.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만들어 보죠.”
워낙 인상 깊게 뇌리를 차지하고 있던 건축물이라 서너 시간 만에 뚝딱 모델링을 끝냈다.
기둥 하나를 정교하게 만들고, 실제 모양처럼 엔타시스(배흘림기둥)효과로 살짝 통통하게 볼륨감을 넣었다.
그다음은 카피, 카피, 카피!
자리에 기둥을 박아 넣고, 그 위로 페디먼트(Pediment:삼각형의 박공)를 만들어 얹었다.
도리스 기둥 사이사이로 벽체를 만들어 넣어주면 코펠이 원하는 건물의 완성이었다.
말이 자신의 뜻대로 재해석한 것이지, 사실 벽 부분을 제거하면 파르테논을 그대로 복원한 거나 별다를 차이가 없어 보였다. 내부 구조는 그의 말마따나 완전한 재해석이지만.
‘이걸로 될까? 솔직히 아름답긴 하지만 밋밋하다.’
내가 보는 느낌은 그랬다. 다른 사람들의 관점은 또 다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은 또 다른 이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똑같은, 아니, 복원을 했다고 해도, 그 세월의 깊이는 따라갈 수 없다. 누가 보든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울 것인가?
많이 상하기는 했지만, 수천 년을 옆에 있었던 파르테논이 더 좋을까? 아름답지만 짝퉁이 더 좋을까?
지금 코펠이 설계한 아테네 시청은 순수하고 지고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뿐이었다. 새롭지 않았다.
사람들을 놀래키려면, 상상도 못 하는 반전을 만들어줘야 한다.
뭔가를 새롭게 꾸민다는 것은, 창조적인 작업을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까딱하면서 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지금 나는 그런 것을 하고 있다.
건물의 기둥과 외벽의 색체와 질감을 바꿔가면서 이런 저런 느낌의 건축물을 만들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규정된 외벽을 메탈로 바꿔봤다. 굉장히 모던한 느낌은 났다.
“이건 좀…… 뭔가 너무 묵직한 느낌이야. 안 그래?”
묻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냥 싫다고 할 것이지!
살짝 열이 받아서 아예 크롬으로 바꾸었다. 거울처럼 빛나는 금속재질이었다.
“와우! 완전 환상적인 느낌이기는 한데, 너무 앞서갔다. 다른 걸로.”
“건물만 보면 어떡해요. 주변 외관과도 비교를 해봐요. 어울리는지. 코펠 당신이 가장 잘 알 거 아니에요?”
이틀 동안 우리는 건물의 느낌을 바꿔 보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입찰 당일이 되었다.
입찰에 참여한 업체는 우리를 포함한 다섯 군데였다.
코펠이 말했다.
“저 사람이 아테네건설 대리인이야. 유일하게 경쟁이 가능한 곳이지. 설립한 지도 제일 오래되었고, 자금력도 가장 풍부하지.”
아테네에서 자신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는 양 건방지게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하는 거야. 잘 보고 배우라고. 여기 아테네에서 우리보다 더 나은 곳은 없어. 그냥 니들은 우리를 찍으면 되는 거야!’
말하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분위기가 있다.
자신감과 시건방짐은 딱 한 끗 차이다.
우리의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다음 날, 우리는 시청 관계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성훈, 낙찰이 취소되었대.”
우울해진 얼굴의 코펠이 신음하듯 말을 뱉었다.
단지 취소가 된 것만으로 저런 표정을 짓지는 않을 것이다.
“왜요?”
“…….”
“이유가 뭐랍니까?”
“�e. 입찰 절차에서 누락된 도면이 있다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도면을 확인했었다. 코펠의 사활이 걸린 입찰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백번을 양보해서 누락된 도면이 있다면 달라고 요청하면 될 일이 아닌가?
그리스가 그렇게 공명정대하고 청렴결백한 나라였던가? 도면 하나 때문에 낙찰결과를 번복할 정도로!
“코펠. 앞장서요.”
“어디를?”
“어디긴요. 시청이죠. 물어봐야죠. 진짜 이유가 뭔지. 전 납득이 안 되네요.”
며칠 동안 유럽 여행을 미루고 했던 작업이다. 실력으로 밀렸다면 승복한다. 그러나 실력 외의 것으로 불합리한 일을 당한다는 것은 절대로 승복할 수 없었다.
‘이왕 왔으면 풀떼기라도 뜯어간다. 빈손으로 왔다고, 빈손으로 갈 김성훈으로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자기 집 앞마당이라고 실력도 없으면서 큰 소리로 짖는 놈들이 있다면, 이빨을 뽑아놔야죠.”
그러나 여전히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일단 가봐요. 말은 제가 할게요. 납득할 수 있는 말이라도 들어야 하든지 말든지 하죠.”
끌려가듯 마지못해 시동을 걸면서 코펠이 말했다.
“아무래도 아테네건설에서 장난을 친 것 같아. 느낌이 좋지 않아.”
“흥. 그거야 당연한 거겠죠. 그렇다고 납득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돈이 없어서 밀리고, 힘이 없어서 발린다. 전생에 수도 없이 당했던 일이다.
그 일이 지금 또 반복되려고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도시, 아테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