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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39화 (39/427)

건축의 신 39화

마이어와의 약속

마이어가 강력 추천했다.

“성훈, 독일의 미래형 건축을 보고 가라고.”

한 교수는 더 강력하게 반대했다.

“아냐! 중세 건축을 보는 게 나아.”

나는 생각했다.

‘됐으니까. 그냥 가라고. 당신은 한국으로, 당신은 대학교로. 제발!’

닷새 밤을 새운 내가 부스스 잠을 깨자마자 쳐들어와서는 이런 짓을 하고 있다.

‘고생한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냐! 니들은.’

어제 박람회가 끝난 뒤에, 뒤풀이도 안 보고 호텔로 돌아왔다. 할 일 끝났으면 자야지. 나도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고! 한 시간만 더 자자!

“잠은 기차에서 자면 돼. 침대칸 끊어줄게.”

마이어가 씩씩거렸다.

‘이봐요. 이건 말이여, 양반아! 독일의 미래 건축이 어떻게 되는지는 내가 더 잘 알아. 20년은 꿰뚫고 있어.’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내 심정을 홍길동 할아버지는 아실 거다. 제발 내 인생의 행보를 니들 멋대로 정하지 말라고.

어찌 된 영문인지 어제부터 이 둘이서 나를 공부시키려고 난리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 공부는 내가 알아서 한다. 누가 시켜서 공부할 나이가 아니지 않나? 43살이!

결국 침대에서 걸터앉아 턱을 괴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잠자긴 다 틀렸다.

대충 씻고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미 둘은 식사를 끝내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뷔페식으로 된 음식 대에서 주섬주섬 아무거나 주워서 식탁에 앉았다. 밥맛도 없다. 잠이 필요하다.

앉자마자 마이어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이 양반이 진짜!

“성훈, 어제 박람회 뒤풀이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날 왜 찾아? 뭔 소리냐며 둘을 쳐다봤다.

그 말을 한 교수가 이어받는다.

“그게 말이야… 우리 쪽에서 한 시뮬레이션이 대박이 났잖냐.”

대박 나는 거야 이미 예상했었고 그런데 그게 왜?

“끝나고 나서, 뒤늦게 EU의 대기업들이 널 스카우트하러 들이닥쳤거든. 폭스바겐, 다임러. BMW, 아우디까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곳이지.”

마이어가 흥분했다. 어제의 상황에 분통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한! 이 녀석이 자네를 자꾸 숨기려고 하는 거야. 미리 이야기가 된 거야? 성훈, 자네한테도 좋은 기회가 아닌가? 화려하게 세계 무대에 데뷔를 하는데 말이야.”

물론 미리 이야기가 된 것은 아니다.

한 교수가 날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지금이라도 데뷔하려면 할 수 있어.”

내 의향을 묻는 것이다. 혹시 자신이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는 것 같았다.

“아뇨, 잘하셨어요. 교수님.”

“성훈, 이건 기회라고. 진짜 큰 기회라고. 무려 EU의 대기업이라고. 한국의 기업들이 아니라고!”

마이어는 이런 기회를 놓치는 것이 진심으로 아까운 모양이었다.

하긴 사람이 명예욕이라는 것이 있는 건데.

하지만 내가 승부를 보려는 것은 다른 것이고, 또한 이런 식으로 내가 알고 있는 미래와 갭이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 하나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겠냐마는. 마이어 말마따나 무려 EU의 대기업이다. 영향이 없을 리 없다.

도찐개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잘 먹고 잘 살고 갑질 하려면 큰 데서 잘되는 것이 좋지 않은가!

‘아냐! 이건 나만의 게임이야. 내가 룰을 흐트러뜨리면서 게임을 할 수는 없어.’

여기서 스카우트가 되고 명성을 높이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겠지. 그럴 능력도 있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갈까? 지금의 나는 기본을 쌓아야 할 때다.

미래를 안다는 것 자체로도 큰 무기가 되겠지만, ‘Input’ 없이 ‘Output’만 내보내다 보면 언젠가는 텅 비어버릴 것이다.

페달을 밟지 않는 자전거는 언젠가는 쓰러진다. 그리고 거기가 끝이겠지. 한 5년이나 갈까? 물론 그래서 번 돈으로 유럽의 미녀들 끼고 살면 된다.

그런데 그것이 싫었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 수명을 좀 더 연장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나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고, 내 끝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치명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 바로 기본이다. 이전 삶에서 학교생활을 개판으로 보냄으로써 쌓지 못했던 기본! 그 기본을.

과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쌓을 수 있을까? 천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기본이나 연습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참 겸손한 사람이네요’라고 칭찬해 줄까? 하하. 스스로도 헛웃음만 나왔다. 한 교수의 선택은 옳았다. 지금은 공부를 해야 할 시기다.

미래를 아는 능력? 일 년 뒤에도 십 년 뒤에도 사용할 수 있다. 급하지 않다. 지금은 명성이나 돈이 아니라 명성이나 돈이 되어줄 인맥과 공부의 기초를 다져야 할 때다.

그러나 나는 이런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상의할 수 없다. 절대로!

“마이어, 난 아직 덜 큰 병아리에요.”

“헐, 불사조가 아니고! 자네가 병아리면 나는 계란이야!”

‘어이쿠, 이 양반이 나를 너무 높이 보는걸.’

하긴 한 교수처럼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면 나의 허실을 알겠지만, 단시간에 결과만을 본 마이어로서는 그럴 만했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 만큼 확실히 납득을 시켜야 한다. 집중해야 될 시기에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다.

“난 내 상태를 알아요. 난 기초가 부족해요. 다른 능력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뿐이에요. 한 번 날고 나면 부서져 버릴 정도로 다리가 부실하죠. 난 아직은 다리가 더 굵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몇 번을 날아도 문제가 없도록.”

그러나 마이어는 나의 마음을 이해함에도 납득하지는 못 했다. 여전히 찌푸린 미간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이어가 나 잘되라고 하는 것. 나도 충분히 알아요. 그리고 진심으로 고마워요. 하지만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지금은 유명세가 독이 될 뿐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올게요.”

마이어가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이게 25살짜리가 할 말인가?

“성훈 자네.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

“마이어, 그건 언제든지 가능해요. 다만 그 시기가 너무 이른 거예요. 마이어가 아니었으면 이번 일은 손대지 않았을 거예요. 진심이에요.”

한 교수가 나를 거들었다.

“마이어, 성훈이 이 친구가 더 큰 날개를 펴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마이어가 한숨을 내쉬며 볼을 긁었다.

“쩝, 그렇기는 한데. 난 잘 이해가 안 돼서 말이야. 한! 자네는 이런 말 할 수 있어?”

한 교수가 ‘푸흡’ 하고 웃었다.

“이것 봐, 마이어! 난 이런 재주가 없잖아. 있으면 당장에라도 유명해지고 싶지.”

“그렇지! 이거 봐. 이거 봐. 이게 정상이라고.”

마이어는 양손을 머리 양쪽으로 올리고 돌렸다. 미친 거 아냐? 라는 뜻.

“성훈! 이 친구. 정말 별종이야. 돌아버리겠어. 크하하하!”

결론만 말하자면 마이어도 일단은 납득했다.

“언론과 대기업들은 내가 막아주지. 쳇. 모르쇠하고 입 다물면 지들이 어떻게 알겠어! 대신 조건이 있어.”

“……?”

“난 성격이 급해. 오래 기다리지 못해. 5년 내로 날아올라.”

“노력해 볼게요.”

“알았어. 기다려 보지.”

그리고는 수고했다면서 일만 유로를 놓고 갔다.

계산을 확실한 사람일세. 돈보고 욕하는 사람은 없다. 춤추는 사람은 있어도.

한 교수가 돌아가기 전, 걱정하듯 말했다.

“난 말이다. 비행기에서 말했지만, 네가 여행을 하면서 서양 건축의 껍데기만 핥아보고 올까 봐 걱정이다. 예전의 나처럼 말이다. 건축은 사람이 하는 거다. 시류도 사람이 만들어 가는 거다.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거다. 지금의 건축은 그 위대한 장인들의 흔적일 뿐이다. 흔적에 혹해서 그 안의 정신을 간과할까 봐서 걱정이구나.”

그는 항상 건축을 진지한 자세로 대했다. 심지어 우주 건축을 말할 때조차도 그는 진지했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가르침이었다.

흔적만 좇다가 흔적이 끊어지면 미아가 된다. 그러나 그 흔적이 어디로 향하는지 방향을 알면 결국은 도달한다.

흔적은 확실할 족적이되, 반드시 그것이 목적지로 도달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숲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주저앉든지, 가시덤불을 헤치고 길을 내든지.

그러나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

한 교수에게 말했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겠습니다.”

“큭, 그래. 그게 정답이지.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와라. 할 일 많으니까.”

못난 제자 때문에 걱정이 한 아름인 한 교수가 웃으며 돌아갔다.

할 일 많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이상해.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그러나 일단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새로운 세계!

어느 성인께서 말씀하셨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해라. 즉, ‘최선을 다해서 하루살이로 살아라’는 말씀이다.

차에 치이던 그날도 나는 내일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개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이번 생에서의 첫 해외여행!

아니, 전생을 통틀어서도 일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호텔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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