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3화
Competition(1)
24시간이 지났다.
왜 하루가 아니고 24시간이냐? 한 숨도 못 잤거든.
물론 저기 옆 데스크의 소세키들도 한 숨도 못 잤다. 자존심이 걸려있는데, 잠이 오겠나?
우리 교수님 두 분은 교대로 잠을 자면서 체력을 비축했다.
좀 더 많이 잔 사람은 물론 한 교수다.
자기 일도 아니니 뭐라고 할 것은 아니지만, 사기 쳐서 끌고 와서는 소처럼 일시키면서, 자기는 잘 잠 다 잔다는 게 살짝 빈정 상하기는 한다.
하지만 나는 한 교수에게 하소연할 시간도 아까웠다.
다행스럽게 모델링은 모두 끝났다. 경쟁이 붙어서 그랬는지, 품질 부분도 꼬투리 잡을 것이 없었다.
“호오. 잘하셨네요. 소세키상!”
응당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야 할 소세키들 이건만, 그들의 얼굴은 무거웠다.
“끙. 김 상도 생각보다 실력이 있군요.”
셋이서 난리를 치며 만들었던 것 보다 내가 만든 부분이 더 많았거든!
당연한 결과다. 저들은 건물 모델링에 능한 사람들이 아니고, 나는 20년 경력자니까!
인체 모델링과 애니메이션으로 승부를 봤다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자식들. 무시하더니 꼴좋다.”
콧대가 꺾인 일본인들을 보며 한 교수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다.
“확실히 전문가네요.”
“그래?”
“속도 면에서는 제가 앞섰을지 몰라도, 세부적인 면을 따지면 확실히 저들이 더 뛰어나네요. 당연히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앞설 거라 생각했다가, 이런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와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뿐이죠.”
“사기꾼 아니고? 네가 말하길래 그런 줄 알았는데!”
‘아이고, 교수님! 사기꾼이면 제가 잡았겠습니까? 다 필요하니까 잡은 거죠.’
한 교수에게 눈이라도 한번 꿈뻑 해줄 걸 그랬다. 믿을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았다.
“아뇨. 진짜로 실력자들이에요. 저 사람들은 저런 자신감을 가질 만해요.”
자신의 실력을 알고 있는데, 저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갑자기 툭 튀어나온 내가 이상한 거지.
“성훈아, 그래도 한 번 더 밟을 거지?”
한 교수는 일본에 당한 것도 없을 텐데 열을 올린다. 이런 게 민족감정이라는 건가!
“하는 거 봐서요.”
“왜 이유가 뭔데?”
“실력들이 좋아서 쓸데가 있어요. 너무 밟아놓으면 제 실력이 안 나와요.”
하긴 한 교수도 아무 감정 없는 친구들이지만, 풀죽은 것을 보니 마냥 기분이 상쾌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니가 알아서 해라. 하지만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해. 일본애들 건방진 건 보기 싫어.”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표출하고는 한 교수는 자리를 떴다.
풀죽은 그들의 얼굴에서 하늘을 찌르던 자존심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일본의 특촬물을 보면서 꿈을 키운 사람들이리라. 고질라, 울트라맨, 가면라이더를 보면서 거기에 나오는 괴수들을 제 손으로 구현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사람들이었으니, 스필버그 감독의 초대를 받을 수 있었겠지.
최소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제 25살짜리 학생에게 밀렸다. 그것도 가장 기초가 되는 모델링의 속도로 말이다.
‘그래. 나라도 죽고 싶을 거야!’
나온 지 반년도 안 되는 프로그램을 장난감 다루듯이 단축키를 사용하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야 별 생각 없이 하는 거지.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도면을 현실로 구현해 내는데, 시간 더 걸리게 패널들을 일일이 꺼내놓고 작업을 할까?
당연히 아니지. 그건 이영오가 일부러 보여주려고 일일이 마우스로 마린 찍는 거나 같지.
그래서 어느 세월에 챔피언 먹겠어! 일부러 하는 게 더 어렵다.
그리고 또 하나. ‘맥스’는 그들이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이었으니, 그걸로 같은, 아니, 오히려 더 나은 모델링을 더 빨리 만들어내면 자괴감이 들지 않을까?
2,000만 원으로 300만 원을 못 이기면 바보라는 마음이 들겠지.
셋이나 있으면서 말이다. 결국 사용하는 사람의 경력 차이지만, 내 액면 어디가 20년 경력으로 보이는가?
문제는 이것 이후다.
건물벽체 면면에 텍스쳐를 입히고, 마이어가 원하는 질감과 색상이 나오게 하는 것.
이것을 매핑(Mapping)이라고 한다. 매핑과 조명에서 최종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거기서 실력이 갈라진다.
모델링은 손만 있으면 하는 거지만, 그 이후는 경험이 많은 것을 좌우한다. 이제 이들의 진짜 실력이 필요하다.
‘모델링만 할 거면, 굳이 이들을 잡을 필요가 없었지.’
매핑에 대한 의논이 끝나고, 소세키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패배의 기억을 떨쳐내고 싶음인지, 처음에는 비관적인 말들이 오가더니, 이제는 날 누를 궁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뛰어난 민족이라고, 한 때는 세계를 정복할 능력이 있었다고. 그 저력을 보여주자고!”
‘쯧. 일 하나 하는데 무슨 민족씩이나! 세계화가 코앞인데. EU 안 보이냐?’
하긴 일본도 대동아공영권을 들먹이면서 연합아시아를 꿈꿨던 자들이니,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을 만하다.
“미국에게 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우리의 식민지였던 조선! 그 하등한 민족에게 질 수는 없다고. 다른 건 몰라도, 매핑은 우리 전문분야. 질 수가 없지!”
살짝 열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4년만 기다려라. 2002 월드컵 때 할복하고 싶은 놈 몇 나올 거다.
‘왜 반자이! 라도 하지 그러냐?’
놈들은 내 기분을 상당히 상하게 하는 일본말 몇 마디를 더 하고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냥 화장실에 데려가서 옥수수 몇 개 털 걸 그랬나? 미국한테는 져도 되고, 한국한테 질 수 없다는 건 또 무슨 논리냐! 개쌍놈들!’
마이어에게 말했다.
“마이어! 디자인 변경하는 거 어때요? 이 상태로는 임팩트가 약해요!”
“무슨 소리야! 시간도 없는데.”
“마이어가 설계한 건물은 변형 가능한 구조잖아요.”
마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가 생각하는 집은 움직이는 집이었다.
저 허연 머리에서 이런 유아적인 생각이 나오다니!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집을 모듈화해서, 같은 집을 넓히기도 좁히기도 한다는 것!
이것이 마이어의 중요한 설계 개념이었다. 즉 약간 역삼각형의 집도 만들 수가 있다.
마이어에게 말했다.
“날개 이거! 옆으로 더 쫙 벌리자고요.”
“안 돼! 그럼 안정적이지 못해. 그리고 건축법에도 걸려!”
“흥!”
내가 코웃음 쳤다.
‘이 양반아. 지금도 건축법에 걸려! 이게 집이냐. 로봇이지!’
“아! 또 왜? 뭐가 맘에 안 드는데!”
마이어가 짜증을 냈다. 시간은 촉박하지. 어린놈은 딴죽 걸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마이어. 이거 지을 거예요? 어디다가?”
“짓긴 뭘 지어! 이런 컨셉이라고 발표하는 거지!”
“어차피 안 지을 거면 화려하게 가자고요. 보는 사람도 좋고, 하는 사람도 폼 나게! 안 지을 건데. 법은 무슨!”
옆에서 한 교수가 박장대소한다.
“성훈이 말이 맞네. 짓지도 않을 건데. 법은 무슨!”
날 똑같이 따라하며, 마이어를 놀렸다.
마이어는 고민에 빠졌다.
띠! 띠! 띠!
고민은 3초 만에 끝났다. 얼굴에 웃음꽃을 가득 피우면서.
“그러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역삼각형! ‘T’자 집이 ‘ㅜ’형 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날개가 훨씬 넓어지는 것이다.
마이어가 물었다.
“그런데 성훈. 버스에 부딪치면 어떡하냐?”
“2층 버스요? 그럼 3층부터 하면 돼죠.”
한 교수가 끼어들었다.
“마이어. 개념인데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어차피 안 지을 건데!”
상상할 거리가 생겨서 신이 난 한 교수가 말을 이었다.
“집이 하늘을 날면 어때. 물에 뜨면 또 어때.”
‘한 교수님. 거기까지는 오버액션입니다요!’
내가 한 교수의 말을 잘랐다. 가만 놔두면 또 우주건축 나온다.
“마이어! 건축계의 트랜스포머! 어때요?”
“크으. 멋있다. 그걸로 하자.”
마이어의 걱정이 이어진다.
“크. 그럼 구조계산은 어떻게 하지?”
한 교수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
“안 지을 거래매!”
“그렇지. 그랬지! 이렇게 가자고!”
마이어의 설계가 파격적으로 변했다.
천재는 개뿔! 노하우는 개뿔!